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카멜레존 ⑲ 강화도 조양방직

한낮의 강화터미널은 “힘들어서 어디 나가질 못해”라며 푸념하는 친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어딘가 한산하고 풀이 죽어 있는 듯하다. 리모델링한 승강장만 시끌벅적할 뿐 주변 상가는 적막하다. 그냥 틀어 놓은 슈퍼마켓의 텔레비전에서 트롯 노래소리만 조그맣게 들릴 뿐이다.

▲ 인천 강화읍 중앙로에 있는 강화터미널 근처는 평일에도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 한산해 보인다. © 조한주

70년 전으로 돌아가는 타임머신, 카페 ‘조양방직’

서울 지하철 9호선 김포공항역에서 김포골드라인으로 갈아타고 구래역에서 내려 800번 버스로 한 시간이 채 안 돼 닿는 강화터미널의 평일 인상은 늘 그렇다. 터미널을 빠져나오면 보도블록도 새로 바꾸고 곳곳에 관광안내판도 새로 만들어 붙여 놓았지만 적막감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 적막함은 스마트폰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카페 ‘조양방직’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사라진다.

20분 정도 걸어 조양방직에 이르면 파란 하늘 아래 알록달록 패션을 갖추고 오가는 사람들이 있어 잠자던 도회가 깨어난 것 같은 활기가 넘친다. 정지돼 있던 흑백영화 화면이 총천연색으로 재생되는 것처럼 분위기가 확 바뀐다. 일본의 도리이를 연상시키는 높다란 쇠기둥 두 개 위에 가로로 걸쳐 놓은 철판에 ‘조양방직’이라 새겨 놓은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묘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현대인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들은 70년 전인 1950년대 모습이다.

▲ 강화읍 신문리에 있는 조양방직 카페의 외관. ⓒ 조한주
▲ 조양방직 대문과 건물 벽의 담쟁이 넝쿨. 문 하나를 경계로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 조한주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품고 있기라도 하듯 길게 금간 회색 시멘트 벽 위를 담쟁이덩굴이 뒤덮고 있다. 고작 대문 하나, 얇은 양철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7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 넘는 듯 시간의 단층이 눈앞에 뚝 떨어진다. 울타리 안의 풍광과 소품들은 1950년대 분위기인데, 그 앞을 지나거나 앉아 차를 마시는 연인들이나 가족 친구 들은 2020년 늦여름을 지나고 있다. 간혹 카페 분위기에 맞춰 ‘개화기’식이나 1970년대 복고풍으로 입고 온 사람도 눈에 띈다.

 
카페 조양방직 실내로 들어서면 복고 느낌이 물씬 나는 소품 수십 개가 진열돼 있다. 벽에는 오래된 포스터나 잡지가 걸려있고, 지붕의 트러스 구조물 사이에는 왜 올라가 있는지 모를 오래된 바퀴나 자전거 핸들 등이 보인다. 사진으로는 아무렇게나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가보면 거슬림 없는 구도로 적절히 잘 배치돼 있다. ⓒ 조한주

카페 안으로 들어서 느긋하게 시간을 느끼면서 걷는데 60대로 보이는 부부가 잰 걸음으로 스쳐 지나가며 하는 말이 들린다. “야! 이 물건들 모두 참 오랜만이네.” 이삼십대 젊은이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생소한 잡지와 간판, 세발자전거가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물건인 듯하다. 군데군데 커피 등 음료를 마실 수 있게 꾸며 놓은 카페 내부는 언뜻 초라하고 낡아 보이지만, 자리에 앉아 이곳의 연원을 생각하면 카페 안이 강화도의 근대사로 꽉 채워진다.

▲ 부서진 시멘트 벽 사이로 오래된 거울이 보인다. 벽 안으로 보이는 내부도 음료를 가지고 들어가 마실 수 있도록 의자를 놓아두었다. ⓒ 조한주

화문석 명산지에서 방직산업 메카로

강화도 특산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화문석이다. 화문석은 물들인 왕골을 손으로 덧 겹쳐 엮어 짠 꽃돗자리다. 왕골의 줄기 섬유조직은 매끄럽고 윤택이 나는데 다 자라면 누른 빛으로 변한다. 거둬들인 왕골은 줄기에 찬이슬을 맞혀가며 사나흘 동안 바짝 말린다. 겉껍질을 염색하는 데는 회색, 검은색, 붉은색, 누른색, 진황색, 자색, 남색, 녹두색, 반물 등 아홉 가지 물감을 쓴다. 다른 지방에서도 만들었지만 강화도 화문석은 그중에서도 최상등품으로 꼽혔다. 그만큼 왕골을 짜는 솜씨가 뛰어났다는 뜻인데 이런 전통이 강화도를 우리 방직산업의 메카로 만든 건 아닐까 상상해본다.

▲ 1232년 천도 이후 대몽항쟁기 39년 동안 고려의 수도였던 강화도. 강화도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한 왕실과 관료를 위해 왕골 돗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 강화도령화문석

강화도는 일제시대부터 직물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해 1970년대까지 방직산업이 번성했던 곳이다. 1916년 강화직물조합이 설치됐고, 그때부터 전국에서 알아주는 부자 동네였다. 수공업 형태였던 강화의 직물산업은 강화도에서 최초로 신식 기계를 도입한 조양방직이 들어서며 근대적 기틀을 갖추기 시작한다.

조양방직은 1933년 일제강점기에 강화도 대지주였던 홍재묵·재용 형제가 12만5천원의 민족자본으로 설립한 방직공장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60억원 정도 되는 자본금으로 출발했다. 초기에는 면방직과 마방직을 했고, 나중에는 주로 여름용 옷감으로 많이 쓰이는 마직물을 염색하는 데 치중했다. 카페 근처 안내문에는 조양방직이 국내 최초 방직공장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내용이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방직공장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세워진 조선방직이다. 2년 뒤인 1919년에 조선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것이 경성방직이다.

▲ 조양방직 종업원들을 공장으로 출퇴근시키던 통근버스. 이 안에서 음료를 마실 수 있게 꾸며 놨다. ⓒ 조한주

조양방직이 생기면서 강화도에 전기와 전화 시설도 들어왔다. 이후 평화직물, 심도직물, 이화직물 공장들이 잇달아 들어섰다. 직물공업 활성화로 1950년대 들어서면서 직물공장 수는 급격하게 늘어나 30여개에 이르렀다. 6.25 이후 생활필수품 수요가 폭증하면서 직물수요도 급증했고 강화도는 당시 섬유산업의 메카라고 하던 대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번성해 1970년대 초반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직물생산지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강화도의 구도심 거리는 하루 두 번 직물공장 교대시간에 맞춰 공장으로 출퇴근하는 푸릇푸릇한 복장의 여성 근로자들로 거리가 넘쳤다.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 형편에 중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여성들이 강화 방직공장에서 2교대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와 남자 형제의 학비 등을 책임졌다. 그때 그 어린 여성 근로자들이 섬유에서 실을 뽑고 천을 짜내는 방직에서 염색까지 다 맡아 일하면서 우리 수출의 선도역인 섬유산업의 기틀을 다졌다. 강화도에는 크고 작은 직물공장이 60여 곳 있었고 방직산업 종사자만 4천이 넘었다.

천주교 ‘노동운동’ 첫 사건, 심도직물 노사분규

강화도는 직물산업의 메카가 되면서 한편으로 노사분규가 잦아지면서 가톨릭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국회의원 김재소가 운영하는 심도직물이 4일 섬유노조 심도직물 분회장을 근무 태만으로 해임하자 노조원 350명이 구성당 구내에 모여 해임 경위를 듣고 있었다. 경찰관 20여명이 이들을 불법 집회로 몰아 주모자 4명을 연행해갔는데 회사측에서 제시한 4명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그리하여 주모자 배후에 전(田) 신부(JOC 강화본당 지도)가 있다는 구실을 잡아 7일 열시쯤 주일미사를 드리고 있는 전 신부에게 김재소 의원, 경찰서장, 정보계장, 기자 2명이 몰려갔다. …그날 오후 4시 심도직물은 ‘천주교 전미카엘 신부의 부당한 간섭으로 공장운영 관리가 마비되었으므로 무기휴업함’이라는 쪽지를 굳게 닫힌 정문에 붙여놓았다.’(1968. 1. 21 <가톨릭시보> 3면 기사 중에서)

▲ 옛 강화읍 심도직물 거리. 멀리 우뚝 선 심도직물의 굴뚝이 보인다. ⓒ 강화군청

당시 강화도에서 가장 잘나가던 방직업체였던 심도직물은 1,200여 종업원 중 4분의 3이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었다. 심도직물에서 일하던 소녀들은 노동 관련 기본권은커녕 인권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에서 끊임없이 기침을 하면서 일해야 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강화성당의 전 미카엘 신부가 1965년 11월 심도직물 여성 종업원들을 모아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만들었고, 1967년 5월 14일에는 300명이 참여하는 심도직물노조가 결성됐다.

회사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노조 활동을 방해했고, 1968년 1월 노동자 16명을 해고했다. 해고자는 모두 천주교 신자였고 김 사장과 직물협의회 임원들은 전 신부를 찾아가 노조활동에 간섭한다고 항의하며 함께 반공법으로 구속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강화도 내 21개 직물회사들은 전 신부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중앙일간지에 발표했다.

▲ 1968년 1월 21일자 <가톨릭시보> 3면. ‘노동조건 개선 운동 - 비위에 거슬린다고 전 신부에 협박’이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 <가톨릭신문>

당시 JOC 총재이던 김수환 추기경(당시 신부)은 주교단 명의로 ‘교회는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심도직물 사주 김재소 공화당 의원은 이에 맞서겠다고 공언하고, 신민당 김은하 의원은 ‘진실규명을 위해 자료 수집에 착수하겠다’는 등 정치권의 문제로 비화했다.

천주교 측은 심도직물 사건을 천주교 박해 행위로 규정하며 공개 사과를 요구했고, 강화직물협의회는 1월 22일 해명서를 제출하며 JOC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철회하고 해고 노동자 대부분을 복직시켰다. 김 추기경이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에 개입해 주교단 공동교서를 발표한 것은 한국 교회의 첫 ‘사회적 발언’으로 기록돼 있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보다 1년 앞서 벌어진 한국노동운동사의 큰 사건이었다.

1970년대 대구로 주도권 넘겨주고 쇠락

이런 빛과 그늘을 함께하면서 발전해온 강화도 직물산업은 1970년 중반에 사양길로 접어든다. 1960년대 후반부터 좁은 내수시장에서 과다경쟁 조짐을 보이던 상황에서 1973년 석유파동 이후 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쇠퇴기에 이르게 된다.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화학섬유공장이 들어서고 나일론 등 인조직물이 대량생산되면서 강화도 직물공장들은 대부분 문을 닫고 가내수공업만 일부 명맥을 잇고 있다.

강화도 최초의 근대식 방직공장 조양방직은 강화도 직물산업이 쇠락하기 훨씬 전 문을 닫았다. 조양방직은 다른 직물업체보다 단명했는데, 복잡한 자본구조도 문제였지만 사업 초기 발생한 화재가 치명타였다. 설립 10여년 뒤 경영이 어려워져 다른 사람에게 경영권이 넘어가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 오다 1958년 문을 닫았다. 이후 단무지 공장, 젓갈 공장을 거치며 폐허가 됐다.

▲ 조양방직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거대한 금고 건물. 원래 사무동 안에 있었는데 화재로 대부분 전소되고 금고만 남았다. 전성기에는 이 금고에 돈과 금을 가득 쌓아 놓고 지게로 돈을 날랐다고 한다. ⓒ 조한주
▲ 카페 내부에는 좌우로 긴 커피테이블이 있다. 이는 방직기계용 작업대를 재활용한 것이다. 푸른색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빛과 식물, 소품들이 한데 어우러져 복고풍이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 ⓒ 조한주

트러스 천장과 벽체 등은 60년 전 그대로

조양방직이 다시 문을 연 것은 폐업 60주년이 되던 2017년이었다. 고미술을 전공하고 골동품사업을 하던 이용철 사장이 폐허나 다름없던 조양방직 건물 지붕에 반해 터를 사들였다. 이 사장은 조양방직 공장 천장의 아름다운 트러스 구조가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 강화 조양방직 카페 본관 입구로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다. ⓒ 조한주

옛 모습 그대로에 현대 감각을 더하기로 한 그는 회색 시멘트벽과 천장 트러스 구조 등은 모두 남기고, 공장 안을 그동안 모아온 골동품과 새로 구입한 소품들로 채웠다. 조양방직 공장 터에 방치돼 있던 길다란 방직기계용 작업대를 실내로 들여 커피테이블로 만들고, 고객들이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즐길 수 있도록 1970년대부터 80년대 무렵의 게임기기도 비치했다. 이 게임기들은 주말에는 카페를 찾은 어린이 손님들의 전유물이 된다.

▲ 트러스 구조는 금속이나 나무로 된 여러 개 직선 부재를 삼각형이나 오각형으로 조립한 구조를 말한다. 파리 에펠탑이나 서울 한강철교가 트러스 구조를 사용했다. 조양방직 건물 역시 트러스 구조의 톱니 모양 지붕을 갖고 있다. ⓒ 조한주
 
카페에 온 사람들은 음료와 디저트를 즐기는 건 물론이고 갖가지 소품과 놀이기구로 꾸민 갤러리도 관람한다. 곳곳에 놓여있는 놀이기구는 아이들을 지겹지 않게 한다. ⓒ 조한주

조양방직 카페에서 특유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 푸른 유리창이다. 햇살이 톱니모양 지붕 푸른 유리를 지나며 자칫 우울할 수 있는 회색 시멘트 내부에 묘한 생기를 불어넣는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강화도에서 청년들의 최고 유명 관광지가 지붕 덕을 보고 있다는 게 역설적이다. 

산업시대 공장이라고 하면 보통 톱니모양 지붕을 떠올린다. 가파른 경사가 반복돼 일정한 리듬을 느끼게 해주는 이 지붕은 19세기 후반 전등에 사용되는 전력을 절약하기 위해 영국에서 고안됐다. 영국의 기술자 겸 건축가 윌리엄 페어베언이 1827년 톱니모양 지붕을 처음 설계했다. 당시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공장은 전력 절약을 위해 이 지붕을 채택했다.

톱니모양 지붕은 비스듬히 경사진 면은 빛을 통과시키지 않는 지붕으로 씌우고 수직으로 된 부분에만 유리를 끼웠는데 이런 구조가 직사광선의 빛과 열을 차단하고 넓은 면적에 자연광을 고르게 퍼뜨린다. 인공조명이 보편화하면서 톱니모양 지붕을 쓴 건물은 줄어들거나 없어졌지만 21세기 들어 환경 보호와 태양광 발전판 설치 등에 용이하다는 점 때문에 이 지붕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 조양방직 안에는 옛 미싱 기계들을 활용한 커피테이블 등 방직산업과 관련된 물건들이 곳곳에 놓여있다. ⓒ 조한주
▲ 조양방직 카페를 겉에서 보면 톱날이나 상어 이빨같이 연속된 경사면을 볼 수 있다. 조양방직 로고도 이 건물을 단순화한 모양이다. ⓒ 조한주

가을 햇살이 깊어지고 하늘이 높아지는 요즘, 강화도 조양방직 카페를 찾아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숨겨진 강화도의 근대사를 한번 알아보는 건 어떨까? 이왕이면 어린이들도 함께 데려가 현장 학습을 겸한 ‘박물관’ 참관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카멜레존(Chameleon+Zone)은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현대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춰 공간의 용도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제 밖에 나가서 여가시간을 보내거나 쇼핑을 할 때도 서비스나 물건 구매뿐 아니라 만들기 체험이나 티타임 등을 즐기려 한다. 카멜레존은 협업, 체험, 재생, 개방, 공유 등을 통해 본래의 공간 기능을 확장하고 전환한다. [맛있는 집 재밌는 곳]에 카멜레존을 신설한다. (편집자)

편집 :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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