[미디어비평] 영화 '서울의 봄'

눈발이 휘날리는 1979년 12월 12일.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정우성)은 고작 100명 남짓한 병력을 이끌고 광화문 광장을 지나 경복궁으로 향한다. 경복궁에는 자신의 예하 부대이자 수도 서울을 지키는 30단이 있다. 이태신이 그곳을 향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반란을 위해 30단에 모인 전두광(황정민)과 그 일당을 잡고 쿠데타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단숨에 그들을 제압하고 싶지만, 상황은 그를 외면한다. 모든 정보를 장악한 전두광에 의해 이미 군은 반란군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바리케이드와 철조망으로 빼곡한 길 반대편에서 전두광은 추악한 승리의 미소를 이태신에게 보인다.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44년 전 신군부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 12·12 사태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이 지난달 23일 개봉했다. 관객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개봉 이후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서울의 봄’은 지난 14일 기준 누적 관객 수 799만 명을 기록했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올해 두 번째 천만 영화 대열에 합류할 것으로 전망된다.

잊고 살았던, 알지 못했던 그날의 이야기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시작된다. 군의 장성들이 느닷없는 긴급 소집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뭉친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리더 전두광은 대통령 사망이라는 위기를 다시 없을 기회로 여기며 군의 실권 장악을 도모한다. 전두광과 하나회가 군의 모든 정보를 움켜쥐며 흔드는 동안,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상호(이성민)는 수도 서울을 지키는 수도경비사령관에 갑종(초창기 육군 장교 육성 제도, 현재의 학사장교와 비슷하다) 출신에 원칙으로만 움직이는 장군, 이태신을 임명한다. 그의 원칙이 전두광의 전횡을 막을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이후 영화는 12월 12일 긴박했던 9시간에 집중한다. 전두광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과 이를 막기 위해 애쓰는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 특전사령관 공수혁(정만식), 헌병감 김준엽(김성균)의 대립을 그린다. 관객들은 이미 실제 역사를 통해 누가 승자였는지를 알지만, 영화에서만은 이태신의 승리를 염원한다. 동시에 폭압적이지만 어설픈 반란군 앞에서 머뭇거리는 육군 본부(이하 육본)의 이른바 ‘똥별’을 향한 분노와 탄식을 쏟아낸다. 영화의 끝에 이르러 반란을 막으려던 이들이 연행되고, 반란에 성공한 하나회는 춤사위를 이어간다. 대비되는 두 집단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제대로 알지 못했던 12·12사태의 단면을 마주하게 된다.

전두광이 하나회를 주동해 반역을 꾀하고 있다. ‘서울의 봄’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전두광이 하나회를 주동해 반역을 꾀하고 있다. ‘서울의 봄’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이태신이 반란군의 서울 진입을 막기 위해 회의 중이다. ‘서울의 봄’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이태신이 반란군의 서울 진입을 막기 위해 회의 중이다. ‘서울의 봄’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서울의 봄’이 다룬 12·12사태는 전두환과 신군부 독재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국가의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민을 무참히 짓밟고 고문했다. 그런데 정작 그날의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왜 우리 군대는 어설픈 반란군의 반역을 막지 못했는지 우리는 자세히 배우지 않았다. 단순히 1979년 12월 12일 밤,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단순하고 건조한 문장으로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고 만다. 더 빨리, 더 안전하게 민주주의 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던 기회는 한 명의 추악한 탐욕으로 인해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았다. ‘서울의 봄’은 그런 점에서 이 시대를 살았던 중·장년층에는 잊고 살았던 그날의 이야기를, 청년층에게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그날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추악한 웃음을 뚫고 전선을 간다

영화는 여전히 살아있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명배우들의 연기 덕분에 많은 관객에게 호평을 얻었다. 하지만 단순히 역사를 다루고 있기에, 전 국민이 분노할 사건이기에 흥행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영화에는 12월 12일, 그 밤의 의미를 함축적이고 강렬하게 담아낸 하나의 장면과 하나의 음악이 아우라를 발하고 있었다.

반역에 성공한 뒤, 전두광은 홀로 화장실에 남는다. 이윽고 터지는 전두광의 추악한 웃음을 관객은 오랜 시간 인내해야 한다. ‘서울의 봄’을 본 모든 관객이 마지막까지 답답하고 불쾌한 기분을 안고 영화관을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관객들은 2시간 넘는 상영 시간 동안, 이태신이 결국 패배할 것이란 걸 알면서도 그를 응원했다. 그래야 하므로, 그게 일반 시민이 생각하는 정의로운 결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터져버린 불의(不義)의 웃음에 관객은 허탈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다. 허리를 굽히고 손을 내저으며 웃는 전두광의 모습에서 기괴한 폭력의 상징 ‘조커’를 떠올리게 된다. 패배한 정의를 보호하기보다 성공한 불의를 보여준 이 장면은 관객들을 허구가 포함된 영화에서 현실의 역사로 순간 이동시켰다.

전두광이 긴장한 표정으로 육본 골목을 걷고 있다. ‘서울의 봄’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전두광이 긴장한 표정으로 육본 골목을 걷고 있다. ‘서울의 봄’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 젊은 넋 숨져간 그때 그 자리 / 상처 입은 노송은 말을 잊었네 /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 전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삽입곡 ‘전선을 간다’가 흘러나온다. 김성수 감독은 관객 시사회 GV에서 영화를 기획할 때 이미 군가 ‘전선을 간다’를 엔딩곡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군가는 군인들이 총알이 쏟아지는 현장에서도 나가 싸우라고 만든 곡인데, 이 노래는 군인이 슬픔과 아픔을 느끼면서도 전쟁터에 남아있겠다는 음조와 가사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곡은 여러 번 변주되며 일종의 영화 주제곡으로 영화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쿠데타를 저지하지 못한 군인들의 허무하지만 용감했던 싸움은 ‘전선을 간다’와 함께 오버랩되며 반역을 막기 위해 나섰던 그날의 처절함을 느끼게 한다. 때로 백 마디 명대사와 화려한 명장면보다 삽입된 노래 한 소절이 영화 전부를 설명하기도 한다. ‘전선을 간다’는 그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름 없이 사라진 군인들의 실제 이야기를 찾아보게 만드는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치였다.

심박수 챌린지, 젊은 층이 주도한 흥행

영화 ‘서울의 봄’의 독특한 점은 바로 젊은 층이 흥행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소셜 네트워크에는 영화를 보고 난 뒤, 분노를 담은 심박수 챌린지까지 줄을 이었다. 그 시절을 경험하지도 못했던 청년층은 왜 이 영화에 강하게 반응했을까? ‘서울의 봄’은 현재 우리 사회에 어떤 말을 건네고 있는 걸까?

우선 전두환과 그가 저지른 폭력적인 정치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살아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는 점이 청년층에게 강하게 다가왔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을 다룬 영화가 그러하듯, 한국의 근현대사는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로 가득하다. 신군부 독재 역시 마찬가지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사망했고 그들은 법정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사면 이후 그들의 삶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국가 권력을 찬탈했지만, 전 국가원수라는 이유로 그들은 보호받았다. 나아가 그들에 동조했던 하나회는 해체되기 직전까지 국가의 고위직에 앉아 권세를 누렸다. 반면 반역을 막기 위해 몸 던졌던 이들은 끝끝내 고통에 시달리며 살았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었던 반란 세력이 뻔뻔히 살아간다는 사실은 자유와 평등, 공정의 가치를 중시하는 청년층에게는 절대 정의롭지 않은 일이었다.

노태건이 하나회를 선동한 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서울의 봄’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노태건이 하나회를 선동한 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서울의 봄’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육본의 장성들이 신사협정을 했다는 이유로 김준엽 헌병감과 공수혁 특전사령관의 전화를 끊었다. ‘서울의 봄’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육본의 장성들이 신사협정을 했다는 이유로 김준엽 헌병감과 공수혁 특전사령관의 전화를 끊었다. ‘서울의 봄’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속 육본의 무능한 장군들도 청년층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뻔히 반란군이 서울을 향하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외면하고 회피했다. 일이 꼬일 대로 꼬인 상황에선 모든 장성이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했다. 풍전등화의 국가와 군대를 지킨 건 패배가 불 보듯 뻔한 상황인 걸 앎에도 나선, 그래서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동상을 바라볼 수 있었던 이태신뿐이었다. 육본의 무능한 별들의 모습에서 청년층은 사회에서 숱하게 만난 이기적인 기성세대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집단을 중시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책임을 회피하는, 그래서 결국은 청년을 각자도생의 늪에 빠뜨리는 그런 어른 말이다. 그러나 다행인 점은 이태신과 헌병감 김준엽이라는 군인을 통해 그런 처절한 순간에도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진짜 어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역사에 남긴 과오, 성공한 반역이란 없다

이번 주말을 넘기면 ‘서울의 봄’은 역사적 사건을 다룬 또 하나의 천만 영화로 기록된다. 역사적 영화가 늘 그러했지만, 이 영화의 등장으로 정치권은 시끌벅적하다. 여당과 야당은 다가올 총선을 앞두고 영화 속 정의는 자신들의 업적으로, 불의는 다른 이의 짓으로 평가하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아있다. 영화 속 이태신이 그러했듯이 각자의 소신대로 사니 말이다.

다만 나는 영화 속 전두광이 외치는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이라는 말에 반기를 든다. 불의한 반역은 반역일 뿐 결코 성공한 혁명으로 포장할 수 없다. 불의로 누린 그 어떤 권세라도, 훗날 시간이 흘러 그 죗값을 치르게 돼 있다. 설령 현실의 법정에서 모두 매듭짓지 못하더라도, 역사의 법정에서 시민들은 끝까지 추궁할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 속 전두광,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아는 그날의 주동자들이 역사의 단죄를 피할 길은 없다. 그들의 과오가 잊히지 않도록 시민들은 그날의 밤을 기억할 것이다.

이태신이 반란군을 막기 위한 작전 회의를 하고 있다. ‘서울의 봄’ 스틸컷
이태신이 반란군을 막기 위한 작전 회의를 하고 있다. ‘서울의 봄’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관련기사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