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 ㉚ 금관문화2
신라 천년수도 경주로 가보자. 사적16호 월성(月城)이 맞아준다. 5대 파사이사금이 101년 쌓았다니 800년 넘게 신라의 왕성이었다. 파사이사금의 증조할아버지가 신라 시조 박혁거세, 할아버지는 2대 남해차차웅, 아버지가 3대 유리이사금이다. 박씨 왕조 계보에 고모부인 4대 탈해이사금이 끼어든다. 석(昔)씨 시조인 탈해이사금 때 월성 옆 작은 숲 계림(鷄林)의 전설이 피어오른다. 김(金)씨 시조인 김알지가 갓난아기 상태로 금궤에 담겨 나뭇가지에 걸린 채 발견된 것이다. 이때 흰 닭이 크게 울어 닭(鷄)의 숲(林)이라는 ‘계림’ 이름이 붙었다. 탈해이사금 역시 알로 상자에 넣어져 아진포(경주시 양남면)에 표류해 왔으니, 이질적인 3세력(박,석,김 3 성씨)의 대립과 공조 속에 신라역사가 빚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김씨를 주목해 보자. 박씨와 석씨가 주고받던 임금 자리에 13대 미추이사금(재위 262년-284년)이 김씨 최초로 오른다. 이어 17대 내물이사금(재위 356년-402년)부터 52대 효공왕(재위 897년-912년)까지 500년 넘게 김씨가 왕위를 독점한다. 김씨 성은 김알지가 ‘금궤’에서 나와 생겼으니 금과 관련된다. 김알지의 계림은 닭, 즉 새가 운 곳이다. 금과 새, 여기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사슴뿔과 나뭇가지. 이 4개의 모티프(motif)를 갖고 신라 금관과 기마민족 금관의 연관성을 따져본다.
일본 후지노키 고분 금동관의 새
일본의 역사고도 나라(奈良)현으로 가보자. 고구려 담징이 벽화를 그린 것으로 잘못 알려진 호류사(法隆寺)의 목탑(금당)을 보고 정문으로 나와 오른쪽 방향으로 꺾는다. 3백여m 가면 언뜻 부여나 공주, 경주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한 봉분이 눈에 들어온다. 후지노키(藤ノ木)고분이다. 지름 48m, 높이 9m로 제법 크다. 옆으로 굴을 파고 돌을 잘라 쌓으며 방을 만든 횡혈식 석실묘(橫穴式石室墓, 굴식 돌방묘)다. 1985년 7월 내부로 들어가니 길이 235cm, 너비 126cm, 높이 154cm의 큼직한 석관이 나왔다. 3년 준비 끝에 1988년 7월 석관에 지름 8mm의 구멍을 뚫고, 내시경을 넣어 내부를 살핀 뒤 뚜껑을 열었다.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고구려에서 시작돼 한반도 전역으로 퍼졌던 금동신, 마구(馬具), 구슬을 비롯한 1500여점의 부장품이 쏟아졌다. 그중 하나가 금동관이다.
후지노키 고분 유물은 오사카와 나라 중간지점에 자리한 카시하라(橿原) 고고학자료관으로 고스란히 옮겨졌다. 달려가 보니 유물과 함께 정밀 복제품을 전시해 놨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금동관은 밑에 원형의 테, 대륜(臺輪)이 있고, 그 위로 커다란 두 그루의 나무를 세움 장식으로 붙였다. 구리로 만든 뒤, 금을 입힌 도금(淘金)으로 신라나 가야와 같은 초화형(草花型)이다. 더 놀라운 것은 무성하게 뻗친 나뭇가지에 신라 금관에서 나타나는 동그란 달개를 무수히 달고, 그 위에 여러 마리의 새를 앉힌 거다. 신라 서봉총 금관 나뭇가지에 앉은 봉황과 판박이다. 무덤이 551년-571년 조성된 것으로 밝혀져 5세기에서 6세기 초로 추정되는 신라 서봉총 금관보다는 약간 후대다.
내몽골 초원 선비족 금관의 사슴뿔과 새
신라 금관과 일본 금동관의 새를 머리에 담고 중국 북경의 천안문광장에 있는 국가박물관으로 가보자. 1949년 장개석 정부가 당시까지 출토된 많은 유물을 갖고 대륙에서 대만으로 갔지만, 이후 출토된 주요 유물들은 이곳에 시대별로 잘 정리돼 있다. 한족뿐 아니라 주변 기마민족 유물도 전시돼 탐방객을 맞는다. 한나라가 무너진 뒤, 위진남북조 시대(221년-589년) 황하 유역의 한족 중심부를 장악했던 선비족 유물이 눈길을 끈다. 선비족은 몽골초원과 북만주에서 성장해 북중국을 장악한 기마민족이다. 선비족이 내몽골에서도 북쪽 지역인 포두(包頭)시 서하자촌 무덤에 남긴 2개의 관모 금장식은 놀랍게도 사슴머리다. 뿔만 넣은 신라 금관과 달리 사슴얼굴과 나뭇가지처럼 생긴 뿔을 같이 표현했다. 사슴 얼굴에는 에메랄드 보석을 박고, 뿔 형상의 나뭇가지에 잎사귀 형태 달개를 여럿 달았다. 나뭇가지 초화형(草花型)인 점과 사슴뿔 모티프가 신라 금관과 겹친다.
선비족의 터전이던 내몽골로 직접 가보자. 중국 내몽골자치구의 주도인 호화호특(呼和浩特) 내몽골박물원은 몽골초원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중국 한족과 교류하거나 전쟁을 치렀던 기마민족들의 유물이 다수 소장돼 있다. 훈족(흉노족)과 훈족이 물러난 자리 등장한 선비족의 다양한 유물을 만날 수 있는 장소다. 북만주보다 훨씬 북쪽 내몽골 통료(通遼)시에서 출토한 선비족 금관 장식에 눈길이 고정된다. 아쉽게도 실물이 아닌 사진이지만, 탐방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유는 관모 꼭대기의 큼직한 새 장식 때문이다. 봉황 금장식이라는 안내문구에서 보듯 신라 서봉총 금관의 봉황 모티프 그대로다.
신라 ‘마립간’과 선비족 ‘카간’ 호칭, 금관의 공통점
무대를 황남대총과 천마총이 자리한 경주 대릉원으로 옮겨보자. 대릉원을 비롯해 경주에서 출토된 금관 6개의 제작시점은 5세기-6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신라 지배자의 호칭이 무엇이었는지 따져보자. 신라 초대 박혁거세는 ‘거서간’, 2대 남해는 ‘차차웅’, 3대 유리부터는 ‘이사금’으로 불렸다. 이후 4번째 호칭이 마립간(麻立干)인데 언제부터 쓰였는지 기록에 약간 차이가 보인다. 1145년 김부식이 대표 집필한 현존 국내 최고(最古) 역사책 <삼국사기>는 19대 눌지마립간(재위 417년-458년), 20대 자비마립간(재위 458년-479년), 21대 소지마립간(재위 479년-500년), 22대 지증마립간(재위 500년-514년) 4명이라고 적는다. 지증마립간이 호칭을 중국식 왕(王)으로 바꾼 이후 왕 호칭이 굳어진다. 하지만, 일연이 1281년 쓴 것으로 추정되는 <삼국유사>는 17대 내물마립간(재위 356년-402년, 이후 김씨 세습왕조), 18대 실성마립간(재위 402년-417년)의 2명을 더 붙여, 마립간 호칭을 6명으로 기록한다.
여기서 2가지를 짚고 넘어가자. 먼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어느 기록을 따르든 금관 출토 시기가 마립간 시기와 겹친다는 점이다. 금관은 마립간 시기 유물인 거다. 둘째, 마립간 호칭의 기원이 금관의 기원과도 연계된다는 점이다. ‘마립간’의 ‘간(干)’은 몽골초원 기마민족의 지도자 호칭인 ‘칸(汗, Khan)’과 상통한다. 징기스칸(위대한 칸)에서 보듯 ‘칸’ 호칭은 언제 처음 사용됐는지 궁금해진다. B.C3세기 이후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몽골초원 기마민족 훈(흉노)의 지도자는 ‘선우(單于)’로 불렸다. 흉노가 지리멸렬 흩어진 뒤, 몽골 초원을 장악한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의 3대 군주 태무제(太武帝, 재위 423~452) 제문(祭文)에 ‘카간(可寒)’이라는 호칭이 처음 나온다. 이후 ‘칸’이 유라시아 기마민족 사회 지도자 호칭으로 자리 잡는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마립간 호칭을 처음 사용했다는 눌지마립간(재위 417년-458년)은 선비족 북위의 태무제(423년-452년)와 재위기간이 일치한다. 신라 마립간과 선비족 카간 시기 군주호칭, 사슴뿔과 새 모티프 금관 장식의 일치는 금관의 기원을 추정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로 모자라지 않다.
기마민족의 상징 훈(흉노)족의 새 장식 금관
호화호특 내몽골박물원으로 다시 가보자. 선비족의 봉황 금장식을 사진으로만 봐야했던 아쉬움을 한 번에 날려버릴 멋진 금관이 탐방객을 기다린다. 사진으로 본 통료 출토 선비족 봉황 금장식과 닮은꼴인 금관이 찬란하게 빛난다. 눈이 번쩍 뜨인다. 새의 머리 부분을 옥으로 만든 금관은 뛰어난 조형미와 예술성을 선보인다. 내몽골에서도 기마민족 활동의 중심지로 알려진 악이다사(鄂尔多斯, 오르도스)에서 출토된 이 금관도 선비족이 만든 것일까?
시기가 훨씬 앞선다. 전국시대 (B.C403년-B.C221년). 그러니까, B.C4세기-B.C3세기다. 아직 선비족이 등장하기 전이다. 선비족에 앞서 B.C3-3세기 600여년 몽골초원에서 활약했던 훈족(흉노족) 금관으로 추정된다. 새를 모티프로 하는 기마민족의 금관 제작 풍습이 훈족에서 선비족으로 전파됐음을 보여준다. 말을 타고 이동해 활동반경이 넓은 기마민족의 특성상 선비족이 동시대 신라로 진입하거나 교류했다는 가설이 비합리적일 가능성은 낮다. 서쪽으로 훈족은 멀리 서유럽까지 진출해 로마제국의 멸망을 초래했고, 선비족 역시 중앙아시아 접경까지 진출한 상황에서 동쪽으로 지척인 신라와 접촉했을 가능성은 무척 높다. 가야무덤에서 다수 출토되는 선비족 유물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 대목은 다음기회에 자세히 다룬다. 모용(慕容)씨 선비족이 고구려와 갈등하며 전쟁을 치른 것과 달리 훗날 탁발(拓拔)씨 선비족이 세운 북위가 5세기 신라의 후견국 고구려와 친교를 맺으며 교류한 점도 신라와 선비족 접촉 가능성을 높여준다.
금관 만들던 훈족, 로마침공해 금 배상금 받아
호화호특 내몽골박물원에는 훈족의 금관 유물을 하나 더 전시 중이다. 오르도스에서 북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오란찰포(烏蘭察布)에서 출토됐다. 나뭇가지와 나뭇잎, 꽃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비취 같은 보석을 박은 아름다운 금관이다. 한나라(서한, B.C206년-8년) 시기 금관으로 훈족이 만들었다. 초화형(草花型)금관이라는 점에서 신라 금관과 맥이 통한다. 형태는 비록 저 멀리 에게해 연안 그리스 금관과 비슷하지만 말이다. 이 부분은 다음호에 자세히 다룬다. 흔히 훈족을 중국 변방에서 무력으로 중국을 침략하던 변방국가로 여긴다. 하지만, 훈족이 남긴 세련된 황금유물과 금관은 금을 보석으로 취급하지 않던 중국문명과 차별화되는 훈족의 빼어난 공예문화 수준을 보여준다.
한족과의 대결에서 밀려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이동한 훈족이 4-5세기 흑해 주변에 남긴 금관의 일부를 흑해 연안 우크라이나 수도 키에프의 라브라박물관에서 접하며 느끼는 놀라움은 자못 크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기마민족의 광활한 활동 범위에 말이다. 훈족의 제국을 동유럽에 세웠던 아틸라는 5세기 로마제국을 유린한 뒤 강화조약에서 막대한 금을 배상금으로 받고 군대를 물렸다. 금을 소중히 여기던 기마민족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금을 중시하고 새와 초화 모티프의 금관을 만들던 훈족의 풍속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중앙아시아 사카족 관모 사슴과 새 금장식
무대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옮겨보자. 오랜 세월 카자흐스탄의 정치경제중심지였던 알마티 동쪽 49km 지점에 이식 쿠르간(Issyk kurgan)이 자리한다. 봉분이란 뜻의 쿠르간(kurgan)이란 말에 어울리게 현장에 가면 마치 신라의 경주 대릉원이나 백제의 부여 능산리와 공주 송산리, 가야의 고령이나 합천에 온 것처럼 큼직한 봉분이 집단을 이룬다. 낯선 땅에서 낯익은 무덤 풍경에 흥분된 감정으로 이식 쿠르간 박물관으로 들어가면 더욱 놀란다. 아키셰프를 단장으로 한 소련 고고학팀이 1969년 이곳 쿠르간에서 발굴한 4천여 점의 금유물이 찬란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비록 대부분 복제품이란 것을 알고 난 뒤에는 다소 허탈해지지만... 진품은 거의 수도 아스타나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 중이다. 이식 쿠르간박물관과 아스타나박물관을 수놓는 황금유물은 무덤에 묻힌 인물의 모자와 옷을 아름답게 꾸며주던 장식품이다. 온몸을 금으로 뒤덮은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고고학자들은 무덤 속 피장자를 ‘황금인간’이라고 부른다.
이식쿠르간 황금인간 장식 유물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머리에 쓰던 관모 금장식이다. 뾰족한 고깔형 모자 앞면에 사슴뿔과 새날개가 달린 상상의 동물이 등장한다. 그리스 신화 속 상상의 동물 그리핀을 닮았다. 모자 뒷면에는 장대에 새가 앉은 솟대 형태의 황금장식을 붙였다. 사슴뿔에 새 날개, 솟대 형태의 새는 신라의 금관, 선비족 관모 금장식, 훈족 금관에 일관되게 쓰이던 모티프다. B.C4-B.C3세기로 추정되는 이 유물의 주인공은 사카(Saka)족이다. 중국에서는 색(塞)이라 부른다. 흑해연안에서 출발한 기마민족 스키타이가 중앙아시아로 이동해 현지화한 민족을 가리킨다. 훈족에게 황금문화를 전수한 장본인이 스키타이라는 통설을 유물로 확인하는 계기다.
스키타이 혹은 월지와 마한의 사슴뿔 관
장소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 에르미타쥬 박물관으로 옮겨보자. 구소련 시절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몽골초원에서 출토한 귀중한 초원의 유물을 간직한 명소다. 중국, 몽골, 카자흐스탄, 러시아에 걸친 알타이 산맥의 러시아쪽 땅 알타이 공화국 유물은 우리에게 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어가 알타이 어족에 속하기 때문이다. 알타이 산맥에서 쓰던 말이 우리민족 터전으로 전파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되새기며 알타이 공화국 파지리크(Pazyryk) 유적 발굴의 전후사정을 살펴보자. 1929년 소련의 그랴즈노프팀이 해발 1,650m의 파지리크강 계곡에서 거대한 적석목곽분을 찾아낸다. 신라의 적석목곽분과 같은 형태다. 이 부분은 별도의 소재에서 다룬다. 1947년 역시 소련의 루덴코팀이 4기를 추가로 밝혀내는 등 모두 6기의 거대 봉분형 적석목곽분을 발굴한다. 이 가운데 5호 쿠르간(고분)에서 출토한 B.C5-B.C4세기 카펫이 에르미타쥬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카펫에 그리스 문명 켄타우로스(반인반마, 半人半馬)처럼 하반신은 말이요 상반신은 사람으로 등에 날개를 단 신성한 인물이 나온다. 특기할 점은 반인반마 인물의 머리에 쓴 커다란 사슴뿔 관이다. 사슴뿔 관을 쓴 인물 맞은편에는 역시 사슴뿔 관을 쓴 새가 그려졌다. 사슴뿔 관과 새를 모티프로 카펫을 만든 주인공은 흑해연안에서 이동해 온 스키타이라는 설과 기마민족의 하나인 월지(月氏)라는 설로 나뉜다. 월지는 알타이 산맥과 중국 서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타클라마칸 사막 유역에 살던 페르시아계 기마민족이다. B.C2세기 말 한나라 무제가 훈족에게 공동대응하기 위해 장건을 사절단으로 보냈던 바로 그 민족이다. 스키타이가 아닌 월지 무덤이라 해도 스키타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보여준다. 적석목곽분의 무덤양식은 물론 무덤에 고차(高車, 바퀴가 높은 나무마차)를 묻는 풍습도 스키타이의 풍속이기 때문이다. 스키타이든 월지든 파지리크 고분 유물은 알타이 산맥 서쪽 영역인 카자흐스탄 동부 이식 쿠르간의 사카족(흑해에서 온 스키타이가 현지화한 민족)의 관모 사슴뿔 금장식과 맥이 닿는다.
스키타이 혹은 월지의 알타이 공화국 파지리크 사슴뿔 관이 초원 기마민족의 일반적 특징이라는 점을 머리에 담고 무대를 전라남도 광주의 전남대 박물관으로 옮겨보자. 마한 지역 고인돌과 적석총에서 발굴한 유물 등을 근거로 복원한 마한 제사장 추정 복원도가 탐방객을 맞는다. 쇠로 만든 작은 종을 주렁주렁 매달고, 구리거울을 찼으며 손에 가지방울과 지팡이를 든 모습이다. 시선을 머리로 올려보자. 사슴뿔 관을 썼다. 사슴뿔이 주술(呪術)의 샤머니즘과 관련 있다는 의미다. 마한 샤머니즘에 등장하는 사슴뿔 관은 파지리크 카펫의 사슴뿔 관에서 보는 것처럼 초원 기마민족들이 활용하던 신성한 도구다.
훈족에 밀려난 월지 금관과 신라 금관
월지의 유물을 2016년 7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황금유물 특별전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북부 틸리야 테페(Tillya Tepe) 유적지에서 출토된 황금유물이 주를 이뤘다. 틸리야는 북쪽으로 인접한 우즈베키스탄어로 ‘황금’, 테페는 ‘언덕’을 가리킨다. 황금 언덕.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전후사정을 살펴보자.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고고학자들이 1978년부터 틸리야 테페 무덤군을 발굴해 B.C1세기-1세기 이 지역을 장악했던 쿠샨제국 무덤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쿠샨 제국은 중국 서부에 살다 B.C2세기 훈족에 쫓겨 이곳으로 온 월지의 나라다. 월지가 들어오기 전에는 B.C326년 이 지역을 침략한 알렉산더군의 그리스인들이 박트리아 왕국을 세워 통치했다. 그리스계 박트리아를 무너트린 쿠샨제국의 이름 ‘쿠샨’은 월지의 일파 귀상(貴相, 쿠샨)부족에서 나왔다. 교역대국 쿠샨제국 월지인이 서로는 로마, 남으로 인도, 북으로 스키타이, 동으로 중국과 교류한 흔적은 무덤 부장품에 고스란히 남았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뒤이어 1989년 내전 등으로 아프가니스탄 유물들은 위기에 직면한다. 일부는 해외로 밀반출되기도 했지만, 핵심유물들은 아프가니스탄 중앙은행 지하금고에 깊숙이 숨겨졌다. 정국이 안정된 뒤 2003년 다시 햇빛을 봤고, 세계 각지 순회전을 통해 문명의 교차로 아프가니스탄 유물에 목마른 이들의 갈증을 풀어준다. 그렇게 2016년 7월 서울에 온 틸리야 테페 고분군 유물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금관이다. 금관의 생김새를 보자. 밑에 원형 테두리, 대륜(臺輪)이 있다. 폭이 좁은 대륜 위로 여러 개의 세움 장식을 놓는데, 모티프는 나뭇가지다. 가지에 나뭇잎 형상의 수많은 달개를 달아 현란한 면모를 뽐낸다. 초화형(草花型) 금관이란 점에서 우리 금관과의 연계성을 무시하기 어렵다. 더구나 금관에 달린 동그란 잎사귀 형태 달개는 금관총 부장궤에서 출토된 달개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닮았다. 일본 후지노키 고분 금동관의 잎사귀 형태 달개도 마찬가지다. 1세기 폼페이에서 유행한 색상의 로마 유리가 5세기 신라 고분과 일본 고분에서 출토되는 점을 감안할 때 월지 금관과 신라금관의 연관성을 따져보는 추론은 합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월지 금관과 황남대총 금관의 또 다른 공통점
B.C1-1세기 쿠샨제국 월지 금관이 출토된 틸리야 테페(황금언덕)에는 6기의 무덤이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남성묘는 1기뿐, 나머지 5기는 여성묘라는 점이다. 금관이 권력의 상징이라면 남성묘에서 나오는 게 상식적이다. 틸리야 테페에서 남성묘는 4호 묘다. 그렇다면 유골의 두개골에 씌워진 채 발굴된 현란한 장식의 금관은 4호 묘에서 나왔을까? 아니다. 6호 묘다. 유골을 조사한 결과 금관을 쓴 주인공은 20세 전후의 젊은 여성으로 밝혀졌다. 권력자가 아니었다. 신라 황남대총 북분 왕비 무덤에서 금관이 출토된 점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금관은 여성도 쓴다는 사실을 신라보다 수 백 년 앞서 제작된 아프가니스탄 월지 금관을 통해 확인한다. 여성도 금관을 쓰는 풍속은 몽골초원과 중국서부 기마민족에게 황금문화를 전한 기마민족의 원류 스키타이도 마찬가지였을까? 다음호에 살펴본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 가운데 금관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까지 발굴된 금관 8개(신라 6개, 가야 2개)를 비롯해 여러 금동관의 특징과 기원을 짚어본다. 유라시아 대륙 전역의 금관문화를 현장유적과 박물관 유물취재를 통해 문명교류 관점에서 5회에 걸쳐 들춰본다. |
편집 : 김태형 기자
단비뉴스 청년부 김태형입니다.
연습생의 마음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