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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나를 검증하는 ‘신분증’ 속의 나
[글케치북] 사진
2020년 05월 29일 (금) 19:50:27 오동욱 PD odw0201@nate.com
   
▲ 오동욱 PD

지난달 총선 투표장에서 선거사무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본인 맞아요?” 그런 말을 투표장에서도 들을 줄이야. 당혹감에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본인이 맞냐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라고 말하려던 찰나, 나에게 되돌려준 신분증 속에 하얀 피부, 날렵한 얼굴선, 동그란 눈을 한 사진이 보였다. 그는 그렇게 말할 만했다. 그 속엔 18살 내 모습이 있었다. 나는 12년 동안 입에 달던 말을 거기서도 꺼냈다. “이거 바꿔야 하는데...”

2008년, 우리 고등학교에선 주민등록증 만들기가 숙제였다. 담임은 성인으로서 나를 ‘대표’할 것이니까 사진 잘 찍어오라고 말했다. 물론 남학생들이 그 숙제를 해올 리 없었다. 그 숙제가 성적에 반영된다는 압박도 없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이 지나도 숙제를 해오는 학생이 없었다. 선생님은 어르기도 하고 혼내기도 했다. 심지어 “꼴통들”이라며 매를 들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 왜 그랬냐고? 이유는 없었다. 그냥 까먹었다.

   
▲ 어디로 가는지 묻는 질문에 담임은 "사진 찍으러 간다"고 했다. ⓒ Unsplash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학생들이 다 모이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우리를 밖으로 끌고 갔다. 학교에서 나와 십분 정도 걷자, 한 녀석이 어디 가는지 물었다. 담임이 말했다. “사진 찍으러 간다.” 그는 말 안 듣는 ‘꼴통’들을 데리고 이화여대 앞 사진 가게로 향했다.

조그마한 가게 입구에는 ‘뽀샵(포토샵) 가능’이라 적혀 있었다. 가게 계단에는 일본식 진한 화장을 한 사람 사진도 붙어있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계단에 줄 세우고 한 명씩 집어넣었다. 한 명씩 나올 때마다 선생님 손에 들린 증명사진이 늘었다. 마지막 녀석까지 사진을 찍고 나자 그가 사진을 돌렸다. 턱을 깎고, 눈을 키우고, 얼굴을 하얗게 만든 사진. 아, 그 가게는 뽀샵 ‘가능’이 아니라 뽀샵 ‘전문’이었다. 우리는 매우 흡족했다. 다음 날, 우리는 모두 주민등록 신청을 마쳤다.

우리가 그 신분증의 단점을 알게 된 것은 일 년이 넘어서였다. 수능에는 신분증이 필요했다. 1교시가 시작되고 신분증을 검사했다. 감독은 얼굴과 신분증과 원서 사진을 계속 확인했다. 그리고 1교시가 끝났다. 우리는 모두 신분증 때문에 감독실에 불려갔다. 졸업 후로도 친구들은 종종 신분증 이야기를 꺼냈다. 일찍 군대에 간다던 녀석은 신체검사 일화를 들려줬고, 놀기 좋아하는 녀석은 신분증 때문에 술집에서 거부당한 이야기를 늘어놨다. 재미있었지만, 불편하다는 걸 우리 모두 알게 됐다.

대학에 가서 친구들은 하나둘 신분증을 바꾸기 시작했다. 현실과 맞지 않는 사진이 나를 대표한답시고 신분증에 있으니 불편함을 이기지 못해서였다. 어떤 녀석은 주민등록증은 어디엔가 처박아 관심을 끄고, 아예 운전면허증을 신분증으로 들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교 학생증을 만들 때가 되자 운전면허증으로는 변통이 안 됐다. 그 친구도 결국 신분증을 바꿨다. 다행히 우리 대학교는 우편으로 학생증을 보내주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일인이었다.

투표장에서 오늘 당한 창피는 그 때문에 발생했다. 나는 황급히 지갑 속에 있는 운전면허증을 내밀었다. 운전면허증은 정상이다. 다행히 투표용지를 받고 투표했다.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고 나가려는데 선거사무원이 한마디 던졌다. “시간 괜찮으시면 아래 사무실에서 주민등록증 새로 뽑고 가세요. 신분증이 좀 그래요.” 맞다. 좀 그렇다. 명색이 나를 대표하는 건데 현실과 다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나를 대표하는 게 바뀌었다.


편집 : 김은초 기자

[오동욱 PD]
단비뉴스 미디어콘텐츠부, 전략기획팀 오동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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