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불완전한 구원'의 서사,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인생은 견뎌야 하는 시간과 행복 사이를 오가는 버스

군대에서 배운 사실. 인생에는 견뎌야 하는 시간이 있으며, 그 시간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렸던 훈련소 시절도, 후임이 들어올 때마다 감격했던 일병 시절도, 친했던 선임들이 모두 전역한 말년 병장 시절도 끝이 났다. 행복한 추억도 참 많았지만, 군생활은 결국 전역까지 견디는 시간이었다. 견뎌야 하는, 또는 견디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던 1년 9개월이 지나갔다.

전역한 후에 배운 사실. 견뎌야 하는 시간은 전역 후에도 이어진다. 오산 공군기지의 높은 담 안에서 이따금 전역 후의 삶에게 ‘기대’라고 적은 편지를 보내고는 했다. 전역 후에, 삶으로부터 받은 답장에는 ‘환멸’이라고 적혀 있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출소한 이후 ‘레드(모건 프리먼 역)’가 느꼈을 환멸감을, 나도 느꼈다. 견뎌야 하는 시간은 내가 아무리 만나는 걸 싫어해도 매일 만날 수밖에 없는 무례한 같은 반 학생과 같았다. 민간인이 된 이후에 견뎌야 하는 시간과 수도 없이 재회할 때마다, 그 학생과 다음 학년에 또 같은 반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고는 했다.

갓 전역한 24살의 나는 몰랐지만 26살이 된 지금의 나는 아는 사실. 우리의 삶은 결국 견뎌야 하는 시간과 행복한 시간의 총합이다. 그 비율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대개의 경우에 견뎌야 하는 시간은 길고 행복한 시간은 짧다. 초콜릿 쿠키에 비유하자면 전자는 밀가루 반죽이고, 후자는 초코칩이다. 삶은 길고 지루하고 지겹다. 이 명제는 실존적 진실이다. 그 진실은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삶이 어떠한 것인지 알게 되었더라도 좌절할 이유는 없다. 해방의 가능성이 있으니까. 얼마 전부터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 저널리즘대학원에 입학한 나는, 이전까지의 관성적이고 권태로운 삶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했다. 삶은 권태롭고 지겨운 무엇이지만, 우리의 삶은 해방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차분한 어조로 전하는 작품이 ‘나의 해방일지’(2022)다.

나의 해방일지

‘나의 해방일지’는 작년 4월 9일부터 5월 29일까지 방영된 JTBC 토일 드라마다. ‘눈이 부시게’(2019)와 ‘로스쿨’(2021)의 김석윤 감독이 연출하고 ‘또 오해영’(2018)과 ‘나의 아저씨’(2018)의 박해영 작가가 각본을 집필했다.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안 해 봤던 걸 하고 나면 그 전하고는 다른 사람이 돼 있던데”와 같은 대사들과 주연배우 손석구의 뛰어난 연기는 이 드라마가 4주 연속 TV화제성 드라마 부문 1위를 지키게 했다. ‘구찌보다 구씨’, ‘손석구 신드롬’이라는 말이 증명하듯이 '멜로가 체질'(2019), 'D.P.'(2021)를 거치며 라이징 스타로 성장하던 손석구를 일약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는 배우로 만든 킹메이커 작품이기도 했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손석구와 김지원은 5주 연속 출연자 화제성 부문에서 각각 1위와 2위를 했다.

출처 JTBC
출처 JTBC

‘나의 해방일지’는 드라마 화제성 지수 차트를 ‘올킬’했지만, 시청률은 높지 않았다. 시청률 2.9%로 시작한 드라마는 최종회에서 자체 최고 시청률 6.7%를 기록하며 종영했다. 경쟁작이었던 tvN 토일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2022)의 첫 회 시청률과 최종회 시청률이 각각 7.3%와 14.6%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분명 높은 시청률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드라마가 있다고 믿는다. ‘눈 내리는 겨울날’ 같은 드라마와 ‘천둥 치는 여름날’ 같은 드라마. 전자는 소란하지 않고 요란한 극적 전개가 없는 조용한 드라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득뽀득 소리만 들리는 겨울날처럼. 후자는 떠들썩하고 사람들을 예고 없이 놀라게 하는 드라마다. 연이은 천둥소리로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여름날처럼. 영화로 비유하자면, 전자는 ‘도망친 여자’, ‘소설가의 영화’를 연출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후자는 ‘타짜’, ‘전우치’, ‘도둑들’과 ‘암살’을 연출한 최동훈 감독의 영화를 닮았다. 최동훈 감독은 천만 관객 영화를 두 편이나 연출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흥행 감독이고, 홍상수 감독은 최근 개봉한 일곱 작품의 관객수가 5천 명에서 만 명 사이인, 작가주의 감독이다. 우리나라 시청자들은, 영화도, 드라마도 ‘눈 내리는 겨울날’ 같은 작품을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최근 5년 사이 크게 흥행한 드라마들인 ‘SKY 캐슬’(2018~2019), ‘펜트하우스’(2020~2021), ‘재벌집 막내아들’(2022), ‘더 글로리’(2022~2023)와 같은 작품들은 모두 ‘천둥 치는 여름날’형 드라마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드라마들은 모든 에피소드가 충격적인 결말로 끝나고, 강한 반전을 지니며, 에피소드를 거듭하면서 극적 몰입감을 고조시키는 빠른 서사적 전개를 포함한다.

‘나의 해방일지’는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밤 또는 차분하고 단정한 사람의 성정을 닮은 작품이다. ‘나의 해방일지’에는 충격적인 결말과 강한 반전이 없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속도는 느리다. 우리나라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대중적인 드라마는 분명 아니다. 상류층 또는 재벌이 아닌 우리의 이웃들이 주인공이며, 드라마는 그들을 재촉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범속한 일상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나의 해방일지’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두 주인공이 사랑을 통해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서로를 변화시키는 이야기다.

‘불완전한 구원’의 서사

신약 성경은 하느님의 세계에서 온 이방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인류를 구원한다. 이것은 ‘완전한 구원’의 서사로서 신화의 영역에 속한다. ‘완전한 구원’의 서사는 판타지에도 등장한다. 영화 ‘해리포터’(2001~2011) 시리즈에서 ‘머글’(마법사가 아닌 인간) 세계 출신 이방인 해리 포터는 호그와트에 입학한 이후 마법세계를 구원한다. ‘해리포터’의 줄거리와 세계관을 팀 버튼식으로 비틀어 변용한 드라마 ‘웬즈데이’(2022)에서 ‘네버모어 아카데미’에 입학한 웬즈데이는 ‘별종’들을 몰살하려는 세력을 물리침으로써 별종들을 구원한다. 이방인이 자신이 흘러들어온 세계를 구원하는 서사는 이처럼 판타지 장르에서도 선호된다. 이방인 구원자가 자신이 정착하게 된 어느 세계 전체를 구원한다. 그 세계에 사는 모든 인물들이 구원된다는 점에서 이 구원은 완전하다. 이 완전성은 구원의 주체가 지닌 초현실적 능력에서 기인한다. 성경의 예수는 신이며, 해리포터와 웬즈데이는 각각 마법사와 초인적인 능력 – 웬즈데이는 환영을 통해서 진실을 볼 수 있다 - 을 지닌 인물이다.

‘나의 해방일지’의 서사는 ‘불완전한 구원’의 서사인데, 이것은 ‘나의 해방일지’의 큰 미덕이지, 결코 결점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완전한 구원’의 서사였다면, 드라마는 현실성을 상실함으로써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방인 ‘구씨’(손석구 역)가 ‘염미정’(김지원 역)을, 염미정이 구씨를 구원한다. 절망에 빠진 두 인물이 서로를 구원함으로써 서로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구원의 범위와 강도는 신약, ‘해리포터’, ‘웬즈데이’와 큰 차이가 있다. 구원은 두 사람 사이에서, 삶에 절대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보다는 삶에 긍정적인 균열을 내는 식으로 발생한다. 구원의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의 해방일지’는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 어떠한 방식으로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출처 JTBC
출처 JTBC

경기도 산포시 –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허구의 도시 – 에 사는 삼 남매, 염기정(이엘 역), 염창희(이민기 역), 염미정은 권태롭고 무력하게 살아가면서 ‘해방’을 꿈꾼다. 그들이 ‘해방’을 갈구했다는 것은, 그들이 무언가에 구속되었다고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염미정은 해방되고 싶다고 말하며 “어디에 갇혔는지는 모르겠는데, 꼭 갇힌 것 같아요. 속 시원한 게 하나도 없어요. 갑갑하고, 답답하고, 뚫고 나갔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미정은 해방을 간절히 원하지만 정작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일상이다. ‘나의 해방일지’ 초반부는 미정의 괴롭고 우울한 일상을, 긴 시간을 들여 보여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긴긴 시간 이렇게 보내다간 말라죽을 거 같아서, 당신을 생각해 낸 거예요. 언젠가는 만나게 될 당신. 적어도 당신한테 난 그렇게 평범하지만은 않겠죠? 누군지도 모르는 당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만나지지도 않는 당신. 당신, 누구일까요?” (1화)

카드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염미정은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회사에서 그녀는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늘 겉돈다. 회사 상사인 최 팀장은 그녀를 괴롭힌다. 그녀에게 빚을 떠넘긴 전 남자친구로 인해서 그녀는 신용불량자가 될 위기에까지 처한다. 그러한 상황에 놓인 염미정이 꿈꾸는 구원은, 사랑이다. 그녀는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길, “당신”을 기다린다. 권태롭고 지친 그녀의 삶에 구씨가 걸어들어온다.

산포시에 이방인으로 흘러들어온 구씨는 미정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싱크대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단지 술을 마실 뿐이다. 구씨의 삶은, 그가 매일 술을 마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절망적이다. 염미정이 구씨를 좋아하게 된 원인을, ‘나의 해방일지’는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시청자들은 절망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염미정이, 자신만큼이나 절망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이는 구씨를 보며 공감과 연민을 느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랑은 또한 논리로 설명될 수 없고 신비로운 특성을 지닌다는 것을, 지난 연애들을 통해서 시청자들은 이해하고 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어느 날 연애를 시작하는 경우도, 자신의 이상형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는 일도 많다. 염미정이 구씨를 좋아하게 된 원인보다 중요한 것은, 염미정이 구씨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염미정은 구씨를 찾아가 자신을 ‘추앙’할 것을 요구한다. “날 추앙해요.”

‘추앙’. ‘나의 해방일지’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되었던 말이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기호의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를 구분했다. 기표는 기호의 문자와 음성을, 기의는 기표가 지칭하는 의미를 일컫는다. 우리는 동일한 어휘(기표)를 사용하지만, 그 어휘를 서로 다른 의미(기의)로 사용한다. 추앙이라는 말도 각자 다르게 정의할 수 있다. 추앙이라는 어휘의 사전적 정의를 적용하자면 미정은 구씨에게 불평등한, 위계적인 사랑을 요구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미정의 정의는 사전적 정의와 다르다. 미정은 ‘추앙’을 명쾌하게 정의한다. 추앙하는 것은 응원하는 것이라고. 그녀의 추앙하라는 요구는, 살면서 충만감을 느낀 적 없고 자존감이 낮은 자신을 응원해서 삶을 바꾸어달라는 요구였다.

구씨는 염미정을 ‘추앙’하기 시작한다. 구씨의 응원을 받으며 미정은 변화한다. 미정은 구씨를 만나며 자신감을 키운다. 9화에서 그녀는 구씨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감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자신이 이제는 자연스럽고 편하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이 올라”오고 스스로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며 높아진 자존감과 행복을 표현한다. 그렇게 “염미정의 삶은 구씨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나뉜다.

미정도 구씨의 삶을 변화시킨다. 미정이 구씨를 변화시킨 기제를, 드라마에서는 하나의 어휘로써 명징하게 규정하지는 않는다. 구씨가 미정을 변화시켰던 방식이 ‘추앙’ 또는 응원이었다면, 미정이 구씨를 변화시켰던 방식은 ‘존중’이었다. 미정이 구씨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힘은, 역설적으로 미정이 구씨를 변화시키려고 전혀 노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는 구씨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빌리 조엘의 노래 ‘Just the Way You Are’에는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변할 필요 없어요”, “저는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거예요”라는 가사가 있다. 미정이 구씨를 대한 태도가 꼭 그렇다. 미정의 신뢰라는 따뜻한 품속에서 구씨는 인생에서 행복을 느끼고 행복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구씨와 구자경

누가 내 말투가 재수없대

잘난 척만 한대

또 누구는 내가 너무 착하대

바보같을 정도래

IVE(아이브), “Either Way” 가사 중

“응답하라” 시리즈의 애청자들은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누가 여주인공의 남편이 될지 궁금해하며 시리즈를 시청했다면, “나의 해방일지” 애청자들은 구씨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며 드라마를 시청했다. 구씨의 정체는 극의 후반부에 가서야 밝혀진다. 그는 호스트바의 마담 출신으로 산포에 숨어 사는 인물이다. 그의 정체가 공개된 이후, 애청자들 사이에서는 드라마 주인공으로서 호스트바 마담이 적합한지에 대한 논란이 크게 일었다. 여기서 그 논란에 말을 얹지는 않으려고 한다. 다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지킬 박사를 연상케 하는 구씨의 두 자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구씨’를 지목하는 시청자들이 많을 것이다. 평면적인 인물은 극중 내내 단일한 성격을 보여주는 인물이고 입체적인 인물은 극이 전개되며 성격이 변화하거나 여러 성격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인물인데, 전자보다는 후자를 시청자들은 매력적인 인물로 받아들인다. ‘선덕여왕’(2009)의 ‘비담’이나 ‘비밀의 숲’(2017)의 ‘황시목’이나 ‘이창준’이 입체적인 주인공이다. 구씨 역시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14화에서 구씨는 미정을 “추앙”한 이후 자신의 이름을 묻는 염미정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 “구자경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구씨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장면이다. 호스트바 마담으로서 구씨는 미소를 보이지 않고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며 위압적인 모습을 노출하기도 한다. 그러한 그가 미정에게는 따뜻한 눈빛을 보내고 그녀와 있을 때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호스트바에서 느와르 영화의 냉정한 주인공인 그가 미정을 만날 때는 멜로 영화의 온화한 주인공으로 바뀐다. 구씨가 미정을 ‘추앙’하기로 약속했으며, 그가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기 때문이다. 미정에게 “추앙한다”고 고백했던 그는 이후 그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시적인 표현까지 동원해 가며 솔직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미정이 그동안 무진장 보고 싶었다고, 주물러 터트려서 한입에 먹어 버리고 싶었다고.

출처 JTBC
출처 JTBC

미정과 함께 있을 때는 다정하고 세심한 구씨는, 호스트바 마담으로서는 정반대의 자아를 노출한다. 자신을 배신한 인물인 백 사장을 찾아가 그를 위협하는 장면이나 호스트바에서 술값을 지불하지 않은 여성에게 고성을 지르며 욕설을 하는 장면에서 많은 시청자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미정을 대할 때의 구씨와 너무나도 다른 자아를 그가 드러냈기 때문이다. 누가 진짜 구씨일까? 미정의 다정한 애인도, 무서운 호스트바 마담도, 모두 구씨다. 당신이 등교할 때 셔츠에 가디건을 입고, 클럽에 갈 때 가죽 재킷에 가죽 바지를 입는다고 해도 당신은 변함없이 당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 또는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자아를 드러낼 뿐이다.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

우리는 모두 어릴 때 세상을 바꾸는 꿈을 꾸었다. 우리는 크면서 그 꿈을 잃어버린다. 내 삶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견딜 수밖에 없는 시간은 매일 이어진다. 세계의 구원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렵다. ‘나의 해방일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세계를 구원하기에는 무력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을 만큼은 강력하다고.

견뎌야 하는 시간은 배고픔처럼 평생토록 매일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 시간은 우리를 괴롭히고 지치게 하고 권태롭게 할 것이다. 어쩌면 완전한 해방이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나의 해방일지’는 우리에게 완전한 해방은 허락되지 않더라도, 짧지만 지속적인 해방은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일상 속에서 틈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함으로써 우리는 순간순간 해방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도 해방할 수 있다. 그 일은 어렵지 않다. 지쳐 보이는 친구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우울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친구에게 다정한 위로의 말을 건네면 된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해방시킬 수 있다. 이런 나날의 해방이 모여서 우리 각자의 ‘나의 해방일지’가 될 것이다. 곁에 있는 사람을 매일 해방한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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