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걸스플래닛 999: 소녀대전'

“오디션 프로그램은 지양하려 한다. 음악에 더 집중된 콘텐츠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프로듀스 시리즈 조작사태로 인해 2019년 12월 28일에 열린 제 78차 방송심의소위원회 임시회의에서 <Mnet(엠넷)> 강지훈 운영전략팀장이 한 말이다.

2019년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X 101>의 파이널 경연 방송 이후,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프로듀스 X는 조작된 오디션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파이널 경연에 참여한 연습생 20명이 얻은 표에 일정한 규칙성을 찾을 수 있다는 의혹이었다. 연습생들의 득표율에다 적당한 상수를 곱하면 최종 득표수가 나온다는 이야기였다. 전작인 <프로듀스 48> 파이널 경연의 득표 역시 같은 원리로 일정한 규칙성을 보인다는 것이 네티즌들에 의해 밝혀졌다. 2019년 12월 3일 검찰은 프로듀스 시리즈 전 시즌에서 순위 조작 사실을 확인하고 안준영 PD와 김용범 CP를 업무방해와 사기 등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 안 PD는 기획사 관계자들로부터 2018년 1월부터 2019년 7월까지 47차례에 걸쳐 4683만원 상당의 향응을 제공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4년에 걸쳐 네 번의 시즌 동안 진행된 오디션 프로그램은 유료 문자 투표 결과를 조작해 제작진의 입맛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엠넷은 아이돌로 데뷔하기를 바라며 참가한 연습생을 응원하는 시청자들을 국민프로듀서라 칭하며, “당신의 소녀·소년에게 투표하세요”라 권했다. 경선의 조작으로 아이돌은 국민프로듀서가 만드는 게 아닌, 연습생 소속사와 방송사 PD가 유흥업소를 오가며 만들어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 <프로듀스 X 101> 파이널 경연 최종 득표수가 일정한 규칙성을 가져 투표 조작 의혹이 제기됐다. ⓒ <SBS>

"당신은 어느 소녀의 꿈을 지키시겠습니까"

2021년 1월 엠넷은 새로운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걸스플래닛 999: 소녀대전>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연습생들이 케이팝 아이돌이 되기 위해 도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첫 방송에서 배우 여진구는 자신을 걸스플래닛과 글로벌 시청자들을 연결해줄 안내자 '플래닛 마스터'라고 칭하고 나섰다. 그는 걸스플래닛에 참가한 소녀들의 꿈을 지켜줄 글로벌 팬들을 ‘플래닛 가디언’이라 부르며, “소녀들의 꿈이 현실이 되는 세계 걸스플래닛에서 당신은 누구의 꿈을 지키시겠습니까?”라고 시청자에게 물었다. 첫 방송을 본 사람들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의 요청은 과거 프로듀스 시리즈에서 국민프로듀서들의 대표가 국민프로듀서들에게 “당신의 소녀 소년에게 투표하세요”라 하던 것과 똑 닮았기 때문이었다. 방송 시작 전 엠넷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연습생들이 상자 속에 들어있는 물건을 보지 않고 만져서 맞추는 히든박스 콘텐츠를 공개했다. 과거 프로듀스 시리즈에서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첫 방송이 시작되기 전인 이때부터 <걸스플래닛 999>를 프로듀스 시즌 5가 아니냐며 조롱했다. ‘국민이 만드는 아이돌’이란 국민프로듀서 시스템을 도입하며, 2016년에 등장한 엠넷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시리즈는 대한민국 가요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국민의 관심이 컸던 만큼 성과도 놀라웠다. 당시 많은 보도에 따르면 프로듀스 시리즈로 데뷔한 아이오아이(I.O.I.)는 활동 10개월만에 약 100억 원의 매출을, 워너원(Wanna One)은 18개월의 활동기간 동안 누적 매출액 1000억 원을 기록했다. 아이오아이, 워너원, 아이즈원(IZ*ONE) 등의 성공은 연습생들에게 프로듀스 시리즈 데뷔조에 들면 성공적인 아이돌 삶이 보장된다는 꿈을 꾸게 했다.

▲ 프로듀스 101 시즌 2로 데뷔한 Wanna One은 18개월의 활동기간 누적 매출액이 약 1000억 원을 기록했다. ⓒ SWING ENTERTAINMENT

케이팝 아이돌 그룹의 활동 반경도 넓어졌다. 국내와 동아시아에 머물던 과거와 달리, 방탄소년단(BTS)을 필두로 다양한 그룹들이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케이팝 아이돌의 세계적인 성공은 고정적인 팬덤의 철저한 관리에서 나온다. 성공한 케이팝 아이돌은 기존 TV 채널에서 보기 어려워졌다. 이들은 실시간 라이브 방송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연예인과 일대일로 채팅을 주고받는 느낌을 주는 ‘디어 유 버블’ 등의 서비스를 통해 24시간 내내 팬덤과 소통한다. 국내 팬덤과 대중에게 함께 사랑받는 케이팝에서 글로벌 팬덤에게 사랑받는 케이팝으로 확장이 되었다. <걸스플래닛 999>도 이 점을 노렸을 것이다. 프로그램을 통해 인기 아이돌 그룹을 만들 수 있다면,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글로벌 팬덤을 증가시킬 노하우도 충분하다. 국내에서만 투표를 받던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과 달리 해외 팬덤의 투표까지 참가시킨다면 <걸스플래닛 999>는 해외 팬덤의 확장까지 노릴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최초로 진행된 한·중·일 3개국 오디션

<프로듀스 48>은 한국과 일본, 양국이 참가하는 경연이었다. <걸스플래닛 999>는 최초로 한중일 3개국이 참가하는 걸그룹 오디션이었다. 시작 전부터 화제를 모은 엠넷은 다양한 국가에서 참여하는 오디션을 통해 참가자들의 열정과 청춘을 보여주고자 했다. 참가 국가를 한국, 일본, 중국 3개국으로 늘려 외연의 확장도 시도했다. 제작사의 의도와 달리 걸스플래닛 999의 시청률은 0%대를 기록했다.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동안 화제성 지수도 엠넷의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에 밀렸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 한·중·일 걸그룹 데뷔 프로젝트 <걸스플래닛 999>는 "당신은 누구의 꿈을 지킬 것인가"라고 플래닛 가디언들에게 물었다. 세 국가에서 참여한 최초의 오디션 프로그램이었지만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 CJ ENM

<걸스플래닛 999>도 시청자들의 투표를 통해 연습생들의 순위를 정했다. 제작사는 3개국 출연자가 골고루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도록 이전과는 다른 투표 방식을 도입했다. 응원하는 연습생 개인에게 투표하지 않고 한국, 중국, 일본 각 그룹별로 한 명씩 묶은 단위인 셀을 골라 투표하게 했다. 연습생들은 셀 구성원과 함께 생존하거나 함께 탈락해야 했다. 제작사는 셀을 통해 참가자들을 붙여 놓으면서 캐릭터를 부여하게 했다. 프로듀스 시리즈는 연습생들 사이에서 나오는 관계성(케미스트리)과 서사에 열광했다. 그 관계성과 서사를 함께 공존해야 하는 셀을 통해 기존의 성공 모델을 답습해 빠른 성과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엠넷은 프로듀스 시즌 1 때 리더 역할을 맡은 김세정이 실력이 부족한 김소혜를 챙기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점을 <걸스플래닛 999>에서도 다시 살려내고 싶었을 것이다.

셀 투표제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팬들은 연습생들 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서사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인기 연습생이 있다는 이유로 셀을 골라 투표해야 했다. 마치 조별과제와 같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시청자들에게 흥미를 끌지 못했다. 내가 응원하는 연습생을 뽑는데 단지 같은 셀에 있다는 이유로 관심도 없는 다른 그룹의 연습생도 함께 뽑아야 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제작사는 2차 투표부터는 셀 투표제를 없앴다. 2차 투표에서는 각 국가별로 3명씩, 3차 투표에서는 국가별로 1명씩 투표하게 했다. 걸스플래닛 999는 해외 팬덤의 투표도 도입했다. 아이돌 플랫폼 ‘유니버스(UNIVERSE)’를 통해 세계 곳곳에 있는 팬들에게도 투표를 받아, 한국 투표 50%, 글로벌 투표 50%를 점수로 환산해 순위를 정했다. 해외팬덤까지 동원했지만, 결과는 나빴다.

실패한 성공신화 답습

걸스플래닛이 새로운 시도에도 불구하고, 시청자의 관심끌기에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투표방식을 둘러싼 시청자의 불만이 높았다는 점이다. 투표할 때 팬들은 연습생들의 매력뿐만 아니라 연습생의 소속사와 국적까지 고려해야 했다. 제작진들은 셀 투표와 그룹별 투표를 통해 3개국 소녀들의 화합과 선의의 경쟁을 그려내려했지만 팬들의 반응은 달랐다. 같은 셀이라는 이유만으로 투표해야 하는 것과 그룹별 투표로 원하는 국적 참가자를 골라서 투표할 수 없다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걸스플래닛 999>의 투표 방식은 프로그램 시작 전 화제를 모았던 유명 연습생들도 프로그램 중간에 탈락하게 했다. 유명 연습생의 탈락으로 그를 지지했던 시청자는 프로그램에 흥미와 애정을 잃었다. 경연 이후 살아남을 연습생을 발표하는 생존자 발표식이 있을 때마다 이후의 시청률은 더 하락하는 참상으로 이어졌다.

▲ 기존 프로듀스 시리즈의 성공모델을 답습하며 만든 <걸스플래닛 999>는 마지막 방송까지 시청자들의 관심과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 CJ ENM

두 번째는 안이한 제작태도다. 엠넷은 <슈퍼스타 K>를 시작으로 이후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성공시켰다. <걸스플래닛 999>의 실패는 엠넷이 새로운 오디션 프로그램을 시도할 때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걸스플래닛 999>는 프로듀스 시리즈와 <아이돌 학교>의 투표수 조작 사태를 딛고, 엠넷이 그동안 오디션 프로그램을 만들며 축적해 온 노하우를 활용해 다시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왜 <걸스플래닛 999>가 실패했을까. <걸스플래닛 999>는 프로듀스 시리즈에서 보여준 구성과 화면을 그대로 가져왔다. 프로그램 시작과 함께하는 단체 퍼포먼스,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한 경연 등 전체적인 틀이 앞 프로그램 그대로다. 기존의 성공코드를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기존의 성공코드를 답습하기만 하며 베껴 만든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의 관심과 인기를 끌지 못한다. 엠넷은 기존의 성공코드가 아닌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내야 했다.

같은 기간 방송이 된 스우파를 보라. 스우파는 엠넷이 기존에 보여준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달랐다. 오디션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개개인들의 기량을 뽐내는 것이 아닌 팀전이었다. 참가자들은 프로그램의 우승 이외에 상대적으로 조명 받지 못하는 댄서들의 저변을 확대하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다. 주인공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이 각자의 삶의 당당한 주인공이라는 메시지는 시청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해주었다. 스우파에 참가한 댄서 모니카는 “스우파를 통해 대중들이 댄서들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목적을 이뤘다”고 했다. “누구든 춤출 수 있다는 말이 정답”이라며 “제가 스우파를 통해 어떤 힘이 생겼다면 그것에 노력할 생각”이라 했다.

아이돌은 꿈과 희망을 노래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오디션 프로그램 <걸스플래닛 999>는, 시청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해주는 데 실패했다.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확대한 투표는 시청자끼리 더욱더 경쟁하게 만들고 반목하게 만들었다. 엠넷이 진정으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의 부흥을 꿈꾼다면, 기존의 성공코드가 아닌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내야 한다. 코로나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청자들에게 소녀·소년들의 진정한 도전과 경쟁이 주는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생생하게 그려내야 한다.


편집: 유지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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