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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상상사전] ‘왕소군의 봄’
2019년 04월 10일 (수) 13:08:16 김유경 기자 nanchohyanggi@gmail.com
   
▲ 김유경 기자

따사로운 봄 햇살은 왜 그녀의 마음에 가 닿지 못했을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왕소군의 사연에서 유래했다. 그녀는 전한(前漢) 황제의 후궁이었다. 한나라는 흉노의 침입을 막고자 화친정책을 폈고 그 대가로 왕소군을 흉노왕에게 시집보냈다. 후세 시인 동방규는 그녀가 고국을 그리워했을 심정을 추측해 시를 썼다. 그녀는 그 시의 화자처럼 정말 애달프고 처연한 심사였을까?

변방의 춥고 척박한 땅에서 외로이 흐느꼈을 수는 있다. 고국에서 황제를 기쁘게 해주는 구실을 하며 구중궁궐 한 켠에서 하염없이 대기하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폐쇄된 곳을 나와 새로운 환경에 뛰어들게 되어 설렜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호의호식해 비대한 중국 황제보다 호방한 기풍에 탄탄한 근육질의 흉노왕이 더 맘에 들었을 수도 있다. 문명국 출신이라는 프리미엄까지 붙어 더 귀한 대접을 받지 않았을까?

시인은 왕소군의 실재에 가 닿지 못했다. 그녀는 시인에게 시적 흥취를 돋우는 대상물에 불과했다. 아름답고 가녀린 여성이 애상감에 젖은 모습은 고전 시가에서 반복되는 이미지다. 시인이 전래의 시풍을 답습했든, 당대 사람들의 여성관을 반영했든, 구태의연한 사고는 예술적 성취를 저해한다. 그뿐 아니라 사회 발전을 더디게 한다. 왕소군이 실제로 불행했을지라도, 시인은 그녀의 슬픔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대신 장식으로 갖다 쓰는 데 그쳤다. 피상적 해석으로는 한 사람이 자기 인생에 대한 결정권 없이 성적으로 유린당하는 상황의 부당함을 감지하지 못한다. 잘못된 관행이 쉽사리 바뀌지 않는 이유다.

   
▲ ‘봄이 왔다’는 객관적 사실에도 ‘봄 같지가 않다’고 주관적 소회를 풀어놓은 왕소군. 그녀는 정말 애달프고 처연한 심사였을까? ⓒ pixabay

자기편의적 사고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버젓이 나타난다. 강동수의 소설 <언더 더 씨>에 나온 표현이다.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앞니를 박아 넣으면 입안으로 흘러들던 새큼하고 달콤한 즙액.’ 세월호 참사 전 여고생이 자두를 먹던 때를 떠올리는 부분이다. 과일을 먹으며 자기 신체 부위의 감촉을 느끼는 일이 가능할까? 더구나 죽음을 앞둔 극한의 순간에. ‘여고생’한테서 야릇한 상상을 떠올리는 건 타인의 시선에서나 가능하다. 세월호 피해 학생은 작가의 선의나 정의감을 드러내기 위한 처량한 대상으로 쓰일 뿐이다. 동등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은 결여돼 있다.

관성적 사고는 여성에 관한 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요즘 청년들은 나약하고 자기밖에 모른다, 노인들은 괴팍하고 비합리적이다, 부자들은 탐욕스럽고 제멋대로다, 난민들은 거지 근성에 청결하지 못하다 등의 선입견이 존재한다. 실제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집단 안에 각양각색의 사람이 있을 텐데, 각자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전형성의 굴레에 가두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말들이 많은 매체를 통해 오가지만 진정한 소통이나 교감과는 더 멀어지고 있다. 어떤 ‘뭉치들’을 쉽게 규정하고 편견을 덧씌우면 누군가에게 부당한 피해를 입힐 수 있으며 새로운 문제의식이 싹트기도 어렵다. 자기 사고의 폭 확장이나 사회 발전, 역사의 진보도 한 사람을 목적으로서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오수진 기자

[김유경 기자]
단비뉴스 환경부, 기획탐사팀 김유경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고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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