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카멜레존 ⑰ 서울 성북동 길상사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출출이: 뱁새, 마가리: 오두막집, 고조곤히: 소리없이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사랑

평북 정주 출신 시인 백석(白石•1912~1996)이 1937년 겨울에 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백석이 연인 자야(子夜•김영한)를 몇 달 만에 만나고 떠나는 길, 그녀에게 내민 편지 안에 담아 준 연시(戀詩)다.

시인 안도현은 <백석 평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첫눈이 내리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백석 이후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 교과서나 시집 또는 문학관 등에서도 잘 보기 힘든 백석의 시를 생각지도 못한 서울의 한 사찰에서 만났다.

▲ 서울 성북구 길상사(吉祥寺)에 있는 이 사찰 공덕주 길상화 보살 안내판에 씌어 있는 백석 시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김계범

시를, 그것도 연인을 사모하는 마음이 절절한 연시를 사찰에서 보게 되니 어딘가 어색했지만, 사실 절에서 시를 읽는 것만큼 어울리는 일도 없다. 시(詩)의 어원을 풀이하면 ‘말(言)의 사원(寺)’이기 때문이다. 시인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며 여름 끝자락 폭염을 피해 계곡물 흐르는 나무 옆 그늘 아래서 잠시 더위를 식히며 생각해 본다. 왜 서울 한가운데 있는 절에 시인과 연인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연시가 있는 걸까?

성북동은 평창동 한남동 등과 함께 서울에서 손꼽히는 부촌 가운데 하나다. 서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초록색 성북02번 마을버스를 타면 대로변을 지나 조용한 골목으로 접어든다. 비탈진 마을 일대에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고급 빌라와 저택이 즐비하고 대사관저 등이 들어서 있어 이국적인 느낌까지 든다. 이런 조용한 부자 동네 가운데 길을 따라 버스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이곳과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곳에 이른다. 전남 순천시 조계산에 있는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 말사(末寺)로 등록돼 있는 ‘길상사(吉祥寺)'다. 

▲ 길상사는 산사가 아니기에 경내임을 알리는 일주문이 없고 바로 웅장한 대문이 나타난다. ⓒ 김계범

순천 송광사 말사가 왜 서울에 있을까

서울 부촌 한가운데 사찰이 있는 것도 특이하지만 저 멀리 있는 송광사의 말사가 이곳에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절의 모양도 다른 사찰과는 다르다. 길상사 정류장에서 내려 절 앞으로 다가서면 보통 절 입구에 있는 일주문이 없고 한옥 저택의 솟을 대문이 눈앞에 나타난다. ‘삼각산 길상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사천왕상이 있는 천왕문도 없이 바로 종무소가 나타난다. 종무소 앞에는 ‘짧은 치마, 반바지를 입고 온 사람은 랩스커트를 착용하고 들어오라’는 안내문이 눈에 띈다.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유턴하듯 왼쪽으로 돌아서면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뒤로 본전인 극락전이 보인다. 대부분 사찰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 본전인데, 길상사에는 대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이 ‘ㄷ’자 형으로 지어져 있는 것도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사찰 내부도 가람보다는 수십년 된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화초들이 철 따라 꽃을 피워 절간보다는 고급 별장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이런 풍광 때문에 불교 신자들과 함께 일반인들도 발걸음을 많이 하는 곳이 이곳 길상사다.

▲ 길상사 극락전 전경(위)과 지장전 앞 연못에서 올려다본 극락전(아래). © 김계범

‘서울 3대 요정’ 대원각 시주로 길상사 창건

우리나라 사찰의 창건설화는 원효대사나 의상대사 등 고승의 일화를 곁들인 종교적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길상사 창건 과정은 그런 설화와는 사뭇 다르다. 길상사는 이곳에 있던 요정 대원각(大苑閣) 주인 김영한(金英漢) 보살이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요정 건물 40여 채와 부지 7천여평을 시주해 창건된 절이다. 새로 지은 절이 아니라 요정 건물을 시주받아 절로 고친 곳이라 가람의 모양이나 절 입구 등이 특이한 것이다.

대원각은 종로구 익선동 오진암과 성북동 삼청각과 함께 서울의 3대 요정 중 하나였다. 1953년 개업한 오진암은 1972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한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과 만나 7.4 남북공동성명을 논의하는 등 정치인들의 활동무대로 유명했다. 삼청각은 유신 치하인 1972년에 문을 열어 한일회담 남북조절위원회 만찬 등과 고위 정치인들의 회동장소로 이른바 요정정치의 주무대였고, 제3공화국 시절 수출 드라이브를 걸던 시기에는 기업들의 외국인 바이어 접대 장소로도 많이 활용됐다.

▲ 길상사 경내 숲속 곳곳에 있는 방갈로형 별채들. 대원각 요정으로 사용할 당시 소규모 고객들의 연회 장소였는데 지금은 스님들의 수행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 김계범

대원각은 주인 김영한(1916~1999) 보살이 마흔 살 무렵인 1955년 이곳에 있던 청암장이란 별장을 인수해 요정으로 개조해 문을 열었다. ‘자야’라는 아호로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진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집안 형편이 괜찮은 편이었는데, 금광을 한다는 친척의 사기행각에 휘말려 가세가 기울면서 16살에 조선 권번에 적을 두고 기생이 된다.

기명은 ‘진향(眞香)’으로 노자가 설파한 ‘진수무향’(眞水無香: 참된 물은 향기가 없다)에서 따왔다. 당시 가곡의 거장이던 하규일 선생의 지도 아래 전통 국악과 가무를 익혔다. 파인 김동환이 발행하던 잡지 <삼천리>에도 글을 쓰는 등 문학적 재능도 보였다.

김영한은 열아홉 되던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자 독립운동가인 신현모 선생의 후원으로 기생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시작했다. 유학간 지 1년 남짓 된 1936년 가을 신현모 선생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형무소에 수감되자 바로 귀국했다. 선생을 면회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불가능했던 김영한은 함흥 권번에 들어가 다시 기생이 된다. 큰 연회 등에 참석해 유력 인사들을 만나 특별 면회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민족주의자나 사상범의 경우 일절 면회가 불가능했던 당시 일제의 방침으로 김영한은 끝내 선생을 면회할 수 없었다. 그 무렵 운명처럼 백석을 만나게 된다.

기생 진향에서 신여성, 백석의 연인 자야로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 함흥관에서 있었던 영생고보 교사 송별회 자리에서 김영한은 당시 영생고보 영어교사 백석을 처음 만났다.

▲백석의 젊은 시절 모습과 노년의 자야 초상. © 김계범

백석은 김영한을 보자 대뜸 옆에 앉으라고 한 뒤 술을 따라 주면서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라며 덥석 손목을 잡았다. 이때 김영한은 22살, 백석은 26살이었다. 백석은 19살 때 <조선일보> 현상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돼 문단에 나왔고 <사슴>이란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었다. 그는 <조선일보>에서 3년간 일하다 그만두고 1936년 4월부터 함흥 영생고보로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 사랑을 나누던 백석은 어느 날 김영한이 사 들고 온 ‘당시선집(唐詩選集)’을 뒤적이다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자야오가’는 중국 동진 시절 자야라는 여인이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걱정하고 그리워하면서 다듬이질을 했다는 내용이다. 함흥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자야는 백석에게 ‘언젠가 사랑이 끝나도 마음의 준비가 돼 있으니 나는 염려하지 말고 성실한 가정을 꾸리라’고 하자 백석은 화를 벌컥 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어찌 그런 말을 내 앞에서 할 수 있단 말이오? 소위 동경 유학까지 마치고 십구세기 문명의 혜택을 입은 신여성으로서 시대감각의 반응이 대체 그렇게도 없소? 앞으론 내 앞에선 그 따위 문학소녀의 어리칙칙한 꿈 같은 이야기는 두 번 다시 하지 말아요. 우리 나아갈 길은 모두 나에게만 맡기고 우리 함께 영리하게 마음 편히 삽시다. 아무려면 이 넓은 천지에서 우리 둘만이 살아갈 길이 없을까?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편이란 게 있는 법이오!” 

하지만 두 사람의 이런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본가에서 연락이 와 백석은 자야를 두고 혼자 서울에 다녀왔다. 다녀와서 백석은 ‘부모님의 강권으로 맞선을 보고 결혼을 하게 됐다’고 했다. 백석이 “나는 색시 얼굴도 안 봤어”라며 안절부절 말하는 것을 보고 자야는 안심했다고 한다. 백석이 자야에게 처음으로 써 준 시 ‘바다’가 이 무렵 자야의 타는 마음을 따뜻하게 헤아려 주었다고 김영한은 뒷날 여러 번 이야기했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소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백석과 자야의 사랑은 여러 차례 곡절을 겪는 등 순탄치 못했다. 1938년에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했지만 백석의 앞길을 막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한 자야는 백석을 두고 혼자 서울로 내려왔다. 백석도 얼마 뒤 영생고보 교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내려와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다시 자야를 만나 청진동에 집을 얻어 살림을 한다. 이 와중에 백석은 부모의 강권으로 세 번이나 결혼하고 1939년 홀로 만주 신경으로 떠났고,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두 사람은 남북으로 나뉘어져 영영 만날 수 없게 됐다.

▲ 신록과 단풍이 어우러진 길상사 경내. © 김계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느냐”

백석은 자야와 헤어진 뒤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돌아와 살면서 다시 결혼해 자녀도 두고 살다가 1996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분단 이후 ‘재북시인’으로 분류돼 한동안 대한민국에서는 백석의 시를 읽지 못하다 1987년 해금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 됐다. 자야는 서울에 홀로 남아 대원각을 운영하며 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김영한은 매년 7월 1일 백석의 생일이 돌아오면 그날은 종일 끼니를 거르면서 연인을 향하는 애틋한 그리움을 나타냈다. 누군가 ‘백석이 가장 생각 날 때가 언제냐’고 묻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노년에는 사재 2억원을 기부해 ‘백석문학상’도 만들었다.

평생 백석을 그리며 살아온 김영한은 일흔 고개를 넘어갈 즈음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대학과 종교단체 등을 접촉했지만 여의치 않아 고민하던 터에 법정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를 읽고 법정스님을 찾아 갔다. 그 즈음 법정스님은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어록>을 읽고 크게 느낀 것이 있어 ‘무소유’에 빠져든다.

▲ 극락전 앞과 지장전 앞 연못에 아름답게 피어 있는 연꽃들. ‘무소유’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한다. ⓒ 김계범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런던 원탁회의 참석차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나는 가난한 탁발승으로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밥그릇 염소 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 않은 평판밖에 없다”고 한 말을 읽고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크게 반성했다는 것이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는 빈손으로 돌아가기 마련인데, 우리들은 무엇인가에 얽매여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관념이 우리 눈을 멀게 하며, 크게 버리는 사람이 크게 얻을 것’이라고 역설하는 법정스님에게 감명받아 대원각 건물과 부지 등 1천억원대에 이르는 재산을 기부하고 절로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김영한은 왜 전재산을 기부하려 하느냐는 질문에 “내 남루한 영혼을 속죄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무소유’에 감명, 천억 재산 내놓아 창건

김영한이 1987년부터 법정스님에게 매달리다시피 기부를 받아 달라고 했지만 법정은 법정대로 거기 또 얽매인다고 생각한 것인지 계속 거절했다. 8년여간 계속된 김영한의 간청 끝에 1995년 법정은 마침내 청을 받아 들여 대원각 본관에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극락전을 만들어 요정 대원각을 절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법정 자신이 승적을 두고 있던 전남 순천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했다가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날 길상사 개원 법회에서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부터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고 대중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 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그 후 “내가 죽거든 한 겨울 눈이 제일 많이 내린 날, 뼛가루를 길상사 마당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긴 김영한은 1999년 11월 13일 길상사 안에 있던 길상헌으로 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인 14일 법정스님에게 받은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 눈을 감았다. 

▲ 길상사 극락전 왼편 숲속에 있는 길상화 보살 공덕비와 사당. ⓒ 김계범

그는 세상을 떠나기 열흘 전, ‘천억을 내놓고 후회하지 않느냐’는 이생진 시인의 물음에 “천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라고 답했다. 자야는 큰 재산보다 자신과 백석의 사랑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랐던 건 아닐까? 시인 백석을 사랑하고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자기 마음이 잊히지 않고 오래오래 기억되길 바랐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수십년 세속의 영욕과 탐욕과 티끌이 쌓였던 요정 대원각은 한 여인의 영겁의 사랑을 염원하는 무소유의 도량으로 거듭난 것이다.

성모 마리아상을 닮은 관음보살상

불교 신자들 못지않게 도시의 고단한 삶에 지친 많은 이들이 찾아와 심신을 달래고 힐링하는 공간이 된 길상사에 들르면 반드시 가볼 곳이 있다. 먼저 법정스님 진영각이다. 

 
▲ 법정 스님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진영각(위)과 법정스님의 유골을 뿌려 모신 곳(아래). ⓒ 김계범 

본전인 극락전을 지나 절 경내 가장 높은 곳까지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그마한 암자 같은 건물이 나타난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것을 버리라’는 뜻의 무소유를 역설해온 법정 스님의 작은 유물관이다.

법정 스님의 진영과 생전 쓰던 찻잔을 비롯한 다기들과 <무소유> <산에는 꽃이 피네> <홀로 사는 즐거움> 등 책과 면도기, 밀짚모자 등이 전시돼있다. 법정 스님이 남긴 두 장의 유언장 가운데 상좌 스님들에게 남긴 유언장도 눈에 띈다. ‘덕진은 머리맡에 남아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 

진영각 밖으로는 법정 스님의 의자가 놓여있다. 올해는 법정스님의 입적 10주기가 되는 해다. 의자 옆에는 스님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남긴 방명록이 있다. 그냥 가기 아쉬워 방명록에 한 구절 적고 자리를 옮겼다. 진영각 오른쪽 담벼락 밑에는 법정스님의 유골 일부를 뿌린 곳이 있다. 

▲ 길상사 진영각 툇마루 옆에는 법정스님이 생전에 사용하던 작은 의자가 있다. © 김계범

절 경내에 들어설 때나 나갈 때 볼 수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얼핏 성모 마리아상 같다. 자세히 보면 관세음보살상인데 법정스님의 발원에 따라 천주교 신자인 서울미대 최종태 교수가 조각한 작품이다. 왼손에는 맑은 물이 담긴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데, 목이 긴 관음보살의 정병이 아니라 조선시대 초기 분청사기 편병처럼 납작한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관음보살이 병을 들고 있다기보다 가슴에 품듯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이 특징이다. 오른손은 중생에게 ‘무외(無畏)’를 베풀어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우환과 고난을 해소해주면서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바닥을 펴든 ‘시무외인(施無畏印)’인데, 이 조각상이 불상임을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는 부분이라고 한다.         

▲ 길상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관세음보살상. © 김계범

기나긴 장마가 끝나자 폭염이 시작되는 듯하더니 바로 선선해지면서 가을이 오는 듯하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비우고 싶다면 자야와 백석, 법정 스님을 떠올리며 길상사를 거닐어 보자.  

▲ 경내에 보라색 도라지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 김계범

카멜레존(Chameleon+Zone)은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현대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춰 공간의 용도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제 밖에 나가서 여가시간을 보내거나 쇼핑을 할 때도 서비스나 물건 구매뿐 아니라 만들기 체험이나 티타임 등을 즐기려 한다. 카멜레존은 협업, 체험, 재생, 개방, 공유 등을 통해 본래의 공간 기능을 확장하고 전환한다. [맛있는 집 재밌는 곳]에 카멜레존을 신설한다. (편집자)

                                                 편집 : 이예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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