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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은 죄가 없다
[상상사전] ‘색깔론’
2021년 04월 21일 (수) 13:52:14 이예슬 기자 yeslowly@gmail.com
   
▲ 이예슬 기자

아직도 생생하다. 갖고 놀던 색종이 모서리에 살짝 스쳤을 뿐인데, 새끼손가락에 빨간 피가 맺혔다. 네 살,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빨강’에 관한 첫 기억은 어제 일 같다. 아프고 무서운 색. 그 뒤로도 빨강은 항상 나를 긴장시켰다. 시험지에 죽죽 그어진 빨간 줄부터 긴급상황임을 알리며 달리는 경찰차의 빨간 경광등, ‘절대 약속을 어기면 안 돼’라고 말하는 듯한 첫 근로계약서의 빨간 도장까지. 빨강은 내게 공포의 색이다.

빨강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먼저 색으로 인정받고 사용됐다. 최초 인체 조각상으로 알려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도, 라스코 동굴 벽의 들소 그림에도 붉은색 흔적이 남아있다. 빨강은 오랫동안 색을 대표하는 색으로 여겨졌다. 색이 있다는 말은 ‘빨갛다’와 같은 의미였다. 영어 ‘color’도 빨강을 뜻하는 ‘콜로라도’(Colorado)에서 유래했다. 빨강은 색이 있고 없음을 나누는 첫 기준이었다. 붉은 염료가 비싸던 옛날에는 주로 왕족이나 지체 높은 귀족만이 빨간색 옷을 입었고, 빨강은 곧 명예와 권위를 의미했다.

우리 정치에서 빨강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한국 정치에서 색깔이 선명하게 각인된 것은 2012년 18대 대선 때였다.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며 당색을 빨간색으로 지정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를 ‘빨갱이’라 불러온 우리 사회에서 빨강은 진보의 상징으로 통했다. 세계적으로 진보성향 정당이 빨강을 내세우는 사례가 많아서 새누리당이 상징색을 빨강으로 바꾼 것은 파격이었다. 새누리당은 ‘유연함’과 ‘열정’을 강조하며 오랫동안 금기로 여기던 색을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보수진영의 상징색이 된 빨강은 새누리당이 몇 번 당명 변경을 거쳐 국민의힘이 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지난 2012년 새누리당은 '유연함'과 '열정'을 강조하며 당색을 빨강으로 바꿨다. © <연합뉴스>

빛과 태양의 영예를 가진 빨강은 보수당에 흡수돼 거짓말과 피의 색으로 물들었다. 다스와 상관없다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로 판결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월호 침몰에 늑장 대응해 유가족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했다.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선거에 나선 보수 쪽 후보들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며 감세와 재건축 규제 완화 등을 주장했다. 자유의 상징 색은 파란색인데, 국민의힘은 여전히 빨간색으로 위장하고 있다.

빨강은 탁해지면 그 선연함을 잃고 칙칙한 갈색이 된다. 이 빛바랜 색은 열정과 빛의 눈부심이 사라진 자리에 그 존재를 드러낸다. 독일의 색채이론가 하랄드 브렘에 따르면 갈색은 일반인에게 독재의 상징이었다. 나치 독재 시절 군인들은 갈색 군복을 입었고, 국가의 상징색 역시 갈색이었다. 탈색의 흔적인 갈색, 지금 우리 보수는 빨강이 아니라 갈색에 가깝다.

오명을 뒤집어 썼지만 빨강은 죄가 없다. 스페인 알타미라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 동굴에는 붉은색 들소 그림이 있다. 인류학자들은 구석기인들이 들소에게 붉은색을 칠함으로써 피나 체온을 전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해석한다. 여기서 빨강은 신성한 생명의 색이다. 살아있는 것들의 색인 빨강은 활력과 용기를 준다. 빨강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우유부단한 색도, 평범한 색도 아니다. 그러므로 보통과 무사안일은 빨강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갈색이 된 보수는 정직하게 색깔을 드러낼 때 진정한 보수정당이 될 수 있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고성욱 기자 

[이예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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