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넷플릭스 ‘성난 사람들’ (원제: Beef)

※이 글은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힘을 빌려, 이 세상의 온갖 급변, 재난, 이변은 종말을 고하리라. 또한 온갖 논쟁, 환상, 기형적인 것들도 끝이 나리라.” 

시인 빅토르 위고의 이 말을 통해 우리는 근대 초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 불안과 공포는 일상적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으며 예측 불가능한 자연재해, 인간 육체의 취약성, 그리고 적대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타인에 대한 공포가 전근대인의 삶을 지배했다. 근대로의 도약은 인간이 이런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근대적 인간은 과학 기술이 우리 삶의 과정과 끝을 자연과 운명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다섯 세기가 지난 뒤, 프랑스의 역사학자 뤼시앵 페브르는 근대적 삶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완전히 엇나갔음을 지적한다. “우리의 시대 역시 공포가 가득한 시대다.”

근대인의 삶이란 유동적 근대의 불확실성 속에서 공포와 무력감에 휩싸여 허우적대는 삶이다. 유동적 근대란 세계화 등으로 인해 새롭고 원인을 파악하기 어려운 위협이 계속 발생하는 상황에서 모든 책임은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현대인의 불안한 삶의 조건을 뜻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누구나 포착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린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처럼 인식할 수 없고 대처할 수 없는 불안과 불확실성을 ‘유동적 공포(Liquid Fear)’라고 이름 붙였다.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드라마 <성난 사람들(원제: Beef)>은 이런 현대인의 일상적인 불안과 공포를 열 편의 서사로 함축해 보여준다.

늘 불안하며 무언가 결핍된 인간들 

두 주인공 에이미와 대니는 늘 화가 나 있다.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두 주인공 에이미와 대니는 늘 화가 나 있다.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성난 사람들(원제 Beef)>은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 2세대의 불안을 다룬 드라마다. 주인공인 에이미(앨리 웡)와 대니(스티븐 연)는 항상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과 분노에 시달리며, 그 분노가 이 드라마의 서사를 ‘멱살 잡고’ 이끌어간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또한 ‘포착할 수 없고 길들일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근대적 인간’의 상징이다. 주인공인 에이미와 대니의 서사가 워낙 자극적인 탓에 처음에는 다른 등장인물들의 정신병적 심리나 성격적 결함이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이가 ‘문제적’이다. 

에이미의 일본인 남편 조지.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에이미의 일본인 남편 조지.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에이미의 일본인 남편인 조지(조셉 리)는 유명한 미술 작가인 부모 밑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예술을 업으로 삼았으나, 실상은 모친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무능력한 한량이다. 그의 인생은 부유한 부모에게서 능력 있는 아내로 옮겨가는 기생적인 형태이며, 아내의 그늘에서 삶을 영위하면서도 ‘영적인(이라고 쓰고 ‘육체적인’이라고 읽는)’ 관계를 찾아 바람을 피운다. 조지의 모친인 푸미(패티 야츠타케)는 일본의 속담처럼 모든 ‘냄새나는 것을 덮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경제적으로 파산 직전이라 아들 부부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 도둑질하려고 시도하면서도 아들 내외 앞에서는 끝까지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숨긴다. 며느리인 에이미가 자기 아들인 조지와의 갈등으로 인해 고민하자, ‘문제를 인정하면 현실이 되니 끝까지 모른척하라’는 조언을 한다. 

대니의 동생 폴.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대니의 동생 폴.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대니의 친동생인 폴(영 마지노)은 성인이 되고서도 형에게서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독립하지 못해 몸만 자란 모습의 어린아이다. 그는 별다른 직업 없이 형에게 얹혀살며 인터넷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고, 암호화폐 투자가 대박이 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산다. 그는 형의 주택 수리공 일을 비하하면서도 대니가 함께 수리업체를 운영하자고 설득하자 바로 태도를 바꿔 자신이 생각해 둔 업체 이름을 제시하는 등 매사에 충동적이며 주체적이지 못하다. 하나님 말씀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듯이 보이는 건실한 ‘교회 청년’ 에드윈(저스틴 민)은, 대니의 등장으로 교회 내 입지가 흔들리자, 농구 대회에서 이성을 잃고 욕을 하거나 대니를 스토킹하는 등 영역 다툼이라는 사적 문제에 몰두하는 지질한 인간일 뿐이다. 

조더나와 나오미.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조더나와 나오미.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에이미의 플랜테리어(Planterior, 식물을 사용한 인테리어) 사업체인 ‘고요하우스’를 인수한 백인 억만장자 조더나(마리아 벨로)는 오리엔탈리즘에 심취해 ‘신비로운 동양’의 이미지에 빠져있는, ‘제국주의의 상징’이다. 그는 늘 동양풍 옷을 입고 다니며, 서구권의 ‘결과 중심적인’ 방식이 아니라 중국의 ‘관계 중심적인’ 사업 방식이 더 우월하다고 믿는다.

조더나의 성적 취향은 문화적 취향과 연결되어, 동양인에게만 성적인 호기심을 느끼는 ‘옐로우 피버(yellow fever)’ 기질이 있다. 그는 사업 파트너인 에이미에게 시종일관 은근하게 추파를 던지다가 실패하자 결국 다른 동양인 여성인 나오미(애슐리 박)와 결혼한다. 나오미는 가정주부라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열등감이 있어 자신이 비영리 사회단체와 일하는 의식 있는 사람이며 언제나 ‘이메일을 써야 하는’ 바쁜 사람임을 남들이 알아주길 바란다. 사실 그가 바쁜 이유는 에이미가 ‘로드 레이지(Road Rage)’ 사건의 당사자인지를 밝혀내기 위한 뒷조사 때문이며, 그 뒷조사를 시작한 이유도 에이미가 자기 자랑을 주의 깊게 들어주지 않아 복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편, 조더나와 나오미 간의 위계가 너무도 뚜렷해서 두 캐릭터가 ‘제국주의 서구 열강과 아시아 피지배국’의 상징임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이다.

타인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근대의 개인주의화 

에이미와 대니의 불화가 시작된 로드 레이지(Road Rage) 사건.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에이미와 대니의 불화가 시작된 로드 레이지(Road Rage) 사건.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극중 주요 서사의 축인 에이미와 대니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모든 모나고 이상한 등장인물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이다. 둘은 ‘로드 레이지(Road Rage, 보복 운전)’ 사건으로 얽히게 된다. 에이미가 대니의 자동차를 향해 손가락으로 욕하는 제스쳐를 한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이 로드 레이지를 벌인 것이다. 이후 대니가 에이미 차의 번호판을 보고 거주지를 찾아내 화장실에 오줌을 싸고 튀었고, 이에 에이미가 대니의 수리업체 리뷰에 별점 테러를 하면서 두 사람의 끝나지 않는 복수극이 시작된다.

바우만의 관점에서 보면 두 사람의 불화는 유동적 근대의 산물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인간의 삶을 위협하던 세 가지 영역인 자연재해, 육체의 약함과 유한성, 그리고 인간 사이의 적대 중에서 앞의 두 가지는 과학 기술을 활용해 어느 정도 해결했으나 마지막 요인은 해결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근대의 여러 불안은 “대부분 인간의 악행과 인간 악당에 대한 두려움을 위주로” 하며, 이는 “어떤 동료의 성의와 진실성을 믿기를 거부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 거부의 뒤에 거의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은 확고하고 지속적이며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 형성을 일절 시도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에이미.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에이미.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이는 대니와 에이미가 파국으로 치닫는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그들은 시작부터 서로를 악인으로 낙인찍었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은 관계가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차단해 항상 최악의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불화(beef)를 끝내려고 했다’는 대니의 말처럼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한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했다. 서로가 더 나은 인간으로 바뀔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서로가 이 문제를 잘 풀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신뢰가 부족한 탓이었다.

바우만은 사회학자 로베르 카스텔을 인용하며 근대사회에서 개인 간의 불신이 일상적으로 자리 잡은 원인이 ‘근대의 개인주의화’에 있다고 설명한다. 근대사회는 개인이 타인의 문제, 즉 사회적인 문제를 경시하고 사적인 문제에만 골몰하게 만든다. 근대사회의 ‘보편적인 인간’은 자신의 관심사, 자신의 이익, 자신의 자아정체성 등 오로지 자기 자신에 관해서만 생각하고 신경 쓰는 사람이다. 자신의 권리와 의무가 바람직한지에 관해 판단하는 것도 오로지 개인의 몫이다. 개인이 반성하고 자정하는 것을 도와줄 공동체나 조직은 없다. 이런 사회에서 근대인은 타인을 소통하고 결속할 존재가 아니라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되거나 해가 되는 존재로만 바라보며, 필요에 의해서만 타인과 협동한다. 타인은 자신의 실존을 위협하는 불안과 공포의 원천이자 적일 수밖에 없다. 바우만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니와 에이미의 불화는 당연한 것이다.

불안과 공포를 직면하기 

교회에서 찬송가를 들으며 흐느끼는 대니.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교회에서 찬송가를 들으며 흐느끼는 대니.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이 드라마를 제대로 즐기려면 오리지널 사운드트랙(OST)에 주목해야 한다.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의 음악들로 구성된 사운드트랙은 영화 미드소마의 음악감독을 맡았던 바비크릭이 만들고 선정했다. 후바스탱크(Hoobastank), 오프스프링(The Offspring), 켈리클락슨(Kelly Clarkson) 등 90년대에 사람들의 아이팟 플레이리스트에서 자주 등장했을 법한 이름들이 눈에 띈다. 가장 인상적인 선곡은 불가지론자조차 신앙심을 느끼게 만드는 찬송가들이다. 3화에서 오랜만에 한인 교회에 간 대니가 엘레베이션 워십(Elevation Worship)의 ‘오 주께 나오라(O Come to the Altar)’를 들으며 울먹이다가 종내에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장면은 보는 이에게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 거룩한 음악들이 종교적 충성심의 증빙이기보단 대니와 에드윈이 교회의 ‘우두머리 수컷’ 자리를 놓고 벌이는 정쟁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을 보며 감독의 유머 감각에 손뼉을 치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인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고자 만들어진 교회라는 공간에서도 인간은 타인과 대립한다. 교회는 사회와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회 내에 존재하며 사회와 상호작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근대사회의 불안과 공포가 타인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에 기인하는 이상,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의 그 어느 공간에서도 이를 온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

바로 여기에 이 드라마의 묘미가 있다. 세상 그 어느 공간에서도 온전한 나 자신으로 편안하게 존재할 수 없는 현대인의 불안을 묘사한 것 말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려고 할 때 보이는 독특한 습성이 있다. 대니는 한 시간 반을 운전해서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버거킹’에 간 뒤 ‘오리지널 치킨 샌드위치’ 4개를 주문해 인적 드문 곳에 트럭을 세워놓고 목구멍이 온통 막히도록 무식하게 먹어 치운다. 그가 버거를 먹는 장면에서는 그 어떤 즐거움도 엿볼 수 없다. 정신분석학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그는 자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에이미는 20대 때 한동안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 얼굴을 가린 채 성관계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는 어린 시절 겪었던 부모의 불화와 부친의 불륜으로 인해 자신이 이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있다. 이제는 대저택과 별장을 가진 성공한 사업가인데도, 자기 돈으로 산 별장에서조차 늘 편하게 쉬지 못하고 전업 보모의 가사를 도와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 더 나아가서는 현대인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거기에서 비롯된 이상행동을 어떻게 그렇게 세세하게 그려냈는지 감독에게 그 노하우를 묻고싶을 정도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이해하게 된 에이미와 대니.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생과 사의 경계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이해하게 된 에이미와 대니. 넷플릭스 '성난사람들' 화면 캡처

바우만은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마주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마주 봐야 할’ 대상이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며 근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위협과 불확실성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의미한다. 개인과 개인 간의 문제에 바우만의 해결책을 적용하면, 타인을 바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공포를 해소할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타인이 악의를 갖고 있다는 의심을 거두고 그들의 성의, 진실성, 변화의 가능성을 믿으며, 지속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끝까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안과 공포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이에 괴테가 우리를 위로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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