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윤리] 불필요한 인종 구별 보도 신중해야

지난 9월 미국 델라웨어주 월밍턴에서 한 남성이 보석가게를 운영하던 60대 한인 남성을 폭행하고 보석을 훔쳐 달아난 강도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보도한 현지 언론을 뒤따라 국내 방송사와 신문사도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그런데 현지 언론의 기사를 옮기는 과정에서 원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한 단어가 일제히 붙었다. 바로 ‘흑인’이다.

“보석가게 한인 주인, 흑인 폭행에 뇌출혈…증오범죄 가능성”. JTBC의 기사 제목으로 범인이 흑인임을 명시하고 있다. JTBC <뉴스룸> 앵커와 기자는 이 사건을 보도하며 가해자를 ‘검은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한 흑인 남성’이라고 묘사했다. JTBC는 자사 소셜미디어 계정에도 기사의 요약본을 올렸는데, 해당 게시물의 제목 또한 “목 조르고 짓밟고··흑인 폭행에 뇌출혈”로 범인의 인종을 거듭 강조했다.

‘흑인=범죄’? 유독 범죄자의 ‘피부색’ 강조하는 국내 언론

JTBC의 기사 제목을 보면 마치 범인이 흑인인 것과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 간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듯 느껴진다. 그러나 막상 기사 내용에는 둘 사이의 연관성이 전혀 설명되어 있지 않았다. 범인의 인종을 밝힌 이유에 대한 설명 없이 단순히 그가 흑인이라는 정보만 전달한 것이다.

다른 언론사들 또한 JTBC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흑인 손님, 총 꺼내 ‘퍽퍽’…美한인 보석상 습격”, “손님인 척 들어와…美 보석상 운영 60대 한인, 흑인 습격에 뇌출혈”, “‘손님인 척’하던 흑인…권총으로 60대 한인 무자비 폭행” 등 많은 언론이 기사 제목과 본문에 범인의 피부색을 거듭 언급했다.

국내 언론은 지난 9월 미국에서 한인 남성을 상대로 일어난 폭행 범죄를 보도하며 범인이 흑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네이버 갈무리.
국내 언론은 지난 9월 미국에서 한인 남성을 상대로 일어난 폭행 범죄를 보도하며 범인이 흑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네이버 갈무리.

그렇다면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미국 언론은 어떨까. <ABC 뉴스>는 “잔혹한 무장 강도 사건에서 공격당한 월밍턴 보석 가게 주인(Wilmington jewelry store owner attacked in brutal armed robbery)”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CBS>와 <뉴욕포스트>의 제목은 “무장 강도 사건으로 피투성이 되고 멍든 월밍턴 보석 가게 주인(Wilmington jewelry store owner bloodied, bruised in armed robbery)”, “68세 가게 주인이 끔찍했던 20분 동안의 공격에서 권총으로 맞고, 망치로 가격당했다(Store owner, 68, pistol-whipped, hit with hammer in sickening 20-minute attack)”였다. 범인이 흑인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무장한 강도였다는 점에 초점을 둔 것이다. 또 미국 언론들은 범인이 ‘검은 옷과 검은 마스크를 착용한 남성’이었다고 인상착의를 위주로 묘사했으며 CBS의 경우 범인의 이름만 밝혔다.

해당 사건이 범인이 흑인이기 때문에 일어난 범죄라고 볼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데도 국내 언론은 불필요하게 피부색을 동원해 범인을 묘사했다. 한국 언론에 내재된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적 시선이 드러난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반복되는 인종 강조 보도  

국내 언론이 외국인의 범죄 사실을 보도하며 용의자나 범인의 인종을 표기하는 것은 이전부터 반복되어온 문제다. 한 예로, 지난 1월 <뉴욕타임스>등 미국 언론은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퀘어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한 남성이 여성을 선로에 떠밀어 숨지게 한 사건을 보도했다. 국내 주요 언론들도 미국 언론이 보도한 내용을 받아썼는데, 역시나 기사에 가해자의 인종을 강조했다. “美 뉴욕, 지하철역서 아시아 여성 사망…흑인에 떠밀려 추락”(KBS), “뉴욕 지하철서 아시아계 여성, 흑인이 선로로 밀쳐 추락해 사망”(동아일보), “아시아 사람 죽게 하고 혀 내밀며 조롱한 흑인, 美 또 아시아 증오 범죄”(파이낸셜 뉴스) 등이 국내 언론의 기사 제목이었다. 또 기사의 부제와 본문에는 가해자가 아이티 출신이라는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반면 국내 언론이 인용한 미국 매체들은 기사의 제목은 물론 본문에도 가해자의 인종을 드러내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뉴욕경찰이 기차 앞으로 떠밀린 여성의 죽음과 관련해 체포를 실시했다(NYPD make arrest in connection to the death of a woman who was pushed in front of a train)”(CNN), “여성이 타임스퀘어에서 지하철 선로에 떠밀려 사망했다(Woman Dies After Being Pushed Onto Subway Tracks in Times Square)”(뉴욕타임스) 등 사건에 대한 건조한 묘사만 제목에 담았다.

뉴욕포스트(좌)와 파이낸셜 뉴스(우)가 기사에 사용한 사진 설명 문구. 뉴욕포스트의 원문과 달리 파이낸셜 뉴스는 범인이 흑인임을 언급하고 있다. 출처 뉴욕포스트·파이낸셜 뉴스.
뉴욕포스트(좌)와 파이낸셜 뉴스(우)가 기사에 사용한 사진 설명 문구. 뉴욕포스트의 원문과 달리 파이낸셜 뉴스는 범인이 흑인임을 언급하고 있다. 출처 뉴욕포스트·파이낸셜 뉴스.

또 해당 사건을 인종차별 범죄라고 보도한 다수의 국내 언론들과는 달리 동양인에 대한 혐오범죄라고 단정 짓지도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해당 사건이 동양인 혐오범죄에 대한 논의를 다시 촉발했다면서도, 피해자가 그녀의 인종 때문에 범죄 대상이 됐다는 뚜렷한 근거는 없다고 전했다. 뉴욕 경찰 당국에 따르면 가해자는 피해자를 선로로 밀기 전 다른 여성에게도 같은 범행을 가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그 여성은 동양인이 아니었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노숙자로 추정되는 가해자는 정신질환 병력이 있으며 이전에도 세 차례의 체포와 2년간의 수감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이 사건이 뉴욕 지하철에 방치된 노숙인 문제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며 사건의 맥락을 충분히 설명했다. 지난 2년간 팬데믹으로 인해 공동화된 뉴욕의 지하철은 보호시설에 입소하지 못해 떠돌던 노숙인들이 찾아오는 장소가 되었고, 특히 이들 중에는 정신질환자나 마약 중독자가 많아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뉴욕시의 부실한 정신질환자 지원 제도와 고질적인 보호시설 부족 문제를 지적하며 기사를 마무리 지었다.

다만 일부 미국 언론들은 기사 제목에 피해자가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아시아인 여성이 타임스퀘어 역에서 달려오는 기차 앞으로 떠밀려 사망했다(Asian Woman Pushed to Her Death in Front of Oncoming Train at Times Square Station)”(NBC), “정신 이상자 남성이 타임스퀘어 지하철역에서 아시아인 여성을 밀어 사망하게 했다(Deranged man pushes Asian woman to death at Times Square subway station)”(뉴욕포스트) 등이다.

이 경우도 결과적으로 혐오범죄라고 판명 되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피해자가 아시아인이라는 사실을 제목에 밝힐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해당 사건 보도에서 피해자가 동양인이라는 정보는 혐오범죄에 관한 논란과 함께 설명될 때에야 충분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가 비교적 소수이며 비주류 집단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맥락 없이 피해자의 인종적 배경을 언급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독자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보도에 더 신중을 기울였어야 한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인종 보도 시 판단 기준은 ‘개연성’

합리적 이유 없이 누군가를 인종이나 민족적 특성만으로 구분 짓는 것은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해당 집단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낙인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언론이 특정 단어나 표현을 사용함에 있어 그것이 어떠한 사회적 영향을 불러올지 더 깊게 고민하고 판단해야 하는 이유다.  

독일 등 해외 언론은 이런 문제의 민감성을 인식하여 관련 보도 기준을 엄격하게 세워두고 있다. 독일언론협회는 1973년 제정한 보도준칙에서 “범죄 사건을 보도할 때 용의자의 종교나 인종, 또는 다른 소수자적 신분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정보가 독자의 이해를 위해 꼭 필요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특정인의 출신 배경이나 인종을 부각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그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은 언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차별적 표현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기자협회가 2011년 제정한 인권보도준칙은 언론이 이주민과 외국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증진하기 위한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인권보도준칙 총강은 “언론은 고정관념이나 사회적 편견 등에 의한 인권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용어 선택과 표현에 주의를 기울인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제5장 ‘이주민과 외국인 인권’에는 “언론은 이주민에 대해 희박한 근거나 부정확한 추측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조장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고 나와 있다.

국내 취재보도 가이드는 언론이 사회적 편견을 일으킬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재가공 김은송
국내 취재보도 가이드는 언론이 사회적 편견을 일으킬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재가공 김은송

방송도 마찬가지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은 “방송은 지역간, 세대간, 계층간, 인종간, 종교간 차별·편견·갈등을 조장하여서는 아니 된다”, “방송은 인류 보편적 가치와 인류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여 특정 인종, 민족, 국가 등에 관한 편견을 조장하여서는 아니 되며, 특히 타민족이나 타문화 등을 모독하거나 조롱하는 내용을 다루어서는 아니 된다”고 윤리적인 보도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언론들은 이러한 가이드라인의 존재가 무색하게 한 ‘사람’을 ‘인종’으로 치환하는 보도를 남발해왔다. 물론 외국인이 연루되거나 외국에서 일어난 범죄 사건을 보도할 때 해당 사건과 관련된 이들에 대한 정보를 밝히는 것은 사실 전달 측면에서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해당 범죄가 특정인의 인종이나 피부색 때문에 벌어진 것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기사에 그러한 정보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차별적 표현 없애려면 언론부터 자성해야

지난해 4월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 SCMP)는 이런 국내 언론의 무딘 인종차별 감수성을 비판했다. 한국 언론들이 동양계 미국인들을 상대로 한 폭행 범죄 사건을 보도할 때 미국 언론과는 달리 용의자의 인종을 기사 본문과 심지어는 제목에도 강조한다는 것이다.

스탠퍼드대 신기욱 사회학과 교수는 SCMP와의 인터뷰에서 “인종은 나라마다 다른 의미와 권력을 나타낸다.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의 길고 논쟁적인 역사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인종을 언급하는 것이 더 예민하게 받아들여지고 용인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한국 언론이) 인종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한국인들이 특정 소수자 집단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도 “이와 같은 정보가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나 히스패닉계 같은 소수자 그룹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강화할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고 말했다.

UC버클리대 인종학과 일레인 김 교수도 “미국 언론들도 과거에는 범죄 용의자의 인종을 과도하게 강조하곤 했지만, 이제는 인종을 보도하지 않는 관행이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4월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국내 언론의 혐오범죄 보도가 용의자의 인종을 과도하게 강조한다고 비판했다. 출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지난해 4월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국내 언론의 혐오범죄 보도가 용의자의 인종을 과도하게 강조한다고 비판했다. 출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신 교수의 말처럼 인종과 같은 개인정보는 사회적 분위기나 문화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국내 언론이 특정 집단을 차별하려는 의도로 위 사례들과 같은 문제적 보도를 반복한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우리 사회의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사용하는 표현에 특별히 신중히 기해야 한다. 언론의 사소한 무감함이 또 다른 갈등을 부르고, 무고한 피해자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편견과 차별은 쉽게 증폭되고 대물림된다. 언론이 선입견을 퍼뜨리는 매개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언론인들 스스로 차별적 표현에 대한 높은 감수성을 갖추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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