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정승현 기자

영국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오늘날 자유 선거, 표현의 자유 등 형식적 민주제도를 잘 갖춘 나라에서 대기업 등 자본권력이 정치를 장악해 다수 시민이 소외되는 현상을 '포스트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자본권력과 맞설 수 있는 정치세력을 만들지 못해 실질적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얘기다.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도 2차대전 이후 30여 년간 빠른 성장 속에 불평등 완화를 경험했던 미국 사회가 1980년 이후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에 빠진 것은 '대항적 세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정부의 뉴딜 정책 이후 반독점 규제, 노동권 보장 등으로 노조와 소상공인연합 등 대항적 세력이 성장했다면,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의 규제완화, 감세, 노동탄압 등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 대항적 세력이 쪼그라들었다는 얘기다.

<21세기 자본>을 쓴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등이 만든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World Inequality Database)에 따르면 미국의 소득상위 10%가 가져간 소득은 1970년 연간 전체 소득의 33%에서 2019년 45%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같은 기간 상위 1% 소득집중도는 10%에서 19%로 커졌다. 미국은 산업화한 나라 가운데 소득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로 꼽히는데,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다. 같은 자료에서 1996년 우리나라의 소득 상위 10%가 가져간 소득은 전체의 35%였는데, 2016년에는 43.4%로 늘었다. 상위 1% 소득층은 같은 기간 전체소득의 7.8%에서 12.2%로 집중도가 높아졌다. 한마디로 '소득의 상향이동'이 심각해졌다는 것이다.

미국처럼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 커진 것도 중산층과 저소득층을 대변할 시민단체나 노동조합 등 대항적 세력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탓이라고 볼 수 있다.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1989년 19.8%까지 올라갔던 노동조합 조직률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서 내리막길을 걸어, 2019년 현재 12.5%에 머물고 있다. 그 사이 비정규직이 급격히 늘면서 일자리 불안정성이 높아졌고, 노조가 없는 사업장이 많다 보니 임금 협상력은 뒷걸음질했다.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정부는 지나친 부채의존 투자로 '국가부도사태'를 부른 재벌을 개혁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으나, '빠른 위기극복'을 명분으로 신자유주의 체제를 본격화함으로써 호기를 날려버렸다. 이후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기업 경영의 목표'라는 주주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노동자를 ‘비용’으로만 보고 인건비를 줄이는 경영이 더욱 강조됐다.

▲ 전국요양서비스노동조합이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해고금지·고용안정보장·위험수당 월 10만원 보장 등을 요구하는 '3.25 요양노동자 하루멈춤 집단행동'을 하고 있다. 노조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대표적 대항세력이다. ⓒ 연합뉴스

자본권력에 맞설 대항적 세력의 쇠퇴는 정치 제도로 인해 가중됐다. 최다득표자 1명만 당선되는 소선거구제 때문에 지역 기반의 양당제가 공고해졌고,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할 소수정당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노동 존중 등 진보적 가치를 내세웠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재판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나고, 민주당 의원들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내용을 후퇴시키는 등 진의를 의심케 하는 행보가 이어졌다.

갈수록 커지는 불평등을 줄이려면 국민의 위임을 받은 의회와 정부가 자본에 포획되지 않도록 강력하게 견제할 대항적 세력을 키워야 한다. 그 첫걸음은 명실상부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거제도를 개혁해서 다양한 대안정당이 의회에 진출하게 하는 것이다. 지난해 총선에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다가 위성정당의 출현으로 거대 양당의 실질 의석이 오히려 늘었는데, 실패를 거울 삼아 제대로 된 연동형비례제표제를 실시해야 한다.

정치 뿐 아니라 기업 경영에도 대항적 세력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야 한다. 주주와 경영자 외에 노동자와 거래기업,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 경영목표가 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이사제 도입 등으로 노조의 경영참여를 보장할 필요가 있다. 노동조합 결성을 방해하는 등의 부당노동행위를 엄벌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부자가 더욱 부자가 되면서 정치를 돈으로 사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 경제력을 더더욱 독점하는 악순환을 끊으려면 대항적 세력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불평등을 줄이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다.


편집 : 조한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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