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카멜레존 ⑳ 제주 성산읍 ‘빛의 벙커’

1990년 4월 어느 날. 제주도 성산읍 성산일출봉에서 남서쪽으로 4km쯤 떨어진 해발 134m 대수산봉 서쪽 산자락에 흰색 콘크리트 건물 한 채가 들어섰다. 길이 100m, 폭 50m, 높이 10m의 길쭉하게 생긴 건물로, 외관만으로는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없다.

축구장 3분의 2 정도 크기의 직사각형 건물은 벽 두께가 3m에 이르고 두께 1.2m 천장 위에 1m의 빈 공간을 두고 그 위에 1m 두께 지붕을 올린 매우 특이한 구조다. 900평 정도 넓이에 높이 5.5m의 건물 내부에는 가로 세로 1m짜리 콘크리트 기둥 27개가 촘촘하게 늘어서서 건물을 떠받치고 있다. 높이 17m, 폭 10m의 공조타워를 만들어 기압차에 의한 자연 공기 순환 방식으로 돌려 실내 온도가 연중 16도(℃)를 유지하며 벌레나 해충이 없게 설계됐다. 전쟁이 벌어져 폭격을 당해도 장기간 끄떡없이 견딜 만큼 견고하게 지어진 건물이다.

▲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에 있는 ‘빛의 벙커’ 건물 구조. ⓒ 김은초

야산자락에 들어섰다 사라진 정체불명 건물

제주 동쪽 해안 평야에 나지막이 홀로 솟아 있는 야트막한 산자락에 세워진 이 건물은 지나는 주민들이 ‘무얼 짓는 거지’하고 궁금해할 즈음, 준공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좌우 양쪽의 두터운 철제 출입문만 남기고 건물 전체를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 시설이 땅 밑으로 자취를 감춘 것이다. 양쪽 출입문 앞에도 높이 3m가 넘는 콘크리트 방호벽을 세우고, 건물 부지 주위에 철책과 함께 나무를 빽빽하게 심고 군인들이 지키게 해 일반인에게는 출입금지구역이 됐다.

이렇게 사라졌던 건축물이 ‘빛의 전당’으로 돌아왔다. 준공과 함께 흙으로 파묻어 주민들조차 잊어버린 건물이 28년 만인 2018년 11월, 빛을 소재로 하는 미디어 아트 전시관 ‘빛의 벙커’(Bunker de Lumie’res)로 부활한 것이다.

▲ ‘빛의 벙커’로 들어가는 외부 출입문(위)과 출입구(아래). 철조망과 나무로 둘러싸인 울타리 가운데 있는 외부 출입문을 지나 50m쯤 들어가 왼쪽으로 꺾어들어가면 벙커 출입구가 나타난다. ⓒ 김은초

해저광케이블 관리센터에서 ‘빛의 벙커’로 부활

‘빛의 벙커’ 개관과 함께 원래 용도가 제대로 알려진 이 건축물은 KT 전신인 한국통신이 국가 기간 통신망의 하나로 한국과 일본, 한국 본토와 제주 사이에 구축한 해저광케이블을 관리하는 센터로 지어졌다. 전시에는 물론 평시에도 국가 통신망 시설은 1급 보안시설이어서 건설 과정은 물론 준공 이후에도 민간인 접근을 통제하던 곳이었다.

해저광케이블 관리센터가 1급 국가 보안시설로 분류돼 엄중한 보호를 받는 것은 해저광케이블이 전 세계 인터넷의 해외 연결 트래픽의 90% 이상을 담당하는 핵심 통신망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각국의 인터넷과 국제통화 등 해외통신은 대부분 해저광케이블망을 통해 이뤄지고 있으며, 인공위성을 통한 통신은 전체의 1%도 안 된다고 한다.

지금 전 세계 바다 밑에 깔려있는 해저케이블은 모두 130만km에 이르는데, 적도를 따라 지구를 32바퀴 도는 길이의 케이블이 해저에 부설돼 인터넷 등 통신을 연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17년 우리나라 KT를 비롯해 중국∙일본∙대만∙미국 등의 7개 회사가 설치한 ‘신 태평양 횡단 해저케이블’은 아시아와 북미 대륙을 잇는 1만4000km의 세계 최대규모 해저케이블이다.

우리나라 첫 해저케이블은 1980년 부산 송정해안에서 일본 하마다해안까지 부설한 153km 길이 한일 해저동축케이블로 지금도 양국간 통신에 사용된다. 1990년에는 최초로 해저광케이블망을 제주와 전남 고흥 사이 144km 구간에 부설했고, 이어 홍콩-일본-한국을 연결하는 4,570km를 완공했다. 이때 구축한 해저광케이블망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해저광케이블 관리센터였다.

지하벙커로 운영되던 이 센터는 2000년대 초 용도폐기로 방치돼 있다가 2012년 벙커 앞에 커피박물관 ‘바움’을 열고 싶어하던 이수찬 대표에게 불하됐다. 커피박물관 건물도 지하벙커와 함께 지어졌는데, 그동안 관리센터 사무실과 시설 경계병의 숙소로 사용됐다. 이 대표는 커피박물관을 개관하고 지하벙커도 단장을 한 뒤 2015년부터 제주평화축제2015, 하버드대 아카펠라 공연 등을 열었다. 또 작은 장터인 벨롱장, 영화 촬영과 시사회, 작은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공연과 전시를 했다.

문화공연전시장으로 활용돼 온 지하벙커는 2017년 문화기술기업 티모넷이 10년간 장기 임대했다. 티모넷은 프랑스 예술전시회사인 컬처스페이스와 합작해 벙커를 ‘아미엑스’ 전시관으로 개조한 뒤 2018년 11월 ‘빛의 벙커’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아미엑스’(AMIEX= Art & Music Immersive Experience)는 ‘예술음악의 몰입형 체험’이란 전시장르로 폐쇄된 광산이나 공장∙발전소 등의 공간에 프로젝션 맵핑 기술과 음향을 활용해 영상을 투사하는 미디어 아트의 일종이다. 100여 개 비디오 프로젝터가 빛을 투사해 공간의 벽면과 천장∙바닥에 이미지를 만들고 수십 개 스피커가 웅장한 음악을 들려주면서 관람객에게 몰입감과 감동을 준다.

▲ 벙커 출입구 맞은편 방호벽에 ‘빛의 벙커’ 간판과 ‘반 고흐전’을 알리는 대형 포스터가 그려져 있다. ⓒ 김은초

클림트전 이어 반 고흐 전시 중

‘빛의 벙커’를 운영하는 티모넷은 지난 2012년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폐채석장을 단장한 뒤 ‘빛의 채석장’을 열어 아미엑스 전시를 선보였다. 2018년 4월에는 183년 전 파리 11구에 세워졌던 주철공장을 새로 꾸며 ‘빛의 아틀리에’란 전시장을 열었고, 세 번째로 제주에 ‘빛의 벙커’를 연 것이다. ‘빛의 벙커’는 2018년 11월 개관 첫 전시작으로 황금빛 색채의 거장으로 불리는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작고 100주년을 기념해 클림트전을 열었다. 이어 2019년 12월 6일부터 지금까지 ‘반 고흐전’을 열고 있다.

제주공항에서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033-22번지 ‘빛의 벙커’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해 한 시간 남짓 차로 달리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주차장에서 내려서 보면 야트막한 야산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다. 주차장 한 켠에 철제울타리와 나무로 둘러싸인 곳에 출입구가 보이는데 50m쯤 걸어서 다시 오른쪽으로 꺾으면 벙커 입구가 나타난다. 육중한 철제문 안으로 들어서서 복도를 지나 출입문을 하나 더 통과하면 눈앞에 어둠과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 ‘빛의 벙커’ 안으로 들어서면 길이 60m쯤 되는 긴 벽면과 바닥에 프로젝션 맵핑 기술로 편집한 반 고흐의 작품이 길고 넓게 투사된다. ⓒ 김은초

프로젝션 맵핑 기술을 이용해 편집한 명화가 벙커 안에 설치된 90대의 프로젝트를 통해 사방의 벽면과 바닥에 투사되고, 사방에 설치된 69대 스피커에서 귓전을 울리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지하벙커라 외부의 빛이 완전 차단되고, 방음이 완벽한 공간이라 관람객이 영상과 음향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다. 이곳저곳에서 빛의 향연을 감상하는 관람객도 작품 속으로 빠져든다. 관람객의 몸에도 영상이 비쳐 재생되면서 작품 속 인물인지 관람객인지 경계가 모호해진다. 원작을 여러가지로 변형하고 일부에 동영상을 편집해 넣어 투사해주는 기법으로 온 벙커 안이 빛줄기를 따라 움직이고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원작을 보지 않고 벽면에 투사되는 영상만 보면 정확하게 어떤 작품인지 알 수 없는 영상이 많다. 이럴 때는 벙커 입구에서 왼쪽 긴 벽면을 따라 들어가면 중간쯤 벽면 반대편에 원작을 촬영한 이미지가 상영되는 공간이 나오는데 그 안에서 작품명과 간단한 해설을 보면서 감상할 수 있다. 여기서 원작을 본 뒤에 뒤쪽 긴 벽면에 투사되는 영상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원작 상영 공간에서 고흐의 1890년 작품 ‘붓꽃’이 상영되면 바로 뒤쪽 긴 벽면에 ‘붓꽃’을 편집해 재구성한 작품이 길게 투사된다.

고흐의 1888년 작품 ‘씨 뿌리는 사람’이 원작 상영 공간에 비치면 뒷 벽면이 온통 노랗게 변하면서 그 작품을 편집하고 재구성한 영상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작품을 알고 보려면 원작 상영 공간을 찾아 그곳에서 원작을 보면서 편집영상을 보는 게 좋은 방법이다.

▲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원작 영상(위)과 프로젝션 맵핑 기술로 재구성한 영상(아래). ⓒ 김은초

지금 상영 중인 고흐의 작품은 ‘프롤로그’와 ‘프로방스의 빛깔’ ‘초기작품’ ‘자연’ ‘파리에서’ ‘아를에서’ ‘올리브나무와 사이프러스’ ‘생래미 드 프로방스’ ‘오베르의 평원’ 등 8개의 시퀀스와 ‘에필로그’로 이뤄져 순서대로 상영된다. 전시의 도입부인 ‘프롤로그’에서는 고흐의 강렬한 표현력에 초점을 맞춰 짙은 컬러의 붓터치로 관람객들이 그의 통찰력 있는 시선을 보다 실감나게 느끼게 해준다. 첫 번째 시퀀스인 ‘프로방스의 빛깔’ 중 ‘씨 뿌리는 사람’이 상영되면 프로방스의 햇빛이 캔버스를 넘나들고 벙커의 벽과 바닥 전체를 빛으로 가득 채운다. ‘초기작품’에서는 북부 지방의 어둡고 우울한 색조를 통해 농민들의 가혹한 일상을 보여준다. ‘자연’으로 넘어가면 고흐가 자신의 후원자인 동생 테오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빈센트 빌럼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말년에 그린 작품인 ‘꽃 피는 아몬드나무’가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 고흐의 작품이 상영되고 있는 벙커 내부의 모습. 오른쪽이 길게 이어진 벽면이고, 왼쪽으로 검게 보이는 부분은 천장과 기둥이다. ⓒ 김은초

‘별이 빛나는 밤’ ‘수확’ ‘낮잠’ ‘석양의 버드나드’ ‘낟가리가 있는 밀밭’ ‘모자를 쓴 농부의 두상’ 등 50여 개 작품이 시퀀스별로 상영되고 나면 ‘에필로그’로 아몬드나무가 활짝 펼쳐진 한가운데 고흐의 자화상이 등장하면서 벙커를 빛으로 가득 채우며 전시가 끝난다.

▲ 원작 상영 공간에 투사된 원작 영상(왼쪽)과 재구성된 영상 이미지(오른쪽). 사진 위는 고흐의 ‘붓꽃’, 아래는 ‘씨 뿌리는 사람’이다. ⓒ 김은초

‘빛의 벙커’에는 ‘반 고흐전’과 함께 ‘폴 고갱전’도 열리고 있다. 반 고흐전이 한 바퀴 상영되고 나면 폴 고갱전이 상영된다. 고갱의 작품도 ‘커다란 나무’ ‘검은 돼지’ ‘백마’ ‘신비한 물’ ‘춤추는 브루다뉴의 소녀들’ 등 30여 개 원작이 상영되고 있다.

▲ 폴 고갱의 원작 영상(위)과 재구성한 영상(아래). ⓒ 김은초

두 작가의 작품이 돌아가면서 상영되니 느긋하게 한 자리에 앉아서 두 번 세 번 되풀이해 감상하는 것도 좋다. 보는 방향과 장소에 따라서도 영상이 달라 보이는 만큼 자리를 옮겨 다니면서 감상하면 그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빛의 벙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이어진 벽면을 따라 가면 중간쯤 벽면 반대쪽에 사방이 거울로 꾸며진 방이 있는데 여기도 들어가보자. 육안으로만 보면 거울에 희미하게 비친 자기 모습만 보이지만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 ‘빛의 벙커’를 광각으로 촬영한 모습. 오른쪽에 검게 나타난 부분은 천장과 기둥이다. ⓒ 김은초
▲ 작품 상영이 시작될 무렵의 벙커 내부 모습. 길게 이어진 벽면과 가운데 군데군데 기둥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 김은초

빛은 빛이 없을 때 가장 빛나고 자기 색깔을 완벽하게 드러낸다. 절대적 어둠 아래 최상의 빛을 만나는 시간을 가지면서, 한때는 빛의 속도로 사람들 간에 소식을 날라주던 해저광케이블 관리센터의 역사도 함께 생각해보자.

카멜레존(Chameleon+Zone)은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현대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춰 공간의 용도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제 밖에 나가서 여가시간을 보내거나 쇼핑을 할 때도 서비스나 물건 구매뿐 아니라 만들기 체험이나 티타임 등을 즐기려 한다. 카멜레존은 협업, 체험, 재생, 개방, 공유 등을 통해 본래의 공간 기능을 확장하고 전환한다. [맛있는 집 재밌는 곳]에 카멜레존을 신설한다. (편집자)

편집 : 강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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