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이성과 감성

▲ 조현아 PD

“너는 예술가고 나는 사상가야. 네가 어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다면 나는 황야에서 깨어있는 셈이지.”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에서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말한다. 철저한 이성적 통제 아래 사는 나르치스와 감성과 관능으로 충만한 골드문트. 둘은 너무나 대조적인, 결코 닿지 않는 평행선 같은 삶을 살아간다. 둘은 상반된 면에 끌리지만, 또 서로를 이해하기엔 너무나 큰 간극이 있다. 인간 심리 내면에는 두 영역이 있다. ‘냉정’으로 대변되는 이성과 ‘열정’으로 대변되는 감성. 냉정과 열정, 그 사이에 때론 나르치스를 때론 골드문트를 닮은 우리 ‘삶’이 있다.

근대 합리주의 사회는 냉정의 시대였다. 인간 이성의 통제 밑에 감성을 둘 것을 요구했다. ‘만일 신이 없더라도’라는 말에서 시작한 근대는 신이 아닌 ‘인간에게 통용될 수 있는 합리’를 열렬히 쫓아갔다. 'Cogito ergo sum.' 데카르트의 말처럼 인간은 생각하기에 존재했다. 순수 이성은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근본원리로 받아들여졌으며, 모든 학문과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미국 수정헌법 1조를 포함해 현대 사회의 틀을 만드는 모든 법과 철학, 윤리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 위에 기초한다.

현대 해체주의는 인간에게 그 못지않게 중요한 열정과 감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상의 순간순간, 감성은 이성을 빠르게 앞지른다. 감성은 감각기관에서 독립된 이성과 달리 순전히 감각기관에 기초하는 ‘심리적 작용’이다. 쾌락, 사랑, 인정 등 인간 삶에 수많은 의미를 가지는 많은 감정과 동기 요인이 감성에서 비롯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 우리는 ‘욕망하고 고로 존재하는’ 생물학적 동물이다. 대개 감성이 이성보다 더욱 정직하고, 정확하며 내면을 제대로 대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은 한 줄의 경계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 둘은 대립적이면서 상호작용성을 지닌 불가분 관계이다. 내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할 때 어디까지 이성이고, 어디서부터 감정인지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결정을 내린 뒤 심리적으로 불안하거나, 흡족한 감정이 들지 않을 때 우리는 다시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낀다. 반대로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평안한 감정이 들 때는 확신을 얻는다. 그래서 흄은 이성이란 ‘열이 없는 감정(calm passion)’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더 선명하듯이 냉정과 열정도 서로 다른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이성과 감성도 마찬가지 아닐까? 두 영역은 서로 완충한다. 아무리 훌륭한 이성적 결정이라도 그 속에 감성이 없다면 공허해지기 마련이다. 뜨겁고 열정적인 감성도 충분한 사유와 책임이 뒤따르지 않으면, 맹목적이기 쉽다. 세상을 냉철히 관찰하고 추론하고 계산하는 것은 이성이다. 그것을 어떤 목적에 사용할지 정하는 것은 사랑, 정의, 타인과의 연대와 같은 감성이다. 서로가 있기에 온전한 능력이 된다.

▲ 삶은 대개 냉철한 이성 위에 뜨거운 감성이 공존하며 영위된다. ⓒ pixabay

나르치스의 말처럼 "모든 이들의 삶은 냉정과 열정이 서로 뒤섞일 때만, 무미건조한 양자택일로 삶이 분열되지 않을 때만 의미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이성과 감성 사이 줄다리기 속에서 때론 한쪽에 치우치고 결핍되고 갈등하기도 하지만, 괜찮다. 그 모든 뒤섞임이 바로 삶일 테니까. ‘사람’과 ‘삶’의 어원을 거슬러 오르면 둘은 같다. 사람이 삶이고 삶이 사람이다. 이성과 감성이 섞여 빚어진 '사람'은 오늘도 냉정과 열정이 섞인 그 어디엔가에서 ‘삶’을 살아간다.


편집 : 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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