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위안'

▲ 이성현 PD

또 언론사 입사시험에 떨어졌다. 이번엔 술술 잘 풀린다 싶었는데, 마지막에 미끄러졌다. 결과를 보지 않아도 마주친 감독관의 심드렁한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흘러가는 금요일 밤과 마주한 토요일 새벽에 나는 눅눅한 바닥에 딱 붙어 천장만 바라봤다. 인생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현실의 막막함과 캄캄한 밤의 어둠은 하나가 되었다. 깊은 밤 ‘매슬로 욕구’의 아래층으로 걸어간다. ‘꿈이고 뭐고 이제 내 마음대로 살 거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배고픔, 목마름, 배설, 성, 수면 욕망이 나를 꽉 채운다. ‘놀고 싶다, 먹고 싶다, 자고 싶다.’ 속을 뒤트는 매운닭발과 클래식소주 그리고 타란티노의 거친 영화로 며칠 밤을 보냈다.

비가 뚝뚝 떨어진다. 빗방울이 창문 좀 열어보라 두드린다. 안개비에 젖은 산은 모네의 수련에 비할 수 없는 걸작이다. 무작정 산을 향해 나섰다. 엄마의 부재중 전화와 ‘오빠의 능력을 몰라준다’는 애인의 문자에는 응답을 하지 않았다. 산 중턱에서 우산을 접고 모자를 눌러썼다. 산의 모습을 더 바라볼 수 있다. 빗방울에 떨어지기 싫은 솔방울은 나뭇가지를 꽉 붙잡고 있다. 결국 떨어질 게 분명해도, 끝까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확 떼서 발로 차려다 마지막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는 간절한 솔방울에서 나를 보았다.

멈추지 않는 비에 이제 막 핀 벚꽃잎이 떨어졌다. ‘일 년 동안 꽃 피우려고 노력했잖아. 힘 좀 내봐.’ 나에게도 하는 말이다. 몇 년 만에 벚꽃을 제대로 보는가 했는데, 떨어진 잎만 쳐다봤다. 돈 벌기 바쁘다, 공부할 시기다 핑계 대며 벚꽃을 무시해 온 게 조금 후회됐다. 허전해 보이는 벚꽃에 나비가 날아든다. 노랑나비는 여기저기 꿀을 맛보며 벚꽃과 하나가 된다. 마치 떨어진 꽃잎이 다시 붙듯이, 나비는 떨어진 꽃잎의 허전함을 메운다. 

▲ 비가 와도 나비는 힘껏 바람을 밀어내며 난다. 잠시 꽃에 앉아 쉬어도, 다시 날아오른다. 날갯짓은 나비가 강력하게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 Pixabay

나비는 비가 쏟아져도 힘껏 바람을 밀어내며 난다. 나라면 가만히 나무 아래 숨어있을 텐데. 자기보다 거센 비바람을 타기 위해 자기 몸도 주체하지 못한다. 비틀거려도 나비는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다. 잠시 꽃에 앉아 쉬어도 내가 사진을 찍으러 다가가면 다시 날아오른다. 나비의 날갯짓엔 생기가 넘친다. 독수리처럼 장엄하지도, 벌처럼 재빠르지도, 매처럼 곧지도 않다. 요리조리 펄럭이는 나비는 강력하게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예상치 못한 자연의 순환은 나를 위로한다. 수많은 영화 배경보다 더 빼어난 봄 안개, 함께하기 위해 멈추지 않고 오르내리는 나비의 날갯짓, 이곳은 바로 자연의 세계다. 불가능하다 여겼던 걸 되돌아본다. 나비처럼 나만의 날갯짓을 할 수 있을까? 욕망이 나를 사로잡게 두는 건 답이 될 수 없다. 때론 떨어져도 붙어도 내 길을 걸으리라. 돌아오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애인에게 다음 주엔 꽃구경 가자 답장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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