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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미군 점령지를 산책하며 느껴보라
[맛있는 집 재밌는 곳] 카멜레존 ⑱ 부산시민공원
2020년 09월 16일 (수) 20:17:14 신지인 기자 jeein@naver.com

빼앗긴 땅이 돌아왔다. 누구나 마음대로 누리는 공원으로. 그런데 왜 하필 이름이 부산‘시민’공원일까? 부산광역시 진구 부전동(옛 범전리) 일대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1910년 일본 수중에 들어갔다가, 광복 후에는 미군 부대에 수용됐다. 뺏긴 땅은 100년만인 2010년 1월 시민들의 노력으로 되찾았고, 2014년 5월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시민’ 두 글자를 이름에 새겨 넣은 것은 다시는 이 땅을 남에게 뺏기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이다.

   
▲ 부산시 진구 부전동 ‘부산시민공원’ 조감도. ⓒ 부산시민공원 역사관
   
▲ 부산그린트러스트 이성근 상임이사가 지난 8월 24일 부산시민공원을 안내하면서 공원 추진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신지인

부산 지하철 1호선 양정역 5번 출구 백조아파트 정류장에서 179번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 지나 부산시민공원 정류장에서 내리면, 시원하게 트인 녹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무려 100년 동안 남의 땅이었던, 부산 사람들에게는 ‘하야리아 부대’로 더 잘 알려진 ‘부산시민공원’이다. 정류장에서 서쪽으로 100m쯤 걸어서 횡단보도를 건넌 뒤 북문으로 들어서면 가로수길이 나오고 ‘말굽거리’로 이어진다. 황토로 포장된 폭 15m, 길이 1,200m의 부드러운 곡선 형태 길이다.

   
▲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서면 경마장 트랙은 부산시민공원의 ‘말굽거리’로 보존되어 있다(위). 아래는 일제시대 서면경마장에서 경마와 기수가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 신지인, 부산시민공원 역사관

“말굽거리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길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서면경마장 트랙이었어요. 말들이 길을 따라 달리는 게 상상이 되지 않나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당시 길 너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경마 트랙입니다.”

시민 대표로 ‘하야리아시민공원추진 범시민운동본부’ 운영위원장을 맡아 미군 부지 반환부터 공원조성과정까지 참여했던 이성근 이사는 “이곳은 시민의 쉼터이면서 근대 부산 역사의 변천 과정이 그대로 녹아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 부산시민공원 안내도 위 이동 동선을 표시한 그림. 공원의 전체 면적은 473,911㎡이다. ⓒ 신지인

말(馬) 뛰던 길 따라, 말(言) 많던 곳 따라

북문에서 남서쪽으로 비스듬히 난 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부전천이 보이고 그 안쪽으로 둥그런 원통 모양 부산시민공원 역사관이 보인다. 이곳은 일본인들이 설치했던 경마장 마권발매소가 있던 자리다. 마권발매소는 당시로써는 드물게 콘크리트로 지어졌다. 일본인 자본가들이 각별히 공을 들인 건물이었다.

지금 역사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1949년 지어진 것으로 당시 서면경마장과 미군 부대 부속건물로 사용됐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주한미군 부산기지사령부 ‘캠프 하야리아’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미군 장교들의 식사와 연회, 부대 행사들이 열리는 장교클럽으로 변신했다. 미군 부대가 철수하고 부산시민공원이 개원하면서 이곳의 역사를 기록 전시해 놓은 공원역사관이 됐다. 공원역사관은 왼쪽에서 보면 직사각형 모양 통유리창 건물이고, 오른쪽에서 보면 원통 모양 콘크리트 건물이다. 내부로 들어서면 부산시민공원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펼쳐진다.

   
▲ 부산시민공원 역사관(위)과 미군 부대 주둔 당시 장교클럽으로 사용될 때의 모습(아래) © 신지인, 부산시민공원 역사관

일제가 경마장 짓고 확전되자 군사기지로   

부산시민공원 부지가 남의 땅이 된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조선의 토지를 강탈할 목적으로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전국적인 토지조사를 하면서 일본 자본가들로 하여금 이곳 범전리 일대 농지와 주거지를 사들이게 했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면서 이 일대 농지는 대부분 일본 자본가들 손에 들어 갔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경기가 호황을 이루자 일본인 재력가들로 구성된 부산경마구락부가 주축이 돼 이곳에 경마장을 지어 1931년 ‘서면경마장’이란 이름으로 개장했다.

일제는 경마장을 허가하면서 중산층의 유흥·위락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내심으로는 조선총독부의 세수확보와 전쟁대비 목적으로 경마장을 설립케 했다. 서면경마장은 신흥지역인 부산항 배후의 일본인 전용주거지역인 부산부를 구 상권인 동래 쪽으로 확장하는 효과도 노렸다. 

조선총독부는 1931년 ‘조선경마령’을 제정해 마권 수입의 5%를 세금으로 걷었다. 당시 서면경마장은 서울지역 경마장 다음으로 많은 수익을 냈다. 1935년 연간 36만원이던 마권 판매액이 4년 만에 4배 올라 1939년에는 116만원이 되었으니, 조선총독부가 얼마나 막대한 세수를 확보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마용 마필 관리는 전쟁용 군마 훈련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 일제가 범전리 일대에 경마장을 조성하기 전의 모습(위)과 경마장 설립 후의 모습. 부지 왼쪽에 경마용 트랙이 보인다(아래). © 부산시민공원 역사관
   
▲ 부산경마구락부 주도로 1931년 설립된 부산 서면경마장의 관람석과 경마 장면. ⓒ 부산시민공원 역사관

전쟁 분위기가 무르익자 일본은 서면경마장을 군사기지로 전환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곳에 일본군 기마부대를 설치하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서면경마장에 일본군 제72병참경비대를 설치했다. 1942년에는 임시군속훈련소를 설치해 조선인 대상 포로감시원을 모집해 조선인 포로감시원을 동남아 각지로 보내기도 했다. 일제가 이곳을 군사 거점으로 삼은 것은 부산항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과 산지가 많은 부산에서 보기 드물게 평지로 이뤄진 지형적 요건 때문이었다.

경마장으로 이용되는 동안 주민 피해도 막심했다. 경마장은 서면공립보통학교(지금 성지초등학교) 교실 바로 뒤편에 건립됐다. 그런데 학생과 부모들은 인근에 경마장이 생긴다는 사실을 개장할 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 경마대회가 흥행하면 할수록 당시 부모들 걱정도 늘었다. 경마대회 구경꾼들의 고함이 수업에 방해될 뿐 아니라, 일종의 도박인 마권 매매 광경이 어린아이들에게 그대로 노출됐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931년 1월에는 부모와 지역 유지들이 경상남도와 부산경마구락부 등에게 강력히 항의한 적도 있다.

   
▲ 1931년 1월 2일 <동아일보> 기사. “競馬塲在邇로 西面公普에妨害”라는 제목의 기사는 당시 서면경마장 인근 서면공립보통학교 학생 부모들이 풍기 문란을 이유로 당국에 항의하는 내용이다. ⓒ <동아일보>

또 다른 낯선 만남…미군 하야리아 부대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일제가 퇴각하면 우리에게 돌아올 줄 알았던 땅은 다른 주인을 만나게 된다. 일본군이 물러가면서 입국한 미98군정단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본국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이후 다시 들어왔다. 부산은 전국 각지에서 온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군수 물자를 보급하는 피난수도였다. 미군도 일제가 물러간 경마장 자리에 ‘캠프 하야리아’를 설치하고 미군의 후방지원기지 역할을 하게 했다.

   
▲ 2006년 8월 폐쇄가 결정된 하야리아 부대 입구의 모습. © 부산시민공원 역사관
   
▲ 하야리아 부대에서 사용되던 실제 초소를 보존해놓은 모습. ⓒ 신지인

꼬박 60년 동안 부산 사람들이 ‘하야리아’라고 부르는 미군 기지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야리아’는 인디언 말인데 ‘아름다운 초원(Hialeah)’이라는 뜻이다. 미군들은 서면 경마장에서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하야리아 경마장을 떠올렸고, 이를 본떠 부대 이름을 ‘캠프 하야리아’로 지었다. 영어 발음을 한글로 옮기면 ‘히얼리어’가 더 적절하지만 정확한 발음이 어려웠던 인근 주민들은 편의상 하야리아로 불렀고, 그것이 지금까지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야리아 부대 안팎에는 위락시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경마 트랙이 설치되면서 중단됐던 경마대회도 재개됐다. 1949년 가을, 한국마사회가 ‘추계경마대회’를 열자 하야리아 부대의 장교클럽은 임시 마권발매소로 활용됐다. 한국전쟁 중에는 경마대회를 잠시 멈추었다가 1956년 마권 발행을 재개했다. 주말이 되면 1,500여 명 도박꾼들이 모여들 정도로 경마장 운영이 성행했다.

   
▲ 부산시민공원 인근 마을. 언덕에 있어 이곳 주민들은 미군 주둔부터 공원 조성의 역사를 모두 지켜봤다. ⓒ 신지인

하야리아 부대가 인근 주민에게 미친 영향도 컸다. 도보 15분 거리에는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마을이 있다. 기억의 숲에서 만난 주민 정영임(76) 씨는 이곳에서 53년째 거주하며 미군 주둔부터 부대 폐쇄까지 모두 지켜봤다.

“부대 근처에 술집도 많고, 군복 입은 사람들 돌아다니니 편하진 않았지. 그래도 군대에서 파는 담배나 공구, 식료품 같은 물자들이 밖에서 팔리다 보니 서면 공구상가, 국제시장, 깡통시장이 생겨났어. 그런 세월이 있는데 부대 없어진다는 얘기 들으니 참 안 믿겼지”.

   
▲ 부산시민공원 역사관 내 하야리아 부대 사령관 집무실(위)과 주둔 초기에 병사들이 생활하던 텐트 막사 내부(아래)를 재현해놓은 모습. ⓒ 신지인

공원역사관에서 동쪽으로 오십 보쯤 걸어가면 이런 미군 부대 주둔의 역사가 숨어 있는 ‘기억의 기둥’이 있다. 성인 남성 키 다섯 길쯤 돼 보이는 나무 기둥 50여 개가 잔디밭 위 나란히 서 있다.

이성근 이사는 “하야리아 부대에 남아있던 나무 전봇대를 재활용해 만든 조형물”이라며 “태양광 전력을 이용해 밤에는 불이 켜진다”고 했다. 기억의 기둥 동쪽의 고샅길을 지나면 작가공방으로 쓰이는 ‘문화예술촌’이 보인다. 붉은 지붕으로 덮인 1층짜리 건물들이 단란하게 모여 있는 공간이다. 현재 판화, 금속, 섬유, 도자, 목공예 등의 작업이 이뤄지는 공방으로 사용된다. 이 이사는 이곳이 미군 하사관들 숙소로 사용된 건물이라고 설명했다.

   
▲ ‘기억의 기둥’은 하야리아 부대에 남아있던 나무 전봇대를 재활용해 만든 조형물이다. ⓒ 신지인

문화예술촌에서 갤러리 카페 방향으로 걸어 내려오면 ‘뽀로로 도서관’이 나온다. 마스크를 쓴 아이들이 뽀로로 조형물 앞에서 ‘브이’를 그리고,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들이 사진을 찍는 곳이다. 뽀로로 도서관은 미군 사병들이 머무는 퀀셋 막사를 리모델링한 것이다. 이 막사는 길쭉한 반원형으로 지어져, 지붕에 눈이 쌓이지 않는 등 장점이 많았다. ‘하야리아 잔디광장’의 북쪽으로 크게 반 바퀴 돌아 전포천 다리를 건너면 보이는 ‘다솜관’은 원래 미군 장교들이 머물던 관사였다. 1980년대 말 미국인 고등학교로 사용되던 건물을 헐고 리모델링해 지금은 세미나실과 편의시설로 활용된다.

   
▲ 어린이들을 위한 뽀로로 도서관은 하야리아 부대 내 사병 막사였던 반원형으로 생긴 퀀셋 막사를 이용해 만들었다. ⓒ 신지인

다솜관 터를 빠져나오면 ‘기억의 숲’이 보이는데 이성근 이사의 설명이 재미있다.

“이 숲에 있는 나무들은 원래 하야리아 부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플라타너스들이에요. 부대가 폐쇄되고 공원 조성 얘기가 오갈 때, 우선은 나무들을 한데 모아 놓고 나중에 옮겨 심자고 했어요. 그런데 모아 놓고 보니 예상 외로 울창하고 푸르렀던 거죠. 그래서 이렇게 ‘기억의 숲’이라는 이름으로 남겨두게 됐죠.”

   
▲ 1945년부터 2006년까지 주둔한 미군 하야리아 부대의 시설물 338개 중 23개가 부산시민공원에 보존되어 있다. ⓒ 신지인

이 외에도 하야리아 부대의 흔적은 부산시민공원 곳곳에 남아있다. 하야리아 부대에서 사용한 건물 338동 중 23동(6.8%)이 철거되지 않고 보존되고 있다. 시민공원 설계 단계에서 과거 청산을 위해 시설을 전부 철거하자는 주장도 나왔지만,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숲 속 북카페’로 이용되고 있는 사령관 관사, ‘시민 사랑채’로 운영되는 군사체육관, ‘흔적 광장’으로 탈바꿈한 당시 영화관, 감시초소 망루 5개 등이 남아 있다.

빼앗긴 땅은 절로 돌아오지 않는다

“일제에 이어 미군에게 넘어간 땅은 절로 돌아 오지는 않았어요. 도시 한가운데 군부대가 놓여있으니 도무지 도시가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죠. 그게 부지 반환 운동의 시작이었지요. 단체 이름은 바뀌었을지라도, 한 지역에서 한 목표를 갖고 시민들이 나서서 20년 넘게 지속한 운동은 유례를 찾기 힘들죠.” 

   
▲ 하야리아 부대 부지 반환부터 부산시민공원 조성은 시민들의 힘이 모여 이뤄진 결과였다. ⓒ 부산시민공원 역사관

이성근 이사는 “1988년 팀스피릿 군사훈련으로 부산에 미국의 전술 핵무기가 들어오자, 시민은 조직적으로 저항하며 미군기지 철거운동을 전개했다”고 설명했다. 1995년 3월에는 ‘우리 땅 하야리아 등 되찾기 시민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아메리칸센터, 하야리아 부대를 비롯해 55보급창, 유솜부지 등을 돌려받기 위해 민주주의민족통일부산연합 외 33개 단체가 모여 만든 단체다. 이들은 미국 영사관을 방문해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부지 반환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고, 주민을 대상으로 기지반환 서명 운동과 공청회를 실시했다.

하야리아 부대가 폐쇄된 것은 2006년 8월이지만, 시민들은 그보다 5개월 앞서 부지 활용 방안을 논의했다. 그해 3월 ‘공원 기본안 발주 시민 대토론회’를 열어 활용방안을 마련하고 부대 폐쇄 2년 만에 공원조성 기본 및 실시설계가 완료됐다.

   
▲ 부산시민공원에는 하야리아 잔디광장(위)과 '기억·문화·즐거움·자연·참여'라는 5가지 주제로 이뤄진 숲길(아래)이 펼쳐져 있다. ⓒ 신지인

부산시는 공원 설계작업에 착수해 미국 디자이너 제임스 코너의 설계안을 채택했다. 그 설계안은 '기억·문화·즐거움·자연·참여'라는 5가지 주제의 숲길을 주제로 한다. ‘부산시민공원’이라는 이름은 2011년 명칭선정위원회를 열어 확정했다. 총사업비 6,494억원을 들여 52만8,278㎡ 규모로 부산 도심에 마침내 공원이 조성됐다.

바라만 봐도 숨 막히던 이방인의 땅, 부전동 일대는 이제 부산시민의 숨통을 틔우는 공간이 됐다. 독일 문학자 발터 벤야민은 소설 주인공이 ‘산책’을 통해 이미지를 습득하고, 근대 생활방식과 경험을 투시한다고 했다. 부산시민공원은 일제 경마장으로 미국 군사기지로 100년간 빼앗겼던 땅 위에 생겨났다. 발길 닿는 곳마다 과거의 흔적과 이야기가 담겨있다. 부산시민공원의 ‘산책자’가 되어보면 함께할 수 있는 경험이다.


카멜레존(Chameleon+Zone)은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현대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춰 공간의 용도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제 밖에 나가서 여가시간을 보내거나 쇼핑을 할 때도 서비스나 물건 구매뿐 아니라 만들기 체험이나 티타임 등을 즐기려 한다. 카멜레존은 협업, 체험, 재생, 개방, 공유 등을 통해 본래의 공간 기능을 확장하고 전환한다. [맛있는 집 재밌는 곳]에 카멜레존을 신설한다. (편집자)

편집 : 김현균 기자

[신지인 기자]
단비뉴스 지역농촌부장 신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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