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 영화 '다음 소희'

*영화의 내용이 일부 들어 있습니다. 관람 예정이신 분들은 이 점을 참고 바랍니다.

<다음 소희>는 실화인 2017년 있었던 전주 콜센터 현장 실습생 자살사건을 소재로 만들었다.

‘전주 콜센터 현장 실습생 자살’ 같은 사건은 보통 뉴스로 먼저 만나게 된다. 뉴스로 다루어지는 사실을 영화로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는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더 생생하게 보여주고 극적으로 구성된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주인공의 이야기에 몰입과 공감을 하며 우리는 동시대성을 경험한다. 그런 동시대성은 인간과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예술의 본원적 기능을 수행하면서 그런 물음이 제기되는 곳이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불편할 정도로 사실을 담담하게 담아내다

영화는 크게 2부로 나뉜다. 1부는 소희(김시은)가 콜센터로 실습을 나가서 어떤 일을 겪는지, 그래서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부분까지를 담았고 2부에는 소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따져 물으며 사건을 되짚어가는 형사 유진(배두나)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영화의 구성은 감독의 의도가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다. 보통 서스펜스나 추리 영화의 구성은 사건을 파헤치는 형사의 이야기와 사건의 전말이 교차된다. 결말이 드러나 있는 상태에서 제시된 증거를 따라가며 사건의 배경이나 맥락을 찾아가는 방식이다. 그것이 더 재미있고, 몰입하기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상영시간 138분을 딱 절반으로 나누었다. 1부를 통해서 관객은 소희가 어떤 아이인지, 그리고 어떤 사건을 겪으며 변화하는지 쉼 없이 지켜본다. 춤추는 것을 좋아해서 자꾸 넘어지고 실패해도 계속해서 일어나 연습할 만큼 끈기 있고, 온라인 방송 BJ를 하는 친구 준희를 보고 희롱하는 남성에게 거침없이 욕을 퍼부을 만큼 당차고 정의로운 사람. 초반부에 그려진 소희의 모습은 그랬다. 하지만 1부에서 관객들은 그의 당당한 모습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스러져가는지를 빠짐없이 지켜보게 된다.

'계약 해지 방어 팀'에서 근무하게 된 소희. 다음 소희 예고편 갈무리
'계약 해지 방어 팀'에서 근무하게 된 소희. 다음 소희 예고편 갈무리

“야, 이 xx야! 몇 번을 말해! 그냥 해지해달라고!”

계약 해지를 원하는 고객에게 해지를 하지 않게 유도하고 다른 결합 상품까지 판매해야하는 ‘계약 해지 방어 팀’에 들어간 소희. 고객의 해지를 막는 것이 방어 팀의 임무인 이상, 해지를 막기 위해 고객의 전화를 계속해서 다른 쪽으로 돌리거나 열 두 번이 넘도록 해지 철회를 권유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고객이 쏟아내는 화풀이와 욕설을 감당하는 것도 방어 팀이 맡아야하는 일이다. 자신의 아이가 죽어서 해지를 원한다고 울먹이며 이야기하는 고객에게조차 대응 매뉴얼대로 해지 철회를 권할 수밖에 없고, 대단한 상품이 뭔지 만나서 한 번 보자고 성희롱을 하는 고객의 역겨운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 거기에 일주일 단위로 실적을 집계해서 더 나은 성과를 요구하고 팀원들 개개인의 콜수와 방어율을 일상적으로 비교하는 회사의 내부경쟁 시스템을 매일같이 경험하게 된다. 콜 수와 방어율에 따라 매겨진 순위와 그 순위에 따라 서로 다르게 지급된 급여가 회사 한 쪽 벽에 크게 붙어있다. 급여는 인센티브로 달라지고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인센티브를 얻을 수 있다.

전공이 애완동물학과인 소희가 전공과 전혀 관련 없는 콜센터로 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정주리 감독은 이 질문을 시작으로 사건을 찾아보면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정주리 감독은 “최대한 사실적인 것들로 채우면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타협 없이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영화의 구성도 현실처럼 시간의 흐름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서스펜스나 스릴러 영화의 구성처럼 결말과 추리 과정을 교차하며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대로 길게 이어지는 구성은 마치 소희의 죽음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이기 때문에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정상을 비정상으로 만들고, 약자의 연대를 방해한다

소희의 죽음에 앞서 팀장이었던 이준호가 죽는다. 실습생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지 않는 내부 규칙에 문제를 제기하고 정량적 성과에 기초한 차등 경쟁시스템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투서를 올렸던 팀장, 하지만 회사에서는 이를 무시한다. 결국 이 팀장은 자신의 차에서 유서와 함께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는데, 그가 남긴 유서에는 소희 같은 실습생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멈출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회사에 요구한 이준호 팀장이지만, 그의 죽음 후에 회사는 그가 돈과 여자를 밝히는 파렴치한 사람이었다는 소문으로 그의 명예를 실추시킨다. 이준호 팀장 아내에게는 유서 내용이 사실이더라도 팀장 역시 관리자이기에 같은 가해자라고 말한다.

소희는 팀장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꼈다. 이 팀장의 죽음에 대해 발설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에 서명을 강요하는 회사에 저항했지만 새로 온 팀장과 회사 관리팀의 종용에 굴복하게 된다. 사람이 죽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일을 재개하고 그의 죽음을 함구하라는 회사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생각에 회사가 원하는 성과를 내기로 결심한다. 결국 소희가 속한 센터가 전체 1등의 성과를 내고 소희는 센터 안에서도 첫 번째로 높은 콜수와 방어율을 기록한다. 하지만 당연히 들어와야 할 인센티브는 소희가 실습생이라는 이유로 지급이 미뤄진다.

성과를 내놓으라는 회사의 요구에 따르는 것도 소희의 어려움을 덜지는 못한 것이다. 회사 동료 정인은 소희가 너무 열심히 일한 탓에 목표 콜 수가 늘어나 주변 동료가 힘들어졌다고 말한다. 인센티브를 지급 하지 않은 것도, 목표 콜 수로 경쟁하게 만든 것도 회사의 윗사람들이 만든 시스템 때문이지만, 분노는 시스템 안에 있는 서로에게 향한다. 정인과 소희가 치고 받으며 싸우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무한경쟁시스템에서 매우 손쉽게 그 안에 속한 경쟁자들의 분노가 서로를 향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일 자체도 힘들고, 열심히 일 해도 보상이 없다. 오히려 적이 늘어난다. 소희는 어떻게 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나름의 저항으로 계약해지 방어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고 고객의 해지를 계속 처리해준다. 팀 실적이 떨어지는 것을 팀장이 그냥 보고만 있지 않는다. 팀장의 경고에 반발하며 소희는 그동안 겪어왔던 부당함을 호소하지만, 그런 소희에게 팀장은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라 더럽게 돈을 밝힌다며 모욕을 준다. 결국 소희는 폭발해 팀장을 밀치고 징계로 무급 휴가 3일을 받게 된다.

인센티브 사회에 고립되는 인간, 계속 되는 다음 소희

회사에 크게 자리한 실적 점수판. 다음 소희 예고편 갈무리
회사에 크게 자리한 실적 점수판. 다음 소희 예고편 갈무리

벽에 붙어 있는 실적, 등수에 따른 차등 대우는 소희만 겪는 현실이 아니다. 영화는 2부에서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형사인 유진은 소희의 죽음이 누구의 책임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다니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들은 것은 ‘인센티브’에 관한 것이었다. 회사 간부들은 실습생들에게 인센티브를 최대한 지급하지 않아야만 본인의 인센티브를 받고, 실습생을 보내는 학교에서는 취업률에 따라 교육청에서 내려오는 인센티브가 달라서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을 현장으로 보낸다고 말한다. 심지어 지방 교육청 장학사도 인센티브를 말한다. 정량적 수치에 따라 줄을 세우고 값을 매기고 있는 것을 영화는 이 인센티브라는 단어와, 각 기관의 한쪽 벽면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정량적 수치에 따른 등수로 표현한다. 모든 사람들이 이 인센티브와 줄 세우기에 참가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취업 현장실습을 제대로 보내는지 관리 감독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 지방 장학사는 자신이 무슨 힘이 있는지를 되묻는다.

“형사님, 적당히 하십시다. 그래서요? 이제 교육부 가실랍니까? 그 다음은요?“

‘시스템이 이 모양인데, 일개 장학사 개인이 뭘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우리는 다시 영화 제목을 떠올릴 수 있다. ‘다음 소희’, 이익의 먹이사슬처럼 이어진 경쟁 시스템 속 소희는 언제든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요트 바닥에 붙은 조개, 따개비를 제거하다 사망하고,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고치다가,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가, 자동차 하청업체에서 일하다가, 생수 공장에서 일하다가 스러진 어린 영혼들을 목도했다. 경쟁을 통해 이익을 획득하고자 하는 이기적 동기에 의한 희생, 우리는 그것을 착취라고 부르지만 영화는 동시에 우리 모두가 이 시스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인센티브 관계의 차가움

소희의 죽음에 대해 회사 간부는 말한다. “우리도 피해자입니다, 기업 이미지도 손실되고 아주 피해가 커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이 대사는 실제 있었던 말을 감독이 취재를 통해 녹여낸 것이다. 최소의 투입으로 최대의 성과를 내고자 하는 회사가 보기에 실습생은 그런 목적을 달성하는 데 손쉽게 써먹을 수 있는 도구 정도였던 건 아닐까. ‘현장실습’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도 학생도 아닌 모호한 위치에 있는 학생들을 싼값에 언제든 대체해서 쓸 수 있는 좋은 소모품으로 여긴 회사 사람들은 유진의 물음에 되레 본인들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회사가 피해를 입었다고 이야기하는 간부. 다음 소희 예고편 갈무리
회사가 피해를 입었다고 이야기하는 간부. 다음 소희 예고편 갈무리

이런 회사로 학생을 보낸 학교 측의 입장도 비슷하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지 아냐고 울먹이며 묻는 소희의 질문에 담임 선생님은 소희를 믿는다며 다시 회사로 가라고 채근한다. 실습생이 파견된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회사에 적응을 잘 하는지 등을 확인하는 서류의 문항에 모두 ‘좋음’을 대충 체크해서 넘기는 담임 선생님. 소희가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에서라기보다 학교로서는 취업률을 높이는 것이 우선이고 소희는 그런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해야만 한다는 냉정한 판단에서 나온 행동이다.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로 돌아온 실습생에게 학교는 빨간 명찰을 달거나 빨간 조끼를 입히고 봉사활동을 시킨다. 학생의 안전보다 취업률을 높이는 것이 우선인 비정함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소희의 단짝 친구 준희 역시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야 회사를 떠날 수 있었다.

소희의 좌절과 관련이 있거나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 사람들은 형사 유진의 질문에 모두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인센티브로 연결된 사람들은 차가운 어조로 오히려 소희가 문제였다고 이야기한다. 반대로 소희의 죽음과 무관함에도 자신들을 탓하는 이들이 있다. 소희의 친구들이다. 이들은 인센티브로 연결된 관계 바깥의 사람들이다. 준희가 집을 정리하지 않고 술을 너무 마셔 급성 알콜 중독으로 쓰러져 있는 장면은 소희의 죽음이 준희의 마음에 던진 파장을 암시한다. 유진이 준희를 데려다 주며 소희의 죽음이 그날 준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자 준희는 그 동안의 쌓아온 죄책감과 미안함의 눈물을 펑펑 흘린다. 공장에서 일 하며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에 소희를 만나던 친구 동호 역시 소희의 발이 너무 추워보였다며 그날 택시를 태워 데려다주지 않은 자신을 자책한다.

다 함께 알아야만 하고 함께 바꿔야만 하는 현실

차갑게 식은 소희의 시신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에게 유진은 묻는다.

“어머니, 소희가 춤을 좋아한대요, 아셨어요?”

“처음 들어요...몰랐어요, 까맣게 몰랐어요.”

부모님도 몰랐던 딸의 힘겨움, 무관심했고 무지했던 스스로를 자책하는 부모님. 어쩌면 이 부분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진작 알아야만 하는 우리의 현실, 알면서도 계속 모르는 척, 괜찮겠지, 잘 버텨야만 하는 거지, 사회생활이 다 그런 것이라며 지나쳐 왔을 수많은 시간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소희의 발에 드리우는 햇빛. 다음 소희 예고편 갈무리
소희의 발에 드리우는 햇빛. 다음 소희 예고편 갈무리

시스템이 이러니까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영화의 결론이 아닐 것이다. 슬리퍼를 신은 소희의 발에 따스한 빛이 드리워진다. 추운 발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어른이 아무도 없었던 시간을 보여준다. 소희의 죽음을 파헤치던 유진의 발에도 똑같이 햇빛이 드리운다. 소희가 살아 있을 때 이 햇살은 소희를 따뜻하게 하는 유일한 빛이었지만, 소희가 죽은 뒤에 그 빛은 소희의 이야기를 늦었지만 들어주려는 유진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더는 차갑게 얼어버리지 않도록, 따뜻한 빛이 되는 어른이 필요하다는 것을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전달한다.

소희의 남자친구인 태준을 만난 유진, 태준은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자신이 욱해서 일을 저질렀고 그 때문에 공장을 떠나 택배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곧 다시 공장으로 복귀 한다는 태준에게 유진은 힘들 때 누구에게라도 이야기 하라고 한다. 자신에게라도 말해도 좋다며 위로를 건네는 유진을 향해 태준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감사하다고 말한다. 아마 소희가 살아 있을 때 이 위로를 들었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회사가 실습생을 학생으로 여겨 실적경쟁에 내몰지 않았다면, 학교가 학생들을 보호해야할 제자로 여겨 회사에 적응하지 못해도 괜찮다며 받아줬다면, 교육청이 학교를 교육기관으로 여겨 취업률로 압박하지 않았다면, 노동청이 아직 미성년인 실습생을 일터에서 지켜줄 대상으로 여겼다면. 이 많은 가정들 중 하나만 실현되었더라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휴대폰 영상 속에 남은 소희가 아닌 현실에서 즐겁게 춤추는 소희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사람을 도구화하지 않는 시선과 인센티브의 먹이사슬 바깥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 희망의 시작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하루하루 치열한 경쟁을 헤치고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현실에서 너무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질지라도, 사람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받아주는 것만이 결국 사람을 살리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그 희박하고 작은 가능성을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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