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성적표를 받아든 너에게

   
▲ 박선영 기자

너와 나의 소득 차이는 우리의 ‘성적표’다. 학창시절 받았던 성적표만큼 정직한 게 없다. 공부는 노력한 만큼 나온다. 머리가 나쁘면 그만큼 노력하면 된다. 성적표로 시작된 너와 나의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 벌어졌다. 나는 좋은 수능 성적표를 받았고, 높은 학점으로 졸업했고, 고소득 직장을 얻었다. 나는 나의 실력과 노력이 계속 차이를 벌렸다고 믿는다. 너는 나보다 실력과 노력이 부족해 그에 합당한 인생 성적표를 받은 것이다.

너와 나의 소득 차이는 나의 ‘짐’이다. 너의 소득은 정부가 보전해줘야 하는 대상이다. 나의 소득에 세금을 매겨 너의 소득을 강제로 끌어올려야 한다. 너와 나의 소득 차이가 경제 성장에 걸림돌이 될 정도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낸 세금은 근로장려제의 재원으로 쓰여 네가 근면 성실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나는 너의 실력과 노력에 화가 난다. 너와 나의 소득 차이에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너의 인생은 나에게 ‘짐’이다.

▲ 확률과 논리로 무장한 실력주의는 정의로운가. ⓒ pixabay

사실 너 나의 소득 격차는 내게 유리한 ‘확률’ 덕분이다. 나는 내 실력과 노력을 부정당할 만큼 확률이 어긋난 적이 없다. 나는 확률 싸움에서 계속 이겼고, 너는 안타깝게도 계속 졌다. 인생의 확률 게임은 누진제 같아서 한 번 이기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 좀 더 유리하게 경쟁할 수 있다. 내가 중산층 부모한테 태어난 확률은 그 부모가 교육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확률을 높였다. 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간 확률은 내가 고소득 직종에 고용될 확률을 높였다. 네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확률은 교육보다 굶지 않는 게 우선일 확률을 높였다. 그 확률은 네가 교육을 포기할 확률을 높였다. 난 모든 확률에서 너를 이겼다.

그래서 너와 나의 소득 격차는 우리 사이에 확실한 ‘틈’을 만들었다. 차이에 그럴듯한 이유가 생기는 순간 너의 불행, 나의 행복은 합리화한다. 합리화한 차이는 너와 나 사이에 틈을 만든다. 너는 ‘최선을 다했냐’는 질문에 대답을 못 할 수 있다. 공정한 게임이었냐는 질문에 게임에서 진 너의 대답은 패자의 아우성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다. 어디까지가 공정한 차이인지 알 수 없다. 어디까지가 경쟁에 따른 차이인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생의 성적표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소득’은 너와 나의 확실한 간극이다. 이토록 확실한 틈 때문에 난 너의 소득을 이해할 수 없다.

내 생각은 이토록 확률과 논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근데 내 생각은 정의로운가?


편집 : 이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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