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불패] 제28회 대산농촌문화상 시상식

“농업에 희망이 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전쟁에 승산이 있냐고 물으면, 장군은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만 싸우냐고 반문합니다. 농업도 희망을 만들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농민을 ‘동지’로 여긴다는 농업연구사가 말했다. 대산농촌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안철근 경상남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사는 새로운 씨앗을 만들고 거두며 하루를 연다. 반평생을 파프리카 연구에 매달려 국산 종자 ‘라온’을 키워냈다. 그는 “길고 지루한 연구 길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농민 덕분”이라며 “오늘도 동지와 길을 나선다”고 말했다.

▲ 제28회 대산농촌문화상 농업공직부문 수상자 안철근 경상남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사는 육종 연구를 지지해준 농민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 대산농촌재단

대산농촌재단(이사장 진영채)은 23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제28회 대산농촌문화상 시상식을 열었다. 대산농촌문화상은 농업과 농촌의 가치를 드높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인사에게 수여하는 농업계 최고 권위의 상이다. 교보생명 창립자 대산 신용호 선생의 뜻으로 1991년 제정되어 2019년까지 28년간 124명(단체 포함)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번 시상식에서는 △ 농업경영 부문 권혁기(56) 농업회사법인 왕산종묘 대표 △ 농촌발전 부문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회장 안희문) △ 농업공직 부문 안철근(48) 경상남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사가 부문별 수상자로 선정됐다. 농업경영∙농업발전 수상자에게는 각각 상금 5천만원, 농업공직 수상자에게는 2천만원이 부상으로 수여됐다.

▲ 제28회 대산농촌문화상 시상식에서 (오른쪽부터) 진영채 대산농촌재단 이사장, 권혁기 왕산종묘 대표, 안희문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장, 안철근 경상남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사, 박은우 심사위원장(전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장)이 기념 촬영했다. ⓒ 대산농촌재단

대한민국에 건강한 ‘씨감자’를 뿌리다 

“대한민국 씨감자, 부족하지 않은 씨감자, 소비자들이 정말 좋아하는 감자. 정말 멋지게 한번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농업경영 부문 수상자인 권혁기 왕산종묘 대표는 1981년부터 39년간 감자 종묘사업에 매진해왔다. 세계 4대 작물 중 하나인 감자가 대한민국 식량안보에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그는 2011년 농업회사법인을 설립해 우량 씨감자를 생산하고 공급해왔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시행하던 감자 보급종 생산·공급이 일부 지자체·민간에 이양됐는데 정부 보급종(수미)은 30% 수요 충당에 그쳤다. 파종할 씨감자가 부족한 탓에 재배 농가들은 구매 부담이 컸다. 보급종이 아닌 씨감자를 사도 부담은 마찬가지다. 불량률이 높거나 식용감자가 씨감자로 둔갑하는 등 농민 피해가 잇따랐다. 왕산종묘는 정부 보급종 생산과 같은 시스템을 구축해 안정적으로 씨감자를 공급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왕산종묘는 강릉시 왕산면의 해발고도 700~800m 고산지대에서 망실재배로 무병 씨감자를 생산한다. 기후 특성상 씨감자를 생산하는 데 최적지다. 봄, 가을, 겨울 작형을 각각 개발해 우수한 씨감자를 연중 공급했다. 그 결과, 전국 씨감자 생산량의 약 10%(1200t, 2018년 기준)를 차지하게 됐다. 지역 특성을 활용해 겨울철 무가온 시설 재배 기술과 씨감자 저장 큐어링 기술을 개발해 감자 생산 농가의 소득 증대와 경영 안정화에 기여했다.

▲ 왕산종묘는 강릉시 왕산면 해발고도 700~800m에서 무병 씨감자를 생산한다. ⓒ 대산농촌재단

‘수미’는 미국에서 들어와 1978년 국내 보급종으로 선정됐다. 재배면적의 약 90%를 점유하고 있다. 권혁기 대표는 ‘수미’ 퇴화에 대비해 2005년 육종을 시작했다. 단오, 백작, 왕산 등 국산 신품종을 개발했다. 특히 ‘단오’는 수량성, 병에 견디는 내병성, 굵기 정도를 뜻하는 상서율 등이 ‘수미’보다 뛰어나 재배면적이 확대되고 있다. 한마디로 “튼튼한 감자”라서 단오만 달라고 하는 농가도 있다. 권 대표는 보급종 5종 외에 농촌진흥청 고령지농업연구소가 개발한 품종 중 컬러감자인 ‘자영’ 등 13종의 씨감자를 공급해 농가와 소비자의 선택 폭을 넓혔다.

‘뿌리’인 농민과 ‘꽃님’인 소비자를 위한 생명농업

“우리 농민들이 도시민의 건강한 먹거리를 걱정하고 도시민이 농촌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세상, 농촌과 도시가 함께 상생하는 생명공동체 문화를 이루는 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농촌발전 부문 수상자로는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가 선정됐다. 안희문 안동교구연합회장은 수상소감에서 생명농업과 도농교류의 가치를 강조했다. 회원들은 도시 소비자를 ‘꽃님’으로 부르고, 자신을 ‘뿌리’라고 말한다. 농업, 농촌, 농민의 가치를 꽃피우는 사람은 소비자이고, 소비자의 건강한 삶을 지탱하는 뿌리가 농민이라는 뜻이다. 안 회장은 ‘생명 살리는 농업과 도농이 함께 건강한 식탁을 차리는 공동체를 지향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가톨릭농민회는 1966년 창립된 농민운동단체로, ‘농산물가격보장운동’ 등을 전개하며 한국의 농민운동에 기여해왔다. 안동교구연합회는 78년 세워져 42년간 도농 교류와 건강한 먹거리 생산에 힘써왔다. 마을주민을 중심으로 모임을 구성해 친환경 농업을 장려하고, 상향식 의사결정 문화를 바탕으로 생산계획과 출하기준 확립, 공동방제력 등의 합리적 생산체계를 세웠다.

▲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는 '생명농업'으로 얻은 농산물을 서울 공공급식시설에 공급한다. ⓒ 대산농촌재단

자연의 순환 원리에 맞는 ‘생명농업’을 지향하고, 도시민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친환경 학교급식, 공공급식, 로컬푸드 같은 사업을 벌인다. 올해부터 서울시 도농상생 공공급식 산지센터로 선정돼 서울 송파구에 농축산물을 공급한다. 도농상생 공공급식사업은 서울시 자치구와 산지 지자체를 1대1로 연결해 산지의 신선한 농산물을 어린이집, 복지시설 같은 공공급식시설에 공급하는 사업을 말한다.

▲ 제28회 대산농촌문화상 농촌발전 부문 수상자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시상식에 참석한 회원들이 단체 사진을 찍었다. ⓒ 대산농촌재단

파프리카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파프리카 박사’

“저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국가직 농업연구사로 발령받고, 근무 희망지를 잘못 써 경남으로 발령받았는데 마침 경남에서 수출농업에 올인하던 때였습니다. 그 해는 파프리카를 처음 우리나라에서 재배해 일본으로 수출하던 해입니다. ‘파프리카’라는 작물에 운명처럼 몰두하게 됐고, 25년간 파프리카만 연구해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파프리카 말고는 모르는 게 없다고 하는데 파프리카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농업공직 부문 수상자는 안철근 경상남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사는 기존 파프리카보다 작고 당도가 높으며 우리나라에서 재배하기 쉬운 미니파프리카 품종 13종을 개발했다. 특히 품종 ‘라온’은 종자 가격이 수입품보다 싸 농민 부담을 덜어주고, 수량과 저장성이 뛰어나 기존 미니 파프리카 시장의 70% 이상을 국산으로 바꿔냈다.

네덜란드 종자회사가 종자 시장을 주도하는 상태에서 우리나라 파프리카 시장은 대부분 수입 종자에 의존했고, 국내에는 파프리카 기술이 전혀 없었다. 특히 같은 무게를 놓고 비교할 때, 파프리카 종자는 금보다 비쌀 정도여서 파프리카 농민의 어려움이 컸다. 네덜란드와 우리나라는 기후와 재배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안 연구사는 해외 기술을 한국형으로 바꾸는 연구부터 시작했다. 95년부터 시작한 파프리카 연구는 10년의 노력 끝에 ‘라온’이라는 신품종 개발로 결실을 맺었다. ‘라온’은 순우리말로 즐겁다는 뜻인데, 소비자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하고, 농민은 소득이 늘어 즐겁다는 의미다.

미니 파프리카는 글로벌 기업이 도전하지 않던 분야이고, 작으면서도 당도가 높아 상품 가치가 높다. 안 연구사가 개발한 라온은 품질, 저장성, 기후적합성이 수입산보다 우수하다. 라온은 국내시장을 70% 가까이 차지하며 급속히 성장했고, 일본 수출을 비롯해 멕시코, 중국 등의 국제농업회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 안철근 농업연구사가 개발한 미니 파프리카 품종 '라온'은 기존 파프리카보다 당도가 높다. ⓒ 대산농촌재단

손잡고 농업의 희망을 만든다

대산농촌문화상 시상식은 농업과 농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다. 올해 잦은 태풍과 농산물 가격 폭락, 최근 아프리카돼지열병 사태까지 농민 개인이 극복하기 어려운 피해들이 많았다. 이런 때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대산농촌재단은 28년간 농민이 농민으로 살아갈 힘을 보태는 데 앞장서 왔다.

대산농촌문화상은 개인 업적만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 성과가 농업・농촌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가, 농민의 삶을 얼마나 나아지게 했는가를 따져본다. 대산농촌재단은 농민, 연구자, 학자 각 부문 전문가들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한다. 3명으로 이뤄진 심사위원회가 서면심사와 합동심사, 현지실사 3단계를 진행한다. 이후 본심사위원회가 각 부문 심사위원회의 결과를 면밀히 검토해 수상자를 선정한다.

시상식에 참석한 연천 푸르내마을 김선기 운영위원장은 “같이 농사짓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칭찬해주는 자리가 있는 건 참 좋은 일”이라며 “농촌체험마을 사업에도 관심 갖고 지원을 보태주는 곳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푸르내마을은 8년째 재단과 인연을 맺고 ‘가족사랑 농촌체험’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도시민에게는 농업농촌의 공익적 가치를 공유하고, 농민에게는 농외소득과 더불어 자부심을 얻는 기회가 되고 있다. 푸르내마을은 재단 지원 덕분에 체험마을 운영 부담을 덜었다. 마을을 찾아오는 개인 역시30% 정도 비용만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이날 건배사는 중앙대 농업경제학 교수직을 조기 퇴임해 4년전 농부가 된 윤석원 씨가 했다. 그는 고향 양양으로 귀농해 바다가 보이는 산비탈에 농막을 지어놓고 친환경 농법으로 미니사과 ‘알프스 오토메’를 재배한다. 그는 “올해 냉해가 들어 미니사과를 하나도 수확하지 못했는데 농민들은 어쩌나”라며 “농촌 현실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안 좋은데 여기에 희망을 얻으러 온다”고 말했다.

수확의 계절에 열린 시상식은 바리톤 박경준 씨의 열창,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을 들으며 만찬으로 이어졌다. ‘농촌에 희망이 없다’고들 하지만 희망을 만들어가는 이들의 열정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닐까? 손을 내미는 이들이 있고 내민 손을 맞잡는 이들이 있는 한 농업은 희망을 약속하는 ‘오래된 미래’다.

▲ 농업경영 부문 수상자 권혁기 왕산종묘 대표가 새싹을 두 손으로 받쳐든 상패를 들고 있다. ⓒ 대산농촌재단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 강좌의 산물입니다. 대산농촌재단과 연계된 이 강좌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의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편집 : 박동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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