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영화 ‘F20’

“영화 <말아톤>을 나는 다시 못 볼 것 같다. 왜냐하면 <말아톤>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친구다, 우리 첫째 아들이. 아무 생각 없이 볼 때랑, 내가 자폐증 아이를 키우는 상황은 다르다. 가슴이 찢어진다. 그냥 봐도 가슴이 찢어지지 않나”

웹툰 작가 주호민이 영화 <말아톤>을 다시 관람한 후 남긴 말이다. <말아톤> 주인공 초원은 자폐증 환자고, 주호민 작가의 첫째 아이는 초원과 같은 질환을 앓고 있다.

▲ <말아톤>은 자폐증 환자 초원이 달리기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해 마라톤을 완주하는 과정을 그린 성장 스토리다. ⓒ 영화 <말아톤> 갈무리

영화가 영화만이 아닐 때

관객이 영화를 감상할 때 ‘거리 두기’가 작동한다. ‘영화는 영화로만 보라’는 말은 극장 안에서는 영화에 몰입하지만, 영화관에 불이 들어오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란 뜻이다. 스크린 속 인물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시련에 공감하면서도, 실제는 나와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거나 위로받는다. 물리적으로도 스크린 안과 밖은 분리되어 있다. 관객은 체험해보지 못한 사건을 ‘지켜보는’ 자리에 위치한다. 항상 영화와의 ‘거리 두기’가 작동하는 건 아니다. 영화가 자신의 현재진행형 아픔을 다룰 때, 관객들은 영화를 영화로만 볼 수가 없다. 주호민 작가가 토로한 대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내 가족이어서 영화를 그저 허구의 이야기쯤으로 가볍게 소비하고 넘겨버릴 수 없는 것이다.

장애, 질환, 트라우마, 범죄 실화 등 비극적 소재를 다룬 영화를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대감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지금까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그저 흥행 수단 정도로 이용해 온 영화들을 적지 않게 봐왔기 때문이다. 지적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은밀하게 위대하게> <7번방의 선물>의 경우에는 지적장애인들을 그저 자기 욕망이 없는 착하고 순수한 존재로만 그려 장애인에 관한 편견을 조장했다. 영화 <귀향>은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성 착취를 당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뤄 큰 주목을 받았으나 소녀들이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천장에서 촬영해 관객들이 이를 구경 하는듯한 느낌이 들도록 연출해 성폭력 피해자를 성적 대상화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영화의 제작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소재에 관해 충분한 이해를 거치지 않고 제작된 영화는 특정 집단에 관한 편견을 강화하거나, 분노와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이달 초, 조현병을 소재로 한 영화 <F20>이 개봉했을 때도 우려가 앞섰다.

무리에 섞이지 못하는 검은 금붕어

보험 설계사로 일하고 있는 애란은 생활력 강한 싱글맘이다. 애란의 아들 도훈은 명문대에 진학한 수재로 이웃들의 선망받는 엄친아이자,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애란에게 활력을 주는 소중한 존재다. 어느 날 애란은 도훈이 조현병에 걸렸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애란은 병원에서 만난 같은 조현병 아들을 둔 엄마 경화에 호감을 느끼고 의지한다. 경화는 도훈이 조현병 환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경화가 애란이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애란은 경화로 인해 자신이 지켜왔던 일상이 무너지지 않을까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 영화는 검은 금붕어의 클로즈 업 샷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금붕어 몸의 일부분만 비출 뿐 전신을 카메라에 담지 않는다. 컷이 바뀌며 주황빛의 금붕어들 사이에서 헤엄치는 검은 금붕어의 모습이 보인다. ⓒ 영화 <F20> 갈무리

영화의 첫 장면, 카메라는 금붕어 몸통의 곳곳을 클로즈업해 보여준다.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는 금붕어의 모습과 달리, 확대한 금붕어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이질적이고 징그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영상은 이웃 주민들이 조현병을 앓고 있는 유찬을 보는 태도를 상징한다. 이웃 주민들은 유찬을 한 인간으로서 있는 그대로 보려 하기보다, 자신과 다른 점을 찾고 이를 확대하여 해석해 유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왜곡한다. 유찬이 겪고 있는 아픔에는 관심이 없다.

계급과 차별, 혐오 사회의 맨얼굴

애란은 분양 세대와 임대 세대가 섞여 사는 동네에 산다. 단지에 따라 계급이 나눠진다. 분양을 받아 아파트에 입주한 정원은 임대로 거주하고 있는 이웃(변집사, 코코 엄마)과는 대화도 섞지 않는다.

분양세대 입주자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브런치 모임을 한다. 애란은 임대 세대에 사는 주민 중 정원의 브런치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자녀의 입시가 주 관심사인 엄마들의 사회에서 최상위인 ‘서울대 다니는 아들을 둔 엄마’이기 때문이다. 애란은 아들이 안겨준 ‘특별 지위’를 거부하지 않는다. 정원이 변집사와 코코 엄마를 대놓고 무시할 때도, 애란은 같은 처지인 임대동 주민들을 감싸기보다 은근히 ‘나는 저들과 다르다’며 안도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인다.

혐오와 차별이 당연시되는 계급 사회에서는 약자들끼리도 계급을 나누고 서로를 혐오한다. 임대동 주민들은 싱글맘이자 조현병 환자를 아들로 둔 경화가 등장하자 노골적으로 차별의 시선을 보낸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경화를 향한 동네 이웃의 멸시와 혐오는 심해지고, 경화는 결국 어렵게 구한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애란은 싱글맘이자 보험 설계사인 동시에 임대 주택 거주자다. ‘보팔이(보험 설계사를 낮잡아 부르는 말)’ ‘휴거(휴먼시아 거지)’ ‘엘사(LH사는 사람)’ 같은 용어들이 우리 사회에서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보아, 애란은 사회적 약자로서 지금까지 그녀를 둘러싼 배경으로 차별을 겪어왔을 확률이 높다. 서울대생 도훈은 그런 애란을 차별의 대상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바꿔주는 존재다. 애란은 그런 아들이 경화의 아들 유찬처럼 동네 주민들의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애란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경화를 감싸주기보다 오히려 관계의 선을 긋는다. 애란에게 아들의 병은 극복해야 할 아픔이 아닌 남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치부에 불과하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치달을수록 애란이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들 도훈인지, 자신이 지켜왔던 일상인지 모호해진다.

영화가 차별받는 사람들을 그저 무력한 존재로만 그려냈다는 점은 아쉽다. 영화에는 불합리한 차별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차별이 대상이 되는 인물들은 자신이 당하는 차별에 그대로 순응할 뿐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는다.

영화는 차별을 가하는 주민들을 명확한 ‘악’으로 규정지음으로써 차별에 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아파트 주민들은 유찬을 “미친놈”이라고 부르거나 “아파트에서 나가라”고 하는 등 직설적이고 과격한 형태로 유찬의 가족에 차별을 가한다. 그러나 사회에서 차별의 형태는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장애우’라는 단어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하지 않은 비주체적인 존재로 구조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친구’를 의미하는 벗 우(友)자가 ‘장애인은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친구 같은 존재’, 즉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비주체적인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사회적 약자를 시혜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것도 차별이다. 그러나 영화는 차별을 가하는 집단을 단일한 존재로 그려냄으로써 사회적 약자가 마주하는 다양한 차별과 혐오에 관한 경험을 다루지 못했다.

영화가 겨냥한 목표는 무엇인가?

영화 중반부, 애란이 사는 아파트 단지 내에서 고양이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주민들은 조현병 환자인 유찬을 범인으로 의심하고 급기야 이 사건을 빌미로 경화를 아파트에서 내쫓으려고 한다.

동물 학대는 흔히 미디어에서 살인 사건을 암시할 때 사용된다.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는 연쇄살인마가 살해 욕구를 해소하거나 연쇄 살인의 조짐을 보일 때 등장하는 식이다. 조현병 환자 중 의도적으로 타인을 공격하거나 동물을 해치는 경우는 극히 적다. 그런데도 영화는 조현병 환자를 언제든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반사회적 존재로 묘사했다.

▲ 영화 <우리 동네>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범 효이는 자신의 분노에 못이겨 반려동물을 살해해 가죽으로 만든다 ⓒ 영화 <우리 동네> 갈무리

F20은 조현병의 국제 질병분류기호이다. 100명 중 약 1명이 걸리는 질환으로 지속적인 의학적 관리와 재활을 통해 안정적 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영화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문구다. 감독은 질병분류기호인 F20을 영화의 타이틀로 건 이유를 설명하며, ‘조현병은 완치될 수 있는 질병이기에 병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기보다 중립적인 시각에서 표현하고 싶다’고 기자간담회에서 밝혔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조현병 환자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는, 사회에 편입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도훈과 유찬은 철저하게 이 세상과 격리된 타자로 그려진다. 영화는 도훈과 유찬이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끝까지 제시하지 않는다. 아들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이웃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경화는 가장 의지했던 애란의 손에 잔인하게 죽음을 맞는다. 이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 약자들을 향한 혐오적인 시선인지, 피해야 할 존재로서의 사회적 타자인 조현병 환자인지 헷갈리는 이유다.

영화가 영화로 끝나선 안 되는 이유

영화가 공개된 이후, 관객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관객 일부는 조현병 환자에 관한 편견을 악화시켰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문제 제기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F20> 의 평점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댓글은 “영화는 영화일 뿐 모든 예술을 다큐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평이다. 이 영화는 영화로만 끝날 수 없다. 조현병 환자에 관한 편견과 혐오는 영화 밖에서도 현재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국립정신건강센터가 발표한 2018 대국민정신건강 지식 및 태도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욱 위험한 편이라고 생각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60.8%로 절반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영화는 정신 질환자는 위험하다는 편견이 통념이 된 사회에서 ‘조현병 환자는 함께 살면 불편하고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강화했다. 이 영화를 영화로만 보라는 의견은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영화에 관한 불편함을 표출하는 의견을 ‘과몰입’으로 규정하고 문제 제기를 차단하려는 시도다.

영화에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현실적으로 그려내야 한다는 의무는 없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누군가의 현재진행 중인 아픔을 볼 때 우리의 시선은 영화 밖으로도 향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거리 두기를 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소재가 그저 영화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도구로만 소구된다면, 이로 인해 누군가가 불편함을 느낀다면,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편집: 이예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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