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무빙’

※이 글은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빙’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먼저 움직임을 나타낼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을 때, 다시 말해 ‘감동적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지난 8월 9일 디즈니사의 OTT 플랫폼 디즈니플러스에서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을 선보였다. 무빙은 공개와 동시에 디즈니플러스 이용자 수를 40% 이상 증가시켰으며, 지난 8일 아시아콘텐츠어워즈에서는 작품상을 포함해 6관왕을 달성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각종 패러디와 리뷰가 쏟아지고 있고, 8주가 지난 현재까지도 스트리밍 수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중이다.

지난 8월 9일 공개된 무빙 인물 포스터 디즈니플러스코리아 제공
지난 8월 9일 공개된 무빙 인물 포스터 디즈니플러스코리아 제공

시리즈는 총 20화로, 개봉 당일에는 7화까지 공개되었고 이후 일주일에 두 편씩 에피소드가 베일을 벗었다. OTT 플랫폼에서만 가능한 ‘빈지워칭(여러 편의 시리즈물을 시청자가 원하는 시간에 몰아서 보는 행위)’과 TV 드라마처럼 시청자가 본방송을 기다리게 만드는 전략 두 가지를 적절히 혼합한 사례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며, 원작자인 강풀 작가가 시리즈의 대본을 집필했다. 강풀 작가는 이제껏 자신의 웹툰을 실사화하는 작업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적이 없었지만, ‘무빙’만큼은 남달랐다. 4년 동안 웹툰 연재를 잠시 중단하고 각본 작성법을 배워 대본을 집필했다. 그리고 약 1년의 촬영 기간을 거쳐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히어로물의 무대가 한국에서 펼쳐진다

주인공 김봉석(이정하)은 정원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이다. 고3이지만 매일 등교 시간을 넘겨 지각하는 바람에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한다. 봉석이가 지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모래주머니 때문이다. 정확히는 봉석의 초능력 때문이다. 비행능력을 타고난 아빠 김두식(조인성), 초인적인 오감능력을 타고난 엄마 이미현(한효주), 봉석은 두 사람의 능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전직 국정원 블랙요원으로 일하다 실종된 두식처럼, 봉석에게도 위험이 닥칠까 걱정한 미현은 아들의 몸을 꽁꽁 묶어두는 방식을 택한다.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채우고 목에 물통을 걸어주는 식이다. 어린아이였던 봉석은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행복을 느끼자 자연스럽게 몸이 붕 떠올랐는데, 두식이 없는 상황에서 미현은 아들에게 비행 능력을 조절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미현은 아들에게 잘 웃어주지 않았고 봉석은 기분이 드러나지 않게 감정을 누르는 연습만 하며 살았다.

또 다른 주인공 장희수(고윤정)는 고등학교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정원고등학교에 전학 온 여학생이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학교폭력 가해자들과 몸싸움에 휘말렸는데 자신만 상처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히려 주동자로 몰렸고, ‘괴물’이라 비난받았다. 이전까지 딸에게 초능력에 대해 설명해준 적 없었던 아빠 장주원(류승룡)은, 이번에도 말없이 전 재산을 털어 다친 학생들에게 치료비를 물어줬고 희수는 그런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에 ‘인서울’ 대학에 입학해 효도하겠다고 다짐한다.

주원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일상이 곧 행복이자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무빙 예고편 갈무리
주원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일상이 곧 행복이자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무빙 예고편 갈무리

주원은 두식, 미현과 함께 국정원 요원으로 일했던 사람이다. 그의 능력은 초인적인 회복능력으로, 어떤 상처를 입어도 신체가 원상태로 돌아온다. 국정원에 발탁되기 전에는 고향인 포항에서 조폭으로 살았다. 자신이 지닌 능력으로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깡패 짓’이었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배신당하고 연고 없는 인천으로 흘러 들어왔을 때, 다방 종업원 황지희(곽선영)를 만나게 된다. 실제로도 길치인데다 인생의 방향도 못 잡고 있을 만큼 혼란스럽던 주원에게 지희는 평생의 길잡이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주원은 그렇게 지희를 만나고 국정원에 블랙요원으로 발탁되며, 고된 임무로 힘든 나날 속에서도 희수를 낳고 행복한 일상을 보냈다.

통제되는 정체성을 지켜내려면

두 가족의 사연은 각각 연관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지만, 사실 국정원이라는 정부 기관과 깊게 연관이 있는 하나의 이야기다. 정원고등학교는 국정원이 1세대 초능력자들 관리에 실패하자 체계적으로 2세대 초능력자를 길러내기 위해 세운 학교다. 1세대 초능력자들을 자신의 세력 확장을 위한 도구로 여겼던 민용준 차장(문성근)은 갖은 방법으로 초능력자들을 혹사했고, 가족을 두고 협박을 일삼았다. 국정원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두식이 북한에 투입되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을 것을 염려해 미현과 봉석을 인질로 삼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때때로 임무 수행에 방해가 된다며 주원의 아내를 교통사고로 위장해 죽인다.

무빙에 등장하는 초능력자들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익숙하게 봐 온 슈퍼히어로와는 사뭇 다르다. 절대 악에 대항해 불특정 다수의 시민을 구해내기보다, 국가 혹은 특정한 권력에 의해 통제되고 이용당한다. 특히 극 중 부모세대로 대표되는 1세대 초능력자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국정원이 정해주는 용도에 맞게 쓸모를 다해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발생했고, 1세대 초능력자들은 자식에게는 이런 인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억압과 회피라는 방법을 택한다. 미현은 봉석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아들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고, 주원은 아내처럼 희수도 잃게 될까 봐 딸에게 초능력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다, 심지어 주원의 다른 국정원 동료는 가짜 죽음으로 자식을 위장하기도 한다.

초능력자들의 싸움은 결국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공통의 이유를 발견하며 끝이 난다. 무빙 예고편 갈무리
초능력자들의 싸움은 결국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공통의 이유를 발견하며 끝이 난다. 무빙 예고편 갈무리

초능력자는 한국에만 있지 않다. 북한에서는 정원고등학교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뒤, 남한의 2세대 초능력자 양성 프로젝트를 무산시키기 위해 초능력자들, 북한 언어로 특수 기력자들을 몰래 파견한다. 하지만 시청자의 예상과 다르게 작품 속에서 악역은 북한 초능력자들이 아닌 민 차장과 그의 수하들이다. 북한에서 온 초능력자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어린 학생들까지 죽여야 끝나는 일이라는 걸 깨닫고는 임무 완수를 포기한다. 자신들도 마찬가지로 북한에 가족이 있고, 초능력을 물려받은 자식이 있기에,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총구를 다른 곳에 겨누기로 한다. 마지막 화에서 북으로 돌아간 인물 정준화(양동근)는 특수 기력자 양성을 지시한 고위 간부를 그 자리에서 사살한다.

나의 쓸모는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일

정원고등학교의 교사 최일환(김희원), 전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지만 능력치가 애매하다며 국정원으로부터 버려진 전계도(차태현), 이 두 사람은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초능력은 없지만, 자신이 군인이었던 시절 블랙요원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일환은 국정원에 지원해 정원고등학교 교사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밀려오는 파도처럼 다가오는 아이들의 진심은 일환을 어느새 진짜 선생님으로 거듭나게 한다. 북한 초능력자들의 침입으로 학생들이 위험에 처하자 일환은 맨몸으로 그들과 맞선다.

아버지의 능력을 물려받았지만, 아버지만큼 뛰어난 초능력자가 아니었던 계도는 정원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국정원으로 발탁되지 못했다.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 줄 것처럼 정원고등학교로 입학을 권했던 어른들이 태도를 바꾸자 계도는 혼란스러워했지만 이내 자신의 쓸모를 찾는다. 버스기사로 일하게 된 계도는 봉석과 희수가 위험에 처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도움을 주고, 동료 기사들의 버스에 배터리 문제가 생기면 맨손으로 고쳐주었다. 일환과 계도는 국가가 통제적으로 정한 쓸모를 따르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성에 알맞게 스스로 원하는 곳에 쓰임을 다하기로 결심한 인물이다.

북에서 파견될 때부터 준화는 어린 초능력자들을 해칠 생각이 없었다. 무빙 예고편 갈무리
북에서 파견될 때부터 준화는 어린 초능력자들을 해칠 생각이 없었다. 무빙 예고편 갈무리

북으로 돌아가지 못한 인물 권용득(박광재)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희수와 마주치게 되는데, 격한 전투 끝에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보고 ‘아저씨 많이 아프죠? 병원 가야겠는데...’라며 걱정해 주는 희수의 말에 울음을 터트린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던 친구를 잃고 삶의 이유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용득은 처음 받아보는 위로에 그만 주저앉아 아이처럼 운다. 용득도 희수, 주원과 마찬가지로 회복능력 소유자다. 용득은 ‘사람답게 살라’던 친구의 유언을 따라 스스로 원하는 곳에 정착해 쓰임을 다하기로 마음먹는다. 주원이 운영하는 치킨집에 직원으로 취직하고 세 사람은 새로운 가족이 된다.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다른 누군가가 통제하는 사회, 개인의 특별함을 특정인의 야망이나 조직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사회는 끔찍하다. 어쩌면 현실 속의 우리도 이런 불안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무빙 속 등장인물들은 여러 고난을 지나온 뒤, 스스로 자신의 쓸모를 정했다. 봉석은 노란 우비를 입고 위험에 처한 시민을 구하고, 희수는 대학에 입학해 아빠와 용득삼촌과 함께 치킨집 일을 돕는다. 일환은 이제 국정원 직원이 아닌 진짜 선생님의 삶을 살고, 계도는 매일 같이 버스를 운전한다.

2세대 초능력자 봉석과 희수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택한다. 무빙 스틸 이미지
2세대 초능력자 봉석과 희수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택한다. 무빙 스틸 이미지

무빙은 시청자들에게 공감과 기대를 선사했다. 다양한 인물들의 구체적인 서사는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이기는 사회를 보여주며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었다. 내 정체성을 타인이 함부로 훼손할 수 없듯, 내 쓸모는 내가 정한다는 메시지가,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쓸모를 다하겠다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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