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임 칼럼]

제정임 원장

황토색 물이 지하철역 안으로 폭포처럼 쏟아진다. 전동차에 갇힌 승객들은 순식간에 가슴팍까지 물이 차오르자 겁에 질린 채 ‘살려 달라’고 외친다. 설상가상으로 전등이 꺼져 깜깜해지고, 환기장치도 멈춰 숨이 가빠온다. 물에 잠긴 사람들은 전동차 손잡이를 부여잡고 공포와 싸운다. 지난해 7월 20일 중국 허난성 정저우시 지하철 5호선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다. 시간당 200밀리미터(㎜)라는 기록적인 비가 쏟아진 이날, 퇴근시간대 전동차에 갇혔던 500여 명 중 최소 14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비가 내린 지난 8일 서울에서도 지하철 7호선 이수역 등 일부 역사에서 천장이 무너지고 물이 쏟아졌다. 다행히 인명피해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더 심한 비가 온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물음을 남겼다. 큰비가 와도 일을 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별안간 물에 갇히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서울 신림동 반지하 주택 일가족 참사에 가슴 아파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지하철 침수 가능성을 보고 ‘재난 피해가 내 일이 될지 모른다’고 느낀 이도 있을 것이다.

폭우가 내린 지난 8일, 서울 관악구 부근 한 빌라 반지하에 있던 일가족 3명이 결국 사망했다. 출처 연합뉴스
폭우가 내린 지난 8일, 서울 관악구 부근 한 빌라 반지하에 있던 일가족 3명이 집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사망했다. 연합뉴스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관한정부간협의체(IPCC) 등의 과학자들은 폭우, 태풍, 홍수, 폭염, 가뭄, 산불, 혹한 등의 기상재난이 갈수록 더 자주, 더 심하게 닥칠 것이라고 예고해왔다. 인간이 석유·석탄 등 화석연료를 남용해 지구가 더워지면서 기상 질서가 교란된 탓이라는 설명과 함께. 우리는 그 예고가 현실화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유럽은 ‘500년 만에 최악’이라는 폭염과 가뭄으로 심각한 물 부족을 겪고 있다. 미국은 서부지역 산불, 동부지역 홍수로 몸살을 앓는다. 중국은 유례없는 폭염과 가뭄, 폭우가 동시다발로 닥쳐 생산 차질이 늘고 있다. 곧 식량난과 공급망 위기 등 경제사회적 충격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한 재난, ‘더 센 놈’이 줄줄이 찾아올 것이라고 기후과학자들이 경고하고 있으니 섬뜩하기 짝이 없다.

2022년 8월 폭우는 그냥 집중호우가 아니라 기후위기의 신호탄이며 경고장이다. ‘반지하 주택을 없애겠다’ 정도로 대응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IPCC 등 국제기구가 촉구한 대로, 기후재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적응’(adaptation)과 기후변화 속도를 줄이는 ‘완화’(mitigation) 조처를 본격화해야 한다. 이미 배출된 온실가스 때문에 불가피해진 재난에 대비하면서 재생에너지 전환 등 탄소중립 달성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얘기다.

지하철역에 물막이판을 제대로 설치·운영하는 것, 반지하 세입자 등 주거취약층이 이사할 수 있도록 저렴한 공공임대주택이나 주거바우처를 제공하는 것, 배수로 확충과 맨홀 안전대책을 마련하는 것 등은 적응 조처의 예가 될 것이다. 폭우뿐 아니라 폭염, 가뭄, 산불, 혹한 등 다른 기상재난과 해수면 상승, 농작물 경작 환경 변화, 신종전염병 등에도 대책을 세워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기후변화 자체에 대응하는 완화 조처다. 온실가스 배출 주범 1등이 석탄발전인데, 아직도 국내외에서 석탄발전소를 짓고 있는 게 우리나라다. 삼척블루파워를 건설하는 포스코 등 대기업들이 여기에 가담하고 있다. ‘연료 수입이 필요 없는 자립에너지’이자 ‘탄소배출이 적은 청정에너지’인 태양광·풍력 등의 확충은 세계적 추세와 비교할 때 거북이걸음이다. 윤석열 정부는 ‘원전 부활’에 승부를 걸고 있으나 바닷물 혹은 강물을 써야 하는 원전이 해수면 상승과 폭염, 가뭄 등에 취약하다는 사실이 프랑스 원전의 가동중단 사태 등으로 확인되고 있다. 2022년 폭우는 정부·기업의 기후위기 대응 전략 재고를 요구한다.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핵발전 등을 우려하며 일찍이 <위험사회>를 출판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적 부메랑 효과 때문에 부자나 권력가들도 위험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기후재난의 피해가 처음엔 약자에게 쏠리지만 결국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경고다. 2022년 폭우는 반지하 거주자와 지하철 승객을 위협했지만, 다음 재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과 정치권 등 부자·권력자도 긴박한 대응에 나서야 ‘더 센 놈’의 공습에서 다 함께 살아남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한겨레> 8월 23일 자에 실린 [제정임 칼럼]을 신문사의 허락 하에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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