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슬기로운 의사생활’과 ‘유미의 세포들’

소소한 이야기 전성시대다. 자극적이지 않은 스토리, 개인의 일상을 담아내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과 <유미의 세포들>은 그런 이야기의 전형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시즌1의 성공에 힘입어 시즌2 1화부터 10%의 높은 시청률로 시작했다. 마지막 12화는 14%를 기록했다. <유미의 세포들>은 전국 시청률이 2%대로 낮았지만, 화제성 지수는 드라마 분야 3위에 올랐다. 유튜브 클립은 (11월 2일 기준) 업로드 1주일 만에 100만 조회수를 달성했다. 우리는 왜 자극적이지 않은, 소소한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을까?

케미로 엮어낸 예능식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99학번 다섯 의사의 일상을 다루는 드라마이다. SBS <낭만닥터 김사부>처럼 생명을 살려야 하는 긴박감도 없고, MBC <하얀거탑>처럼 병원 속 권력 암투도 없다. 그저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살아가는 의사들의 일상을 다룬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거창하지 않다. KBS <굿닥터>는 서번트 증후군인 자폐증 의사를, SBS <닥터이방인>은 북한 최고 엘리트 의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의대를 졸업하고 교수가 된, 평범한 99학번 의대 동기 5명이 주인공이다.

▲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평범한 99학번 의대동기 5명의 소소한 일상을 그린다. 연출 신원호PD, 극본 이우정 작가. 시즌 1은 2020년 3월에 방영했고, 2는 2021년 6월부터 방영해 지난 9월 16일 종영했다. ⓒ tvN 갈무리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스토리가 없다. 소소하고 파편적인 일상이 이야기의 전부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캐릭터가 분명한 등장인물들이다. 천재 중 천재로 실패를 모르고 산 만능재주꾼 이익준(조정석 분), 천사 같은 성품을 지녀 별명이 부처인 신부지망생 안정원(유연석 분), 까칠하지만 무심하게 챙겨주는 김준완(정경호 분), 홀로 지내는 게 누구보다 편한 마마보이 양석형(김대명 분) 그리고 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카리스마 리더십의 소유자 채송화(전미도 분)까지.

▲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5명의 친구가 만들어가는 일상의 모습과 함께 성장해가는 인간미를 그려낸다. 매일 같은 병원에 근무하면서도 주말이 되면 같이 밴드 활동을 할 정도로 가깝게 지낸다. ⓒ tving 갈무리

등장인물들은 20년 지기다. 서로의 과거를 지켜보며 성장했다. 친구로 함께할 때, 이들은 의사로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던 모습을 보여준다. 케미스트리(화학반응)는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먹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까칠한 김준완과 카리스마 채송화는 음식 앞에서 이성을 잃는 먹깨비가 된다. 이런 행동을 대비해 이익준은 그들을 조련하고, ‘부처’ 안정원은 불평을 늘어놓는다. 양석형은 음식을 놓고 싸우는 김준완과 채송화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얻는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다섯 명의 화학반응으로 매회를 이어나간다.

예능 프로그램은 출연진들이 웃음 포인트를 끊임없이 이어나가며 한 프로그램을 채운다.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하면, 출연진들이 최대한의 웃음을 뽑아내고 다음 상황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도 마찬가지다. 인물 간의 호흡을 보여줄 수 있는 한 장면이 끝나면, 다른 재미를 줄 수 있는 다른 장면이 이어진다. 설악산 여행을 계획하는 시퀀스는 대표적이다. 병원 앞에서 새벽 산행 여부를 두고 안정원과 김준완이 다투는 장면, 차 안에서 저녁 식사에 관한 분분한 의견을 채송화가 카리스마로 일소하는 장면, 21세기에 스마트폰으로도 숙소 예약을 못하는 김준완을 놀리는 장면이 이어진다. 각 장면에서 인물 간의 화학반응이 이어지는 동안 설악산 여행 계획이 완성된다.

유미와 세포의 상호작용

<유미의 세포들>의 내용은 단순하다. 대한국수에 다니는 김유미(김고은 분) 대리의 사랑 이야기이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형식은 만만찮다. 개인 내면을 보여주는 세포 세계를 3D 애니메이션으로 시각화했다. 3D 애니메이션으로 그린 세포의 모습은 아기자기하다. 유튜브 클립으로 세포 세계만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각 세포는 김유미의 행동을 결정한다. 세수 세포는 아무리 귀찮아도 저녁엔 세수하도록 하고, 이성 세포는 김유미가 이성으로 판단할 때 도움을 준다. 드라마에선 개인의 행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세포를 ‘프라임 세포’라고 한다. 김유미의 프라임 세포는 사랑 세포다.

▲ <유미의 세포들>의 로그라인은 “세포들과 함께 먹고 사랑하고 성장하는 평범한 유미의 이야기를 그린 세포 자극 공감 로맨스”다. 이동건 작가가 그린 동명의 웹툰이 원작으로, 이상엽 PD가 연출했다. 지난 9월 17일부터 10월 30일까지 방영했다. ⓒ tvN 갈무리

<유미의 세포들>은 주인공 김유미와 세포들이 이 세상에서 사랑을 이루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유미의 세포들>에는 두 서사가 있다. 메인 서사는 현실 세계에서 김유미가 사랑을 찾고 지속하는 과정이다. 메인 서사에 갈등과 위기가 작동한다. 연적도 나타나고, 연인인 구웅(안보현 역)과 오해가 쌓이기도 한다. 서브 서사인 세포 세계는 바로 그 순간에 움직인다. 세포들은 김유미의 편에서 유미가 사랑을 쟁취하는 데 도움을 주고, 김유미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며, 때로는 김유미가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 <유미의 세포들>에는 3D 애니메이션으로 시각화한 세포들이 등장한다. 각 세포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특징을 대변한다. 사랑 세포는 사랑을 담당하고, 응큼 세포는 유미의 엉큼한 욕망을 대변한다. ⓒ tving 갈무리

세포들은 김유미를 위해 살아가지만, 유미에게 종속된 것은 아니다. <유미의 세포들>에서 현실 세계는 세포 세계와 상호작용한다. 주로 현실이 세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만, 세포의 작용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히스테리를 부리는 세포, 히스테리우스는 후자의 사례다. 김유미는 남자친구 구웅과 첫 만남에서 호감을 느끼지만, 히스테리우스가 세포 세계를 난장으로 만들면서 호감이 체념이 돼 사라지기도 한다. <유미의 세포들>은 유미와 세포들의 모습에 집중한 드라마다.

지금껏 없었던 드라마 문법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서사시(drama, 드라마)라는 단어의 어원을 도리아 단어 ‘행동하다’(dran)로 소개한다. 드라마는 목적에 따른 행동과 그에 따른 결과를 다루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동안 서사는 드라마의 핵심이었다. 이런 드라마의 본질에서 자유로운 드라마가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다. 이 드라마는 거창한 어떤 메시지도 서사도 남기지 않는다. 그 지점이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는 이를 편안하게 만든다. 드라마의 편안함은 어떤 메시지와 서사도 억지로 남기지 않는 데서 온다.

▲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의 캐릭터다. 드라마는 거창한 서사나 메시지 대신 캐릭터들이 일상에서 보여주는 평범한 삶을 이야기한다. ⓒ tving 갈무리

기존 드라마들은 강력한 서사를 바탕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90분을 채운다. 등장인물이 벌이는 화학반응이다. 서사도 등장인물끼리 만나 화학반응을 끌어내는 데 주력한다. 카페, 식당, 집 등 특별하지 않은 장소에서, 별것 아닌 일로 만난다. 기존 드라마는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풀어내기 위해 중심 서사를 끌고 간다. 주인공은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고 고난도 있어야 했다. 고난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주인공에게 깨달음도 있어야 했다. 그 속에서 메시지를 만들어냈다. 시청자는 매 순간 긴장하고 예측하고 감정을 소비해야 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다르다. 강력하고 긴박함이 담긴 메시지와 서사가 없다. 시청자는 등장인물들이 연출하는 잔잔하고 따뜻한 이미지를 느끼면서, 90분을 즐기면 된다.

<유미의 세포들>도 기존 드라마와 다르다. 이제껏 드라마는 외부 환경의 변화를 선택이나 결정의 주요한 원인으로 설정했다. 외부 자극 없는 주체적 선택은 이성 작용이 전부였다. 심지어 가장 감정적인 멜로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멜로드라마에서 ‘사랑’은 강력한 목표다. 첫눈에 반하는 주인공, 어린 시절 사랑을 약속하는 장면이 드라마 초반에 제시되는 이유다. 그러나 이 목표는 우연한 상황(외부자극)으로 흔들리게 된다. 주인공 중 한 명이 불치병에 걸리고, 사랑의 경쟁자가 나타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드라마 주인공의 행동이 현실에 딱 맞는 것은 아니다. 개인은 외부 환경만이 아니라, 자신만의 성격과 특징 등 내적 조건을 반영해 결정하며 행동한다. 동일한 외부환경에도 개개인의 세부적인 행동 양식이 다 다르다.

▲ <유미의 세포들>에서는 세포끼리 다투기도 한다. 김유미가 남자친구 구웅이 여자사람친구 서새이(박지현 분)와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다는 말에 감성세포와 이성세포가 갈등하는 장면을 1초 토론의 형식으로 묘사한다. ⓒ tving 갈무리

<유미의 세포들>은 이 지점을 짚었다. 캐릭터의 행동요인으로 외부 환경보다 개인의 취향과 특징에 집중했다. 애니메이션화한 세포들은 그 과정을 풀어내는 납득 장치였다. 시청자들은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 세포의 행동을 보고, 주요 등장인물인 유미와 구웅의 행동을 이해한다. 심지어 비합리적인 행동조차도 그렇다. 구웅에게 호감을 느끼다가도 이별이 두려워 날뛰는 유미의 세포 히스테리우스, 구구절절하다며 오해를 풀 수 있는 긴말을 짧게 대체하는 구웅의 사랑세포는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 <유미의 세포들>은 전달할 수 없을 것 같던 개인의 내면에 집중해, 사랑을 둘러싼 행동을 결정하는 속마음들을 보여주고 또 납득시킨다.

내게 더 가까운 판타지 

<트렌드코리아 2022>는 다음 해 키워드로 ‘TIGER or CAT’을 꼽았다. 눈여겨볼 흐름은 ‘개인화’와 ‘편안함’이다. 개인에게 더 집중하는 사회 흐름은 경제측면이 두드러진다. 머니러시(Money Rush)는 자기실현의 목적으로 N잡 등 추가소득에 나서는 트렌드를 말하고, 라이크커머스(Like Commerce)는 소비가 개인취향에 의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편안함의 개념도 바뀌었다. 특별한 공간과 시간을 요구하던 힐링 개념 대신, 일상에서 편안함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러스틱라이프(Rustic Life)는 도시 생활에 시골의 여유와 편안함을 더하는 삶을 의미한다. 바른생활루틴이(Routinize Yourself)는 사회 속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규칙적인 생활로 자기관리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유미의 세포들>과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오늘 세상의 트렌드에 충실하다. <유미의 세포들>은 외부 환경이 어떻든 내 취향과 특징에 집중한다. 사람의 내면에 천착해, 개인이 행동을 어떻게 결정하는지 그 과정을 밝힌다. 드라마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내 내면을 상대가 이해하는 것 같은 공감을 제공한다.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빠지는 건 그런 소소한 공감 때문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현실 속 치열함에 맞먹는 장대한 투쟁 서사 대신, 매일 마주하는 친구들과의 일상을 이야기한다. 함께 밥 먹고, 일하고, 사랑하고, 여행하는 게 드라마의 중심 이야기이다. 그 과정이 항상 좋지만은 않다. 일에 치여 여행지에서 급히 되돌아오기도 하고, 사랑에 실패하기도 한다. 우리 일상과도 비슷하다. 아니, 바로 내 일상이다.

드라마는 결국 판타지다. 모두에게 <유미의 세포들>처럼 나를 돕는 인격을 가진 세포는 없고, 살아가는 일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처럼 모든 일이 웃음과 따뜻함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우리 인생은, 삶은 영원한 결핍일 수밖에 없다. 소소한 일상을 담는 편안한 드라마는 결핍을 가진 보통사람들이 현실을 살아가며 견뎌낼 작은 위로와 격려가 된다. 내게 더 가까운, 특별하지 않은 일상 판타지를 충족해준다. 바로 우리가 자극적이지 않은 소소한 이야기에 빠져드는 이유다.


편집: 김세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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