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삶’

▲ 김계범 기자

대학 2학년 때 처음 인생에서 방황을 겪었다. 남자 친구 대부분은 군대에 갔고 뚜렷한 목표도 없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이른바 ‘대2병’에 걸렸던 걸까? 2019년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10명 중 6명은 자신이 ‘대2병’에 걸렸다고 답했다. ‘대2병’은 대학 2학년이 앓는 병을 뜻하는 말로, 대학생이 진로와 취업 걱정 등으로 자존감이 떨어지는 증상을 겪는 것이다. 탈없이 10대를 지나온 내게 ‘대2병’은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와 같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1년이 지나자 강의부터 인간관계까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자유를 꿈꿨는데 막상 대학에 입학하자 새롭게 만나는 많은 사람과 자유롭게 주어진 시간이 감당하기 버거웠다. 입시를 준비하며 꿈꾸던 대학 생활과는 다른 방향으로 내 삶이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날은 밤새 술을 마시고, 어떤 날은 강의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인생에 관한 고민은 많았지만 뚜렷한 방향이 없던 때였다. 그러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 무렵 오랫동안 대필작가 등으로 일하던 한 지인이 마흔 넘은 나이에 큰 상금을 주는 문학상을 받고 등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그 말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소설가로 데뷔한 그가 존경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다짐했다. ‘서른둘 불꽃 같은 삶을 산 전혜린처럼 젊은 날에 멋진 작품을 남기고 서른이 되기 전에 죽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와 가깝게 지내던 이들에게는 그 사실을 말하기도 했다. 훗날 그때 나 때문에 부모님을 포함해 나와 친한 이들이 많이 걱정한 것을 알고는 후회했다.

▲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다. 세대, 성별, 인종 등을 넘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 ⓒ Pixabay

답답하면 혼자 걷곤 했는데 어느 날은 한 후배와 서울현충원을 같이 걷기로 했다. 왜 하필 그곳에 가기로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고 듣고 갔던 것 같다. 현충원은 내가 다니던 학교와 가까워 오다가다 넘겨다본 것이 고작이었다. 현충원은 참배하러 오는 곳으로만 생각했는데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수많은 전사자들이 묻혀 있는데 내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처음 현충원에 왔으니 으레 대통령 묘역은 들러야 되겠다는 생각에 후배에게 “대통령 묘역에 가자”고 말했다. 그는 “거길 꼭 들러야 하냐”고 대꾸했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잃은 분들을 찾아 뵌 것으로 충분하지 않느냐는 거였다.  

몇 년 뒤, 문득 그때 생각이 나서 수업을 마치고 학교 뒤편 서달산을 따라 현충원까지 걸었다. 그날 혼자 걸으며 삶과 죽음에 관해 생각했다. 그때 그 후배 말이 다시 떠올랐다. 죽음 앞에서 묘지의 크고 작음은 살아있는 사람이 하는 ‘구별 짓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유서에서 화장하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기라고 했다. 사람은 때가 되면 누구나 죽음을 맞게 된다. 삶이라고 다르지 않다. 각자의 삶은 똑같이 소중하고 귀하다. 

“20대가 지난 뒤에야 나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나는 최고의 작가가 아니라 최고의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 시작했다.”

소설가 김연수의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스물한 살 ‘대2병’을 겪은 나는 그 시절을 지나 그 뒤로도 몇 번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었다. 내 뜻대로 되는 일보다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많았다.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현충원을 혼자 걷던 그날, 나는 ‘서른이 되기 전에 죽겠다’는 내 생각이 정말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현충원을 나오며 흔들리고 넘어지더라도 내게 주어진 삶의 끝에 관해서 쉽게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내 삶의 이야기를 넘어 이웃과 세상의 이야기를 말과 글로 담아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도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알기에 예전처럼 쉽게 시간을 흘려 보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는 삶. 그것이 내가 사는 목표이고 보람이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강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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