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임 칼럼]

“최대 2만 달러의 학자금 빚을 없애드립니다.”

지난달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일정 소득 아래 대학생·대졸자 등록금 대출을 2800여만 원까지 탕감해주기로 하자, 찬반 논란에 불이 붙었다. 공화당은 대학에 못 간 노동자들과 성실하게 빚을 갚은 사람들을 역차별하는 정책이라고 공격했다. 빚 탕감으로 소비를 자극하면 인플레이션이 더 심해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전문가도 있다.

반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미국 경제규모 등을 고려할 때 빚 탕감이 물가를 자극할 가능성은 작다”며 이 정책을 옹호했다. 그는 “학자금대출을 쓴 사람들이 부채의 족쇄를 벗어나면 더 나은 일자리를 얻고 소득도 는다는 증거가 있다”며 “소득 상승은 세수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간 수천만 원의 등록금을 빚으로 막은 뒤 40~50대까지 상환 부담에 시달리는 수천만 중·저소득층을 돕는 일은 ‘국가적으로 좋은 정책’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대학 학자금 대출 탕감 계획을 밝혔다.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대학 학자금 대출 탕감 계획을 밝혔다. 연합뉴스

크루그먼은 특히 “미국에는 파산보호 절차가 있다”며 “도널드 트럼프(전 대통령) 소유 기업들은 여섯 차례나 이를 이용했고,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많은 사업주도 정부 대출을 쓴 뒤 탕감받았다”고 상기시켰다. 백악관도 학자금대출 탕감을 비난한 공화당 의원들이 사업주로서 거액의 정부 대출금 상환을 면제받았던 사례를 줄줄이 트위터에 올려 그들의 이중성을 꼬집었다.

미국의 학자금 탕감에 비하면 명함도 내밀기 어렵지만, 국내에서도 ‘청년특례채무조정’을 놓고 논란이 있었다. 이 제도는 34살 이하 저신용자에게 최대 50%까지 이자를 감면하고 상환 기간을 늘려주는 것이다. 원금 탕감도 아니고 이자를 줄여주는 정도인데도 ‘도덕적 해이’ 시비가 거셌다. 금융위원회가 ‘빚투(빚내서 투자) 청년 구제’를 언급한 탓이 컸다. 가상자산 등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본 청년까지 세금으로 도와주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지난해 신용회복위원회 ‘대학생 및 미취업청년 특별지원 프로그램’ 실적을 보면 청년 채무조정자의 주된 연체 사유는 생계비 증가와 실직, 근로소득 감소였다. 투자 실패는 0.8%에 그쳤다.

국내외에서 이렇게 부채조정이 부각되는 것은 금리가 올라 상환 압박이 커지는 환경과 관련이 있다. 미국이 물가안정을 위해 금리를 계속 올리니, 따라 올리지 않으면 원화 가치가 떨어지고 외국 자금도 빠져나가므로 한국은행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한국은 지난 6월 말 기준 가계부채가 1869조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4%로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 수준을 넘어섰다. 지난 1년여의 기준금리 인상만으로도 주택담보대출 이자 등이 크게 오르며 한계에 몰린 채무자가 늘었다.

팬데믹·전쟁의 파장과 금리상승 속에 가계부채 해법을 찾으려면 ‘횡재세’ 논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럽연합(EU)은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에너지 가격이 치솟으면서 막대한 수익을 내는 정유·가스·발전회사 등에 횡재세 부과를 추진 중이다. 각자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대다수가 고통받는데 누군가 그 덕에 ‘횡재’를 한다면 이익을 나눠야 한다는 논리다. 에너지기업들에서 1400억 유로(약 195조 원)를 걷어 가계·기업에 전기료·난방비 등을 보조한다는 구상이다. 영국과 이탈리아는 비슷한 내용의 횡재세를 이미 도입했고, 미국도 법안 발의를 논의 중이다. 

국내에서는 정유사 외에 은행을 포함한 횡재세 법안이 발의돼 있다. 지난 6월 기준 국내은행 예대금리차는 1년 전보다 0.28%포인트 커졌고, 올 상반기 이자 수익은 전년 동기보다 20% 가까이 늘었다. 기준금리 상승을 핑계로 은행들이 대출이자를 더 많이 올려 쉽게 돈을 번다는 지적이 있다. 반면 어려운 고객을 위해 이자 경감, 상환 유예 등 자발적 채무조정을 해주는 은행은 찾기 어렵다.

아티프 미안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등은 <빚으로 지은 집>에서 “채무자뿐 아니라 채권자도 손실을 분담해야 가계부채 급증에 따른 위기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은행은 기준금리 상승기에 대출이자 인상 최소화로 고통을 나누고, 채무조정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이를 회피한다면 다음 처방은 횡재세 부과 등 공적 개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이 글은 <한겨레> 9월 20일 자에 실린 [제정임 칼럼]을 신문사의 허락 하에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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