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억압인 줄 모르고 받는 억압

▲ 김선홍

2년 전 일이다. 추석 전전날, 아빠와 같이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 플랫폼에 부자가 나란히 서서 시답잖은 얘기를 나눴다. 대형버스 수십 대가 이리저리 제 자리를 찾아다녔다. 보고 있던 아빠가 대뜸 말했다.

“아빠 중학생 때 꿈이 고속버스 기사였데이.”

무슨 말인가 싶어 대답하지 않고 기다렸다.

“대구 고모할머니 집 있제? 거기를 할아버지랑 같이 간다고 경주터미널에서 버스를 탔거든. 처음 고속버스를 탔는데 이기 무슨 비행기 타는 거 같은 거라. 그때는 고속버스 안내양도 있었고, 기사도 선글라스랑 공군 장교 캡 같은 걸 썼는데 전투기 파일럿같이 멋있더라고. 그때 잠깐 고속버스 기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

소중한 기억이다. 아빠와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당신의 꿈 이야기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데 어릴 때부터 같은 철도회사에 30년째 근속하고 싶어 하진 않았을 테니까. 내가 그랬듯 아빠에게도 매일같이 꿈이 바뀌던 시절이 있었다.

그 꿈은 중간중간 지워져 나갔다. 아빠는 고등학생 시절 글 쓰는 것이 좋았지만, 취업이 안 된다는 할아버지 걱정에 토목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공부를 좀 더 해보고 싶었지만, 할아버지의 초등교사 봉급으로 4남매를 건사하는 건 무리였다. 나쁘지만은 않았다. 전국을 누비는 KTX 노선은 아빠의 일터였다. 경력이 쌓이니 대형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들어왔다. 내심 설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고사했다. 이직하면 연봉은 오르겠지만, 정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회사에 계속 있는 게 돈을 더 많이 번다는 계산이었다.

아빠가 돈에 굴복하며 살아온 것은 아니다. 돈은 그저 그가 인생에서 마주해야 했던 몇 가지 갈림길에서 그 방향을 조금씩 비튼 정도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좋은 남편이자 친구 같은 아빠였으며 나름대로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해온 삶을 살아왔다. 누가 나무랄 수 있으랴. 그러나 아빠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돈이 주는 은근한 압박에 꿈은 점점 옅어졌고, 취미 생활도 늘 미뤄지곤 했다. 아빠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버스 기사가 궁극적 이상이었을까?

과거와 비교하면 자본의 세상에서 자아실현의 기회는 셀 수 없이 많다. 다른 조건보다 돈이 관건이다. 자아실현의 수준은 천차만별이어서 자본의 규모에 따라 결정되기 십상이다. 현대인은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준을 낮출 뿐이다. 그러다 그 수준이 한없이 낮아지고, 어느덧 한때 열정을 가졌던 꿈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도 잊어버린다. 우리는 억압인 줄도 모른 채 시나브로 억압받으며 살아간다. 

▲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억압'의 결과일 수도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 Pixabay

아빠는 남들에게 ‘우리 아들은 메이커 같은 거 사달라고 안 합디다’라며 자식 자랑을 하곤 했다. 나는 유명 브랜드 옷이나 신발에 별로 관심이 없다. 편하고 색깔만 예쁘면 그만이다. 옷장은 거의 보세 옷집이나 SPA 매장에서 산 것들로 채워져 있다. 비싼 옷이 싫은 건 아니다. 백화점에 갈 일이 있으면 고급 남성복 코너에도 들르곤 한다. 지난번엔 120만 원짜리 베이지색 코트를 한번 걸쳐봤다. 거울 속 나는 참 멋있어 보였다. 제자리에서 두어 번 더 돌아보고는 옷을 건네줬다. 다음에 또 오겠다고 거짓말하고 나는 유니클로로 향했다.

가난한 적도 못 먹은 적도 없다. 남들에게 돈 없다고 괄시받은 기억도 없다.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순응한 것뿐이다. 이 삶의 자세가 내 유산이다. 아빠는 내가 당신보다 진취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믿기에 가끔 부러워하는 눈치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돈이 주는 억압 때문에 아빠에게도 내게도 삶은 각박하다. 


*이 칼럼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의 ‘22기 예비언론인 캠프’에 참여한 김선홍 씨가 과제로 보내온 글을 첨삭한 것입니다. 그는 한국외대 언론정보학과에 재학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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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강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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