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임 칼럼]

“나는 가라앉는 배의 선장입니다. 가장 마지막에 탈출할 사람이죠.” 우크라이나 키이우 근교 격전지의 병원에서 부상자 후송과 의료장비 이동 등을 준비하던 발레리 주킨 원장이 비장하게 말했다. 밖에선 러시아 탱크부대의 진격에 대비해 우크라이나군이 도로 매복을 준비하는 상황. 주킨 박사와 마주 앉은 이는 영국 <BBC>의 제러미 보언 특파원이다. 언제 공습이 닥칠지, 언제 탱크가 밀고 들어올지 모르는 전장에서는 군인, 의사와 함께 취재기자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 

놀랍게도 우크라이나 현지에서는 보언 특파원과 같은 유럽·미국 기자들이 매일 격전지를 누비며 전쟁의 참상과 결연한 항전을 알리고 있다. 러시아군의 총에 맞거나 건물 폭격으로 숨진 기자들도 있다. 우크라이나 기자들도 소속 매체와 소셜미디어, 국외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필사적으로 전황을 알리고 있다. 이들의 목숨 건 활약 덕에 세계는 전쟁의 경과와 인도적 위기, 나라를 지키려는 지도자와 국민의 의지를 확인하며 난민 지원과 러시아 제재 등에 중지를 모으고 있다.

▲ 지난 3월 <AP> 사진기자가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에서 일어난 공습 현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 연합뉴스

러시아의 상황은 대조적이다. 2000년 집권한 뒤 비판언론을 철저히 억압해온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는 모두 ‘가짜 뉴스’라며 엄벌을 위협하고 있다. 전쟁 반대 시위대는 모조리 체포한다. 푸틴을 화나게 한 외국 특파원들은 이미 여럿 추방됐다. 국영언론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신나치를 타도하는 특별 군사작전’이라고 선전한다. 러시아 국영언론 <채널1>의 편집자 마리나 옵샨니코바는 지난 14일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의 선전선동을 위해 일하는 게 부끄럽다”며 뉴스 방송 중 기습시위를 벌였다. 그가 앵커 뒤에서 든 손팻말에는 “전쟁 반대, 그들은 지금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이 시위로 최대 15년형이 가능한 혐의를 적용받을 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누적된 언론탄압은 푸틴 자신의 눈과 귀를 가렸다. 푸틴은 ‘러시아군이 들어가면 우크라이나인들이 환영할 것이고, 수도 키이우를 금방 점령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전쟁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경제제재로 정권 안위까지 흔들리자 그는 연방보안국(FSB) 국외정보책임자를 구금하고 장성들을 해임하는 등 당황하는 모습이다. 집권자가 언론을 탄압하면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간신배들에게 둘러싸인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국내에서는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고 공영방송의 젊은 기자들 사이에서 ‘우리 이제 파업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나왔다고 한다. 국민의힘과 연속선상에 있는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비판적 보도에 앞장선 <MBC> ‘피디수첩’ 등을 탄압했던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공정보도를 위해 파업으로 맞섰던 언론인들은 해직당하거나, 프로그램을 뺏기거나, 부당 전보돼 암울한 세월을 보냈다. 집권층의 ‘낙하산’으로 온 경영진과 간부들은 시사프로그램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제거하기 위해 출연 제한 규정을 만들고 인기 진행자를 하차시키기도 했다.

이런 과거에 윤석열 당선자의 후보 시절 발언을 겹치면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 윤 당선자는 “(더불어민주당이) 강성 노조를 앞세워 갖은 못된 짓을 하는데 그 첨병 중의 첨병이 바로 언론노조”라며 “뜯어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대다수 기자·피디가 가입한 언론노조를 근거 없이 ‘타도 대상’으로 지목한 것이다. 배우자 김건희씨는 특정 언론을 향해 “(내가) 정권을 잡으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7시간 녹취록’을 보도한 문화방송과 <서울의 소리> 등은 고소·고발과 소송을 겪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종군기자들처럼, 목숨을 건 언론인은 역사의 퇴행을 막는다. 진실을 위해 ‘밥줄’을 포기한 언론인은 정의를 지킨다. 우리가 민주화를 이만큼 이루기까지 독재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한 기자 등 많은 언론인이 고문당하고, 감옥에 가고, 해직됐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언론인이 진실을 말하기 위해 목숨도 밥줄도 걸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새 대통령은 ‘언론탄압’이 아닌 ‘언론자유 존중’으로 가야 하며, 언론과 시민은 이를 압박해야 한다. 동시에 사익 추구와 왜곡 보도를 일삼는 매체들은 시장에서 도태되게 해야 한다. 언론이 ‘사실에 기반한 쓴소리’를 거침없이 할 수 있을 때 새 정부의 성공도 가능할 것이다.


* 이 글은 <한겨레> 3월 22일 자에 실린 [제정임 칼럼]을 신문사의 허락 하에 전재한 것입니다.

편집: 심미영 PD 

관련기사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