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jtbc '힘쎈여자 강남순'

이 이야기는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에서부터 시작된다. 권율 장군이 이끄는 군대와 백성들이 힘을 합해 일본군을 무찔렀다던, 바로 그 전투다. 역사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행주대첩에서 큰 활약을 했던 사람들이 있다. 행주치마에 돌을 담아 날랐다던 여인들 중 한 사람 ‘박개분’은 타고난 힘이 굉장해서 돌팔매질을 하는 족족 일본군을 쓰러트렸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2023년, 서울 곳곳에는 모계 유전으로 내려온 박개분의 괴력을 이어받은 여인들이 동네를 지키고 있다. 도봉구에는 도봉순 씨가, 강남구에는 강남순 씨가 살고 있다.

jtbc 드라마 '힘쎈여자 강남순' 포스터. 출처 jtbc 공식 홈페이지
jtbc 드라마 '힘쎈여자 강남순' 포스터. 출처 jtbc 공식 홈페이지

jtbc 드라마 <힘쎈여자 강남순>(이하 강남순)은 총 16부작으로 마지막화 시청률 10.4%를 기록하며 많은 사랑 속에 막을 내렸다. ‘강남순’은 5년 전 방영한 <힘쎈여자 도봉순>의 스핀오프 작품이기도 하다. 두 작품 모두 <마인>, <품위있는 그녀>로 이름을 알린 백미경 작가가 집필했다. 두 작품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 박개분의 괴력을 이어받은 여자들이 현대사회에서 각자가 지닌 힘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 나가는지, 주변은 어떻게 변해가는지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시리즈물이 주는 ‘깨알재미’도 곳곳에 등장한다. 극 중 도봉순(박보영)이 강남순의 외할머니 길중간(김해숙)을 경찰서에서 알아보고 6촌 어르신이라고 인사를 하는 식이다.

2023년 한국형 여성 히어로의 등장

5년 전 도봉순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스핀오프로 또 한 번 시청자를 만났다. 예전과 비슷한 내용이었다면 시청자들은 아마 금방 외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충실하게 시대상을 반영해 극을 발전시켰다. 2017년의 봉순이는 좋아하는 남자의 이상형이 ‘여리여리한 코스모스 같은 여자’라는 말을 듣고 잔뜩 움츠러들었다. 자신의 힘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본모습을 감추기 급급했다. 왠지 여자와 괴력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힘을 알아보고 경호원으로 채용하고 싶다고 제안하는 안민혁(박형식)을 만나며 조금씩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2023년의 남순이는 등장부터 아주 힘차다. 어릴 적 아빠와 여행에서 헤어지는 바람에 몽골 초원에 홀로 남겨졌지만, 자신을 발견한 양부모의 손에서 행복하게 자란다. 드넓은 초원에서 맘껏 기개를 펼치며 여자 장수로 활약한다. 성인 남성만 출전하는 힘겨루기 대회에서 어른들을 모두 제치고 1등을 차지하고, 체력적으로 힘들어하는 양부모를 대신해 게르(몽골의 이동식 집)를 뚝딱뚝딱 짓는다. 양 떼를 몰다가 한 마리가 이탈하면 맨손으로 번쩍 들어 울타리에 넣어버린다. 사춘기에 접어들며 자신이 한국 사람임을 알게 된 남순이는 한국어를 독학하고 스무 살 성인이 되는 날 양부모에게 잠깐의 이별을 고하고 한국으로 건너온다.

아빠와 헤어지고 남순은 평화로운 몽골에서 강한 여성으로 자란다. 출처 jtbc 공식 홈페이지
아빠와 헤어지고 남순은 평화로운 몽골에서 강한 여성으로 자란다. 출처 jtbc 공식 홈페이지

남순을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남순의 아빠 강봉고(이승준)는 아내 황금주(김정은)에게 변명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이혼을 당한다. 딸을 찾기 위해 금주는 10년 가까이 소녀들만 출전할 수 있는 힘겨루기 대회를 개최한다. 하지만 딸을 찾은 곳은 대회장이 아니라 화재로 타들어 가던 어떤 건물 앞이었다. 불길에서 나오지 못하고 건물에 갇힐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남순은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들었고, 그 모습을 목격한 금주는 남순이 자기 딸임을 직감했다. 마침내 불이 진화되고 모녀는 10년 만에 상봉한다. 모계 혈통으로 이어지는 이 괴력에는 한 가지 비밀이 숨어 있는데, 나쁜 짓을 저지르는데 능력을 사용하는 경우 영영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이었다. 금주로부터 비밀에 대해 듣고 난 후 남순은 마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을 경험한다. 몽골에서 지낼 때부터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 가장 즐거웠다며, 앞으로 자기 능력을 ‘악당을 무찌르고 시민을 구하는 일’에 쓰고 싶다고 말한다.

"약자들이 연대하는 이야기를 많이 쓰고 싶다." 백미경 작가가 여러 인터뷰에서 반복해서 했던 말이다. <품위있는 그녀>에서는 못 배우고 가난한 여자의 이야기를 내세웠고, <마인>에서는 주말극 최초로 여성 성소수자를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등장시켰다. 백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약자들은 처음에는 혼자 분투하다가 주변을 돌아보고 비슷한 입장인 사람들과 연대하는 방식을 택한다. ‘힘쎈여자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딸의 포부를 듣고 금주는 바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다. 서울에서 제일가는 ‘현금부자’인 금주는 자기 동네의 가장 골칫거리인 마약 문제부터 해결하고자 딸과 함께 팔을 걷어붙인다.

속아서 마약을 먹게 된 동생을 걱정하는 아빠와 남순. 출처 jtbc 공식 홈페이지
속아서 마약을 먹게 된 동생을 걱정하는 아빠와 남순. 출처 jtbc 공식 홈페이지

질문을 피해 간 순수한 히어로

초록 괴물 ‘헐크’를 연상시키는 엄청난 힘, 내적 갈등 없이 바로 영웅의 길을 택하는 주인공, 전형적인 캐릭터인 주변 인물까지, 사실 이 작품은 마치 전래동화처럼 줄거리가 단순하다. 전하려는 메시지 또한 명료하다. 권선징악, 사필귀정. 나쁜 놈은 벌 받고 착한 사람이 웃는 세상을 만들자는 이야기다. 시청자들이 열광하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전부 여성이라는 점 역시 유의미하다. 잘 만든 작품이건 조악한 작품이건 여성서사는 세상에 많이 나올수록 좋다. 인생에서 겪는 수많은 고민과 갈등이 여성인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겪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대중은 다양한 이야기를 접할수록 자신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게 된다.

삼대에 걸친 여자들의 의기투합으로 강남구 일대에서 활동하던 마약 범죄조직은 경찰에 붙잡힌다. 이 과정에서 약자들의 연대는 빠지지 않는다. 금주는 자신의 재산을 노리며 접근해 가짜 딸 행세를 하던 리화자(최희진)를 내쫓지 않고 직원으로 채용하고, 남순은 각종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만난 동료들이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마다 가장 먼저 앞장서서 목소리를 낸다. 이 모든 상황은 금주가 재벌이기에 가능하다. 남순의 집안 여자들이 초능력자이기에 가능하다. 한국 드라마 최초로 여성 초능력자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힘쎈여자 시리즈’는 환영받기 충분하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존재한다. 작가는 약자들의 연대를 보여주었지만 시청자로 하여금 어떻게 일상에서 약자들과 연대할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못했다.

금주는 남순의 몽골 엄마를 한국으로 초대한다. 남순은 몽골 엄마와 여행을 떠난다. 출처 jtbc 공식 홈페이지
금주는 남순의 몽골 엄마를 한국으로 초대한다. 남순은 몽골 엄마와 여행을 떠난다. 출처 jtbc 공식 홈페이지

드라마는 언제나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대중의 욕망을 극에 잘 녹여내는 작품일수록 많은 사랑을 받는다. 사회의 보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시기에는 사적 복수물이 인기를 끌었고, 경제가 호황을 이루던 시기 일본에서는 유난히 SF 장르가 쏟아져 나왔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약자들의 연대가 아니라 생존부터가 불확실한 상황처럼 보인다. 연대가 불가능하니 대리만족을 위해 생겨난 캐릭터가 강남순일지도 모른다. 부디 대중이 드라마를 통해 통쾌함을 맛보지 않길 바란다. 일상에서 답답함이 쌓이지 않아 더 이상 히어로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회가 오길, 약자 혹은 소수자 구분 없이 서로 돕고 힘을 합치는 일이 가능한 사회가 오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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