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공존’

▲ 오동욱 PD

서울 공덕동에 살면서 5호선을 자주 탄다. 지하철 노선도로 보면 보라색이다. 스크린도어에 적힌 설명에 따르면, 서울도시철도공사는 승객을 황제로 생각하겠다는 일념으로 보라색을 5호선의 상징으로 택했다고 한다. 호감이 가는 상징이다. 5호선에는 매일 수많은 황제가 타고 내리는 셈이니까. 나도 그 중 하나이고. 

황제를 상징하던 색은 보라색보다 자주색에 가까웠다. 자주색은 보라색보다 빨간색 비율이 좀 더 높다. 자주색은 고대 페니키아 신화에서 페니키아의 주신 멜쿠르아트가 연인에게 자주색 옷을 지어주면서 귀하게 취급됐다. 고대인들은 자주색을 신의 색으로 생각했다. 자주색은 신의 후광과 같은 색으로 여겼고, 자주색 옷을 입은 사람을 신에 의해 선택된 이로 생각했다. 로마 행정관에서부터 비잔틴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자주색 옷을 입은 이유다.

반면, 자주색의 보색인 녹색은 산과 들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색이다. 들판의 풀잎 색이기도 하고, 숲의 색이기도 하다. 녹색은 흔해서 ‘주변부 색’으로 취급됐다. 괴테는 녹색을 ‘평범해서 매력 없는 색’이라고 평했다. 평범함이 녹색의 특징인 셈이다. 녹색은 비천한 자를 상징했다. 고대 로마에서 녹색 옷은 일반 시민조차 입지 않고 돈 없는 서민이 입었다. 황제의 자주색과 서민의 녹색, 색상의 대비는 계급의 대비이기도 했다. 현대에도 이런 대조적인 상징이 남아 양원제를 채택한 영국에서 귀족원인 상원은 자주색을 상징으로 쓰고, 서민원인 하원은 초록색을 상징으로 삼는다. 

자주색과 녹색의 운명을 가른 것은 희소성이다. 자주색은 자연에서 보기 드물다는 이유로 권력의 선택을 받아 예찬의 대상이 됐지만, 녹색은 멸시의 대상이 됐다. 현대 자연과학 이론에 따르면, 자연에서 자주색보다 녹색을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녹색이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인데도, 권력은 자주색을 귀하게, 녹색을 비천하게 여겼다. 자연에서 자주색과 녹색은 그저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색이다. 희소성은 자연이 정한 가치가 아니라, 인간이 정한 가치일 뿐이다. 

▲ 앵초는 푸른 잎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 pixabay

자주빛이 아름다운 앵초의 꽃말은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이다. 내가 그 아름다움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생 때였다. 봄이 되면 할머니 손을 잡고 산나물을 캐러 뒷산에 올랐는데, 고들빼기 밭 옆으로 드문드문 있던 것이 앵초였다. 할머니가 고들빼기를 캐는 동안, 나는 앵초를 구경했다. 처음에는 꽃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초록빛이 선명한 넓은 풀잎에 마음을 뺏겼다. 앵초가 아름다운 것은 선명한 녹색 잎이 자줏빛 꽃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앵초의 아름다움은 자연이 내게 알려준 교훈인지도 모르겠다. 자연을 닮은 가치, ‘공존’의 길을 모색하라고.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임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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