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그러니까 2013년 겨울 김은숙 작가는 드라마 <상속자들>을 이렇게 소개했다. “한국판 ‘가십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작품의 배경은 이른바 ‘금수저’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였다. 이 학교에서는 가난한 친구에게 학교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라도 그가 ‘금수저’면 어떤 어른도 사태에 개입하지 않는다. 극 초반에 남자 주인공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한 한 남학생이 전학을 택하며 학교를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괴롭힘의 다음 대상이 여자로 바뀌고 가해자인 남자 주인공들과 삼각관계가 형성되면서 학교폭력은 그저 로맨스의 양념으로만 작용하게 된다. 가난하지만 밝고 선한 여자 주인공과, 그녀 덕분에 내면의 ‘성장’을 이뤄낸 재벌 2세 남자 주인공 서로가 ‘쌍방구원’을 하며 둘은 연인으로 발전하고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삼각관계에서 밀려난 다른 남자 주인공은 극 초반에 하차한 줄 알았던 학교폭력 피해자를 찾아가 별안간 사과한다. 하지만 피해자는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다.

2022년 12월 30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인물 포스터. 출처 넷플릭스코리아
2022년 12월 30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인물 포스터. 출처 넷플릭스코리아

가깝고 익숙한 경험, 학교폭력

시간이 흘러 김은숙 작가는 고등학교 2학년 딸을 둔 엄마가 되었다. 딸은 엄마에게 ‘언제적 김은숙이냐’며 핀잔을 주어 엄마를 충격에 빠트리더니 ‘내가 누군가를 죽도록 때리고 오면 가슴이 아플 것 같아, 아니면 죽도록 맞고 오면 더 가슴이 아플 것 같아?’라는 질문으로 엄마를 두 번째 충격에 빠트렸다. 작가는 <더 글로리> 제작발표회에서 딸의 질문이 그 자체로 너무 고통스러웠고, 여기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더 글로리>는 고등학교 시절 당한 학교폭력 때문에 몸과 마음이 모두 무너진 피해자 문동은(송혜교)이 17년 뒤 가해자들에게 상처를 되갚아주는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처절한 복수극이다. 그리고 이 복수극은 넷플릭스에 공개된 지 한 달이 넘은 지금까지도 각종 뉴스 기사와 시청 후기, 패러디 등을 만들어내며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주인공 문동은은 가난하지만 건축가를 꿈꾸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동은이 피해자가 된 이유는 알 수 없다. 가난하고 평범해서, 앞서 괴롭힘당하던 윤소희가 죽는 바람에, 혹은 제대로 된 어른 역할을 해주는 부모가 없어서라고 추측할 뿐이다. 화장실 청소를 떠넘기는 것을 시작으로 가해자 박연진(임지연)은 동은을 윤소희 다음 타깃으로 삼고 자기 친구들과 매일 같이 동은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8초 동안 목을 조르면 잠깐 기절했다 깨어난다는 ‘기절게임’이 진짜인지 궁금하다며 가해자들은 동은의 목을 조른다. 구타와 언어폭력은 기본이고, 고데기 온도를 확인한다며 달궈진 기구를 그대로 맨살에 갖다 대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동은은 경찰에 신고하고 담임 선생님에게 말해보지만 도리어 어른들로부터 2차 가해를 당한다. 동은의 피해에 분노한 유일한 어른인 보건교사가 그녀를 보호하리라는 기대도 잠시, 알 수 없는 이유로 쫓겨나듯 전근간다. 폭력을 방조하거나 심지어 부추기는 더 큰 힘이 배경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학교는 폭력의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보다 골치 아픈 일을 무마하고자 하는 의지가 크고 연진에게는 학교가 원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돈과 배경이 있다. 연진의 엄마는 경찰서장과 친하고 담임교사는 교육자의 윤리보다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게 중요한 사람이다. 동은의 엄마는 얼마의 돈을 받고 자식의 피해에 입을 다물 만큼 가난하고 무심하다. 결국 동은은 스스로 학교를 떠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1부 스틸컷. 출처 넷플릭스코리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1부 스틸컷. 출처 넷플릭스코리아

동은은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김밥집에서, 공장에서 일하며 대학입시를 병행한다. 온몸을 뒤덮은 화상 흉터에 고통스러워하며 자살 고민도 하지만 ‘누구 좋으라고 이런 선택을 할까'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는다. 그 뒤로 동은은 17년이라는 시간을 쏟아 복수를 준비한다. 교대에 입학해 과외만 하며 돈을 모으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공부해 가해자들의 소식을 따라잡는다. 연진의 남편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의 취미인 바둑을 배우고, 연진의 딸 예솔이 다니는 초등학교 이사장을 협박해 예솔의 담임 교사로 부임하기에 이른다. 동은이 고등학교를 떠나며 남긴 말 ‘내 꿈은 너야, 박연진. 우리 꼭 또 보자.’는 점점 실현된다. 이 과정에서 가정폭력의 피해자 강현남(염혜란)을 만나 서로의 복수를 위해 힘을 모으고, 또 다른 폭력의 피해자 주여정(이도현)을 만나 위안을 얻는다. 복수는 동은 인생의 과업이 되어 연진을 향한 마음은 그리움과 비슷할 지경에 이른다.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는 어느새 피해자들의 연대를 응원하며 동은의 복수가 성공하길 간절히 바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1부 스틸컷. 출처 넷플릭스코리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 1부 스틸컷. 출처 넷플릭스코리아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자고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

김은숙 작가의 고등학생 딸은 왜 엄마에게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졌을까. <더 글로리> 속 피해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유 없이 당한 억울한 일을 해결해주는 시스템이 부재했다는 것, 그래서 2차, 3차 피해를 보는 중이라는 것 말이다. 강현남은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편 때문에 얼굴에 늘 멍 자국이 있다. 하나뿐인 딸은 엄마를 지키겠다고 스마트폰에 ‘촉법소년 나이’를 검색하고는 아빠에게 식칼을 들이민다. 자신은 아빠를 죽여도 감옥에 안 간다며, 엄마 말고 자기가 하겠다며 울부짖는다. 경찰은 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는다. 주여정은 반사회성 인격장애 환자가 저지른 살인으로 아버지를 잃은 피해자다. 가해자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교도소에 갇혀있지만, 매일 여정에게 편지를 보내 고통스럽게 만든다. 편지에는 속죄의 문장이 아닌 아버지를 살해하던 순간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문장만 가득하다.

현남과 여정, 동은은 가해자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극의 초반부터 동은은 복수의 끝에는 ‘그 어떤 영광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갈 곳은 ‘지옥'으로 정해져 있어 마음이 편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들의 계획은 비윤리 그 자체이며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시청자들은 셋의 연대를 응원한다. 피해자들이 사회 시스템 대신 사적 복수를 택한 이유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은숙 작가의 고등학교 시절 무렵에만 해도,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자고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라는 속담이 유의미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나를 구해줄 이는 나 자신밖에 없다는 이른바 ‘각자도생’이 우리 사회에서 더 현실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드라마에서 표현된 학교폭력 외에도 제도를 통해 피해를 구제받지 못한 사례는 흔히 발견된다. 인기 여행 유튜버 ‘곽튜브’는 학교폭력 때문에 몇 년을 집 밖에 나가지 못한 채 생활한 경험을 고백했다. 학교를 넘어선 더 넓은 세상에서도 비슷한 일은 반복된다. 텔레비전을 틀면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고도 손쉽게 처벌을 피하는 권력자와 재벌가의 뉴스를 자주 접하게 된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이 거꾸로 더 큰 상처를 받는 상황을 쉽게 마주한다. 사회적으로는 민주화가 상당히 진행됐다고 하지만 법과 제도가 개인을 보호하리라는 기대는 반복해서 외면당해왔다. 이러한 경험들은 대중이 자연스럽게 제도를 냉소하게 했다. 그래서 대중은 미디어에서라도 복수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몇 년 전부터 쏟아진 복수극 웹툰, 드라마, 영화 등이 이러한 경향을 입증한다.

2023년 2월 17일 첫 방송을 앞둔 SBS 드라마 '모범택시2' 포스터. 출처 스튜디오S
2023년 2월 17일 첫 방송을 앞둔 SBS 드라마 '모범택시2' 포스터. 출처 스튜디오S

복수심은 억울함이 풀리지 않았을 때 올라온다

2021년 4월 방영한 SBS 드라마 <모범택시>가 다가오는 17일 시즌2 공개를 앞두고 있다. <모범택시>는 사회의 수많은 사각지대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을 위해 복수를 대신해주는 택시회사 사람들과 그 주변에 얽힌 사건들을 다룬 드라마다. 시청률 16%를 기록했으며 매회 방송이 끝나면 온라인 커뮤니티를 들썩이게 했던 화제작이다. 20년 전 2003년,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휩쓸고 ‘지나치게 완벽한 영화’라는 평을 받았던 영화 <올드보이> 역시 처절한 복수극이다. 당시 관객은 이우진의 15년에 걸친 복수를 보며 열광하지 않았다. 오히려 복수를 당하는 오대수를 불쌍하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시청자는 택시 기사 김도기의 활약을 보며 짜릿해하고 동은과 현남, 여정이 가해자를 철저히 단죄하길 바란다. 약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약자를 보호하고 가해자에게 올바른 처벌을 내리던 시스템이 점점 제 기능을 잃어가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월호 참사와 10·29 이태원 참사가 그랬고, 학교와 직장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창구가 부재하다는 걸 느낀 모든 피해자가 그랬을 것이다.

<더 글로리> 흥행에는 여러 요인이 존재한다. 배우들의 호연, 자극적이어서 흥미로운 장면들, 김은숙표 ‘말맛’ 좋은 대사들, 그리고 동은의 복수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까지. 나 역시 동은의 복수가 성공하길 간절히 바란다. 17년 동안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길, ‘행복했나 보죠’라는 말 대신 직접 행복하다고 말하는 일상을 살게 되길. 그 전에 피해자가 복수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지 않아도 되는 사회이길 바란다. 사적 복수가 아닌 시스템의 도움으로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사회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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