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충북 호스피스 활동가 홍기만 목사 인터뷰

1층. 2층. 3층. 그리고 F층. 한국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에는 4층이 F층으로 표기된 곳이 많다. 숫자 4가 ‘죽을 사(死)’ 자와 발음이 같아 죽음을 연상시키는 불길한 말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23일 단비뉴스는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충주의료원에서 홍기만 목사를 만났다. 이강원 기자
지난 10월 23일 단비뉴스는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충주의료원에서 홍기만 목사를 만났다. 이강원 기자

“죽음을 경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보여주죠.” 지난 10월 23일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충주의료원에서 만난 충북 호스피스 협회 지회장 홍기만(66) 목사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죽음을 앞둔 이들의 존엄한 삶을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죽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관련된 의료 서비스나 사회적 기반을 만드는 것에 소홀해진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충분한 돌봄을 제공할 수 없게 된다.

홍 목사는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죽음 경시 풍조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죽음을 앞둔 환자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활동을 말한다. 의사, 간호사, 종교인,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팀이 환자를 돌본다. 이들은 의학으로 몸의 고통을 줄이고 신학과 심리학으로 마음의 고통을 덜어낸다.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역사

호스피스라는 말은 라틴어 ‘호스피탈리스'(Hospitals)와 ‘호스피티움'(Hospitium)에서 유래했다. 모두 주인과 손님 사이의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는 장소를 뜻한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순례자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교회는 순례자가 질병으로 순례길을 떠날 수 없는 경우가 생기면 돌봄을 제공했다.

영국의 의료인이자 사회복지사였던 시슬리 손더스가 이 문화를 호스피스 완화의료로 발전시켰다. 순례자가 머물던 교회는 임종을 앞둔 사람들의 고통을 돌보는 시설로 변화했다. 1967년 손더스는 런던에 세계 최초의 호스피스 시설인 성 크리스토퍼 호스피스를 건립했다.

한국에는 종주국 영국보다 이른 1965년에 비공식 호스피스 시설이 생겼다. 한국에 진출한 호주의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이 강릉에 세운 갈바리의원이다. 의료인이었던 수녀 4명을 포함한 22명의 직원이 가정을 방문하며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보살폈다. 그러나 열악한 국가 경제와 한국전쟁의 여파로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한국 사회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호스피스 보급 움직임이 생겼다. 1981년 가톨릭의과대학 성모병원 내과의였던 이경식 교수는 가톨릭대 학생들, 성모병원 의료인들, 수녀들과 함께 호스피스 연구모임을 만들었다. 이 연구모임 결성을 계기로 한국에 호스피스 보급 노력이 활발해졌다. 몇 년이 지나 이러한 노력이 열매를 맺었다. 1988년 서울성모병원에 한국 최초로 14개의 병상을 갖춘 호스피스 병동이 설립됐다. 이를 계기로 1990년대 초부터는 종교단체들이 활발하게 호스피스 활동에 참여했다.

홍기만 목사가 자신의 활동을 설명하며 웃음 짓고 있다. 이강원 기자
홍기만 목사가 자신의 활동을 설명하며 웃음 짓고 있다. 이강원 기자

홍기만 목사도 이 시기에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96년 충청북도 증평군의 한 교회의 목사로 부임했다. “가장 낮은 사람이 누구일지 생각했어요. 장애인, 빈자 등 여러 사람이 떠올랐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이 가장 낮은 곳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증평에 자리 잡은 홍 목사는 죽음을 앞둔 이들을 간호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경험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홍 목사는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살았다. 어렸을 때 원인 모를 불치병에 걸렸다. 약방에서 받은 약은 오히려 건강을 악화시켰다. 몸이 아픈 와중에 부모님까지 돌아가셨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큰형 집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했다. 홍 목사가 죽는 것만 생각했다는 시기다.

20대 초반 홍 목사는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기도원에 들어갔다. 기도원 속 삶은 가혹했다. 밥은 부실하게 나왔다. 기도원 직원들로부터 학대도 받았다. 배고픔과 학대 속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종교를 믿게 됐다. 기도원에서 나온 뒤 낮은 사람들 곁에 서는 목사의 길을 걸었다.

마음 돌보지 못하는 호스피스 법

증평군에 부임한 뒤 어느 신문에서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홍보하는 광고를 봤다. 그 길로 홍기만 목사는 서울성모병원에 찾아갔다. 호스피스를 알리는 활동을 시작했다.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국회의원을 만나는 등 호스피스에 대한 법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입법 활동을 시작했다.

노력이 결실을 보았다. 2015년 암관리법 시행규칙이 개정되면서 가정형, 자문형 호스피스에 대한 재정지원이 시작됐다. 2016년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에 관한 법률(이하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됐다. 기존에는 말기 암 환자만이 지원 대상이었다. 법 제정 뒤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 폐쇄성 호흡기질환, 만성 간경화를 앓고 있는 환자가 지원 대상에 추가됐다.

호스피스 인력 기준이다.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는 필수 인력으로 분류돼 있지만, 종교인과 상담사는 기준 제외돼 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시설은 인력 기준을 충족해야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호스피스완화의료서비스 제도개선 방안 연구" 문건 일부
호스피스 인력 기준이다.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는 필수 인력으로 분류돼 있지만, 종교인과 상담사는 기준 제외돼 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시설은 인력 기준을 충족해야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호스피스완화의료서비스 제도개선 방안 연구" 문건 일부

홍 목사는 법이 마음의 안정을 소홀히 다뤘다고 비판했다. 몸과 마음을 함께 돌보는 것이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핵심이다. 그러나 법은 의사, 전담 간호사, 사회복지사만을 두도록 규정했다. 마음의 안정을 돌볼 수 있는 종교인이나 심리상담사를 제외한 것이다. “법을 제정할 때 종교 갈등을 우려한 결과”라며 홍 목사는 규정을 고쳐서 종교인과 상담사를 포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광주대 사회복지학부 김창곤 교수는 종교 갈등을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논문 “한국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역사”에서 고려의 동서대비원(西大悲院)과 사찰이 오늘날 호스피스 시설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동서대비원과 사찰은 중세 유럽의 교회처럼 병자들을 위한 요양시설 기능을 수행했다. 1990년대에는 개신교 외에도 천주교, 불교, 원불교 등 각 종교 단체들이 말기 암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호스피스 시설을 설립했다. 환자를 돌보는 것은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가치였다.

더 열악한 지역 호스피스

활동가들의 노력과 정부 지원 확대로 호스피스 시설은 꾸준히 증가했다. 2008년 19개소였던 호스피스 기관은 2020년 107개소까지 증가했다. 입원형 호스피스 시설의 병상 수는 282개에서 1405개까지 늘었다.

그러나 호스피스 시설은 수도권에 편중됐다. 입원형 시설의 경우 수도권에는 39개 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반면 강원도, 충청남도, 충청북도는 각각 2개 시설만 운영되고 있다. 수도권보다 넓은 권역을 더 적은 기관이 담당하고 있다.

가정형과 자문형 시설은 더 열악하다. 가정형은 수도권에는 19개 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대구광역시를 제외한 지역은 1~2개의 시설이 담당하고 있다. 경상북도와 충청남도에는 시설이 없다. 광주광역시, 부산광역시, 강원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라북도, 경상북도에서는 자문형 시설을 운영하고 있지 않다. 수도권과 일부 지역 외에는 자문형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는 이용자의 만족도를 떨어뜨린다. 2020년 보건복지부 조사를 보면 신규 호스피스 이용자 3명 중 1명은 가정형 호스피스 시설을 선호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익숙한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수도권 외에는 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정형 서비스를 선택하기 어렵다. “정부 지원 대상이 아닌 민간 호스피스 센터들이 보완하고 있지만, 재정 여건과 인력 부족 때문에 이마저도 부족한 상황”이라고 홍 목사는 말했다.

홍기만 목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음악회를 열어서 시민들에게 호스피스를 알렸다. 교회를 다니며 자원봉사자들을 교육했다. 충주시장과 충청북도 도지사를 만나 호스피스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성과가 있었다. 충주 의료원에 있는 호스피스 병동이 증축 됐다. 그러나 인력이 부족했다. “지역에 오려는 의사가 없어요. 호스피스 전담 의사가 되려는 사람은 더욱 없고요.” 홍 목사는 의료보험 수가를 파격적으로 올리지 않으면 지역 호스피스는 계속 인력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죽음 존중 사회를 위해

홍기만 목사는 죽음을 대면하는 것을 기피하는 사회적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호스피스 완화의료 체계가 자리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몰고 다니는 차량 트렁크에는 항상 관이 하나 실려 있다. 직접 제작한 관이다. 홍 목사는 전국의 교회를 다니며 입관 체험식을 열었다. “입관 체험은 죽음과 좀 더 친해지는 연습입니다.” 죽음을 기피하는 인식을 깨뜨려야만 호스피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 홍 목사의 생각이다.

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11일 국회에서 열린 호스피스 포럼에 참석해서 연명의료결정법에 심리적 안정을 돕는 인력을 반드시 포함하는 조항을 만들 것을 요구했다. 지역 공무원들도 꾸준히 만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모여 연명의료결정법과 호스피스 병동 신설 등의 성과를 만들었다. 홍 목사는 “모두 기적”이라고 말했다.

홍기만 목사가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할 때 입는 가운의 모습이다. 홍 목사는 지금 충주의료원 소속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강원 기자
홍기만 목사가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할 때 입는 가운의 모습이다. 홍 목사는 지금 충주의료원 소속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강원 기자

“죽음 경시 풍조가 죽음 존중 문화로 바뀌고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합니다.”

아직 남은 과제가 많다. 죽음과 친숙해지기 위한 죽음 교육과 의료인력을 충원하기 위한 호스피스 수가 증액 등 한국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갈 길이 멀다. 26년 차 호스피스 활동가인 홍 목사는 이러한 문제를 계속 해결해나갈 생각이다. 죽음을 앞둔 모든 이들의 존엄한 삶을 지키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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