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임 칼럼]

“이 바이러스는 검은 백조가 아니었다. 회색코뿔소였다.”

제정임 원장
제정임 원장

경제사학자인 애덤 투즈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지난해 펴낸 책 <셧다운>에서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기존 데이터로 예측할 수 없는 돌발적 위험’을 뜻하는 검은 백조(블랙스완)가 아니라 ‘충분히 예견됐지만 무시된 위험’인 회색코뿔소(그레이라이노)였다는 얘기다. 바이러스 학자들은 ‘독감과 비슷하고 전염성이 강한’ 새 감염병이 출현할 것을 이미 예고했고, 동아시아 전역에 존재하는 박쥐 서식지를 발원지의 하나로 꼽았으며, 글로벌 운송과 여행 경로를 따라 빠르게 전파될 것을 경고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인류는 왜 코로나 팬데믹에 그토록 무력했을까. 2년 반 동안 80억 세계 인구 중 5억 3000여만 명이 확진되고 630여만 명이 숨지는 대참사가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경제와 의학·과학에서 세계 최고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3억 3000만 인구 중 8400만 명이 확진되고 무려 100만 명 이상이 숨진 비극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투즈 교수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표현을 빌려 ‘조직화한 무책임’(organized irresponsibility) 탓이라고 지적했다. 결정권자는 위험에 빠진 이들을 책임지지 않고,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은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개념이다.

투즈 교수는 ‘시장 경쟁’을 신봉하는 신자유주의 정책 속에서 서민과 빈곤층을 보호해야 할 미국의 보건 시스템과 사회안전망은 붕괴 직전으로 방치됐다고 꼬집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중국 편을 든다며 팬데믹 한복판에서 분담금 지급을 중단하고 탈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투즈 교수는 앞으로 기후위기가 본격화하면서 더 심각한 감염병 등 자연환경의 역풍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따라서 각국이 지속가능하고 회복력이 뛰어난 경제·사회 구조를 만드는 것, 예기치 못한 위기에 신속 대응할 수 있는 상시적 능력을 갖추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팬데믹 상황에서 더욱 심해진 불평등을 줄이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사회도 조직화한 무책임 탓에 앞날이 걱정스럽다. 인구 대비 사망자 비율(미국 0.3%, 한국 0.04%)로만 보면 ‘케이(K)-방역’은 성공한 편이지만, 경제적 불평등은 더 심해졌고 지역 의료격차 등 공공보건의 난제 해결은 한 발짝도 진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가 주도한 ‘2022 세계불평등보고서’를 보면 2021년 우리나라 연간 국민소득에서 상위 1%와 10%가 가져간 몫은 각각 14.7%와 46.5%로, 2016년의 12.2%, 43.3%에서 더 늘었다. 상위계층에 소득이 몰려 불평등이 더 심해졌다는 뜻이다. 방역을 위한 영업 제한 등으로 자영업자들이 타격을 받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실직과 수입 감소에 시달린 반면, 정보기술(IT) 등 비대면 업종과 부동산 호황 등으로 대기업·자산가들은 더 많이 번 것 등이 반영됐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정치권은 구조적 불평등을 줄일 증세와 복지 확충 등을 진전시키지 못했다. ‘비상시에 넘치는 곳에서 걷어 부족한 곳을 채울’ 재난연대세 도입 제안도 나왔으나 국회는 논의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영업제한 여파로 휴폐업하는 가게가 늘면서 상가 곳곳에 '임대' 공지가 붙었다. ⓒ 연합뉴스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영업제한 여파로 휴폐업하는 가게가 늘면서 상가 곳곳에 '임대' 공지가 붙었다. ⓒ 연합뉴스

심각한 지역 의료격차와 취약한 공공보건 인프라는 더 센 감염병이 닥쳤을 때 우리의 의료대응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아킬레스건이다. 예방의학자인 홍윤철 서울대 의대 교수는 <코로나 이후 생존 도시>에서 수도권에 인구 절반이 몰려 있고 지방엔 병상도, 의료 인력도 부족한 우리나라는 사실 감염병에 매우 취약한 구조라고 걱정했다. 그는 중앙화·대형화하는 도시의 발전 방향을 바꿔 인구 5만~30만 정도의 중소도시들이 각각 필수 의료 역량과 돌봄 시설, 분산 에너지 시스템, 교육 기반, 일자리 등을 갖춘 ‘자족형 스마트 건강도시’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감염병이 한 지역 내에서 차단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지역소멸’이 현실로 다가온 지금, 이런 구상은 국토균형발전 전략과 연결해 논의할 만하다.

시급한 것은 정부와 정치권이 조직화한 무책임을 벗어나는 일이다. ‘경제 불평등 완화’와 ‘지역 불균형 해소’를 더 이상 말로만 떠들지 않아야 한다. 책임지고 성과를 내야 한다. 또 다른 팬데믹이 닥치기 전에.

* 이 글은 <한겨레> 6월 7일 자에 실린 [제정임 칼럼]을 신문사의 허락 하에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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