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색깔론’

▲ 정진명 기자

예고 시절 하루는 선생님이 ‘내가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을 그려보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친구들은 고흐부터 피카소까지 누구나 알 만한 화가의 작품을 선택했다. 나는 ‘인기도’보다 ‘화가의 신념’을 택했다. 프랑스 색채 화가인 앙리 마티스의 신념은 ‘미술은 이것이다’라는 공식을 깨는 것이다. 실제 모습과 비슷하게 그리는 것을 추구하던 당시 화풍은 명암을 흰색과 검은색으로 표현했다. 마티스는 그런 ‘공식’을 깨고, 명암이나 공간의 구분을 빨강, 초록, 파랑을 사용해 그림으로 표현했다. 자유분방한 색 표현은 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현대미술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그린 '모자를 쓴 여인'(1905). ⓒ 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

색이 갖는 이미지와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 한때 부정적 의미로 쓰이다가, 긍정적인 의미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빨간색과 초록색이 부정한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됐다. 빨강은 신교도 종교 개혁가들에게 부도덕한 색깔이었고, 오랫동안 매춘부들이 반드시 걸쳐야 할 천 조각의 색깔이기도 했다. 보색인 초록색도 마찬가지였다. 봉건시대에 죄를 묻고 운명을 결정할 때 이루어지는 신성한 재판 장소가 초원이었는데, 초록색이 ‘초원의 색’이라 해서 부정의 색이 됐다. 오늘날 대중이 이 두 색에 갖는 이미지는 달라졌다. ‘붉은색’은 부(副)의 기운이 있어 돈을 잘 벌게 한다. ‘녹색 채소를 먹으면 장수한다.’ 이들 색깔이 긍정의 이미지로 변한 것이다.

색은 인간뿐 아니라 한 나라 정치에도 영향을 끼친다. 정당은 저마다 상징색을 내건다. 정당의 노선을 반영한 것이 정당 이름과 색깔이다. 독일 녹색당은 환경보호와 핵 폐기를 주장하며 녹색을 선택했고, 우리나라 정의당은 사회적 약자의 복지를 지켜주는 따뜻한 정당 이미지를 대중에게 심어주려고 노란색을 사용한다. 나는 선거 때마다 색깔의 중요성을 느낀다. 많은 국민은 색깔로 당을 구별하고 투표한다. 뉴스에서도 지역마다 어느 정당을 지지하는지 구분할 때 색깔로 표시한다.

▲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한국 정당들은 이미지 변신을 위해 '색깔 선점'에 총력을 기울인다. ⓒ KBS

한국 정치의 문제는 색을 자신들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만 이용한다는 점이다. 보수당인 국민의힘은 2012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색깔을 파랑에서 빨강으로 전환했다. 이유는 당의 쇄신을 위해서라고 답했고, 일부 언론은 ‘국내 정당 사상 최초의 컬러마케팅’이라고 부추겼다. 짧은 기간에는 성과가 좋았다. 2012년 4월 총선에서 제 1정당으로 올라섰고, 대표 보수정당 이미지도 갖게 됐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본질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국민이 원하는 ‘쇄신’이나 ‘변화’는 국민의 삶에 도움되는 정책을 당이 만드는지, 청와대와 국민 사이에서 소통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가였다.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색이다. 어떤 색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예술적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 무조건 일반 공식에 맞춘 색을 채워 넣는다고 좋은 작품이 되고, 전혀 엉뚱한 색을 칠한다고 작품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전체로 색의 조화가 적절히 이루어지면 된다. 지금 우리 국민은 노선을 대변하지 못하는 정당의 색깔에 신물이 나 있다. 검찰과 법무부의 대립이나 탈원전 정책을 두고, 보수-진보 정당들이 서로 ‘정치색이 짙다’고 비판하고 본질을 흐리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는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진보는 노란색에서 파란색으로 바꾸는 식의 널뛰기식 ‘색깔 마케팅’에 연연하면 안 된다. 서울과 부산의 시장선거에서도 정당의 노선과 정책은 거의 부각되지 못했다. 정당은 지지자가 원하는 노선의 색깔을 분명히 하고, 치적과 비전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쇄신이고 한국 정치와 정당이 나아갈 방향이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박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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