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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스룰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글케치북] 펜스룰
2018년 03월 27일 (화) 21:47:56 장은미 이창우 손준수 기자 irondumy@icloud.com

미련한 영국인의 우화

   
▲ 장은미 기자

어떤 영국인이 여관에 머물렀다. 여관 주인은 바가지요금을 씌우려 했다. 대부분의 손님은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냈다. 그런데 이 영국인은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그 때문에 영국인은 며칠 더 묵어야 했다. 원래 일정을 틀어가며 여관에 더 머문 영국인은 분명 손해다. 사람들은 영국인의 행동을 어리석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고 든 영국인 덕분에 이후의 손님들은 바가지요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 사회 전체로 본다면 이득이다. ‘미련한 영국인’ 이야기는 독일 법학자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나온다. 우리 사회에서 ‘영국인’처럼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숙박비는 사소하고, 거기에 들이는 노력은 손해라 생각해서다.

결국은 권리의 문제다. 우리는 그동안 일상적인 성폭력 문제를 사소하다고 치부하고, 이를 따지는 것은 손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당장의 손해 때문에 ‘내 몸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 건 아닌가?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해자를 포함해 주변에서도 성폭력 문제에 더 민감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미투’ 가해자도 처음엔 그들의 해명처럼 격려의 마음으로 어깨를 만졌을 수 있다. 그때 주변에서 “왜 그러세요? 이건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 있는 ‘미련한 영국인’ 같은 이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결말은 달랐을 것이다. 그 사소함을 놓쳐 우리가 성폭력을 만연하게 했고, 결국은 무감각해졌다.

   
▲ 2018년 3월 8일 여성의 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펼쳐진 한국 여성대회. ⓒ 한국여성단체연합

곪았던 성폭력 문제가 ‘미투’로 공론화되자, ‘펜스룰’이 슬금슬금 나온다. 정색하고 말하면 ‘여성혐오’이고, 순화한다면 ‘여성 배제’다. 펜스룰은 사회적 테두리 밖으로 여성을 밀어내는 행위다. ‘양성이 모두 평등하게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페미니즘 정신에 배치된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최고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동등한 인간으로서 존중을 요청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녹아있는 사소한 질문들에 한 번 대답해보자. 태아감별에서 성별을 이유로 살해당할 뻔한 적이 없었나? 직장에서 결혼을 이유로 해고된 적은? 시시때때로 직장 상사가 끈적한 농담을 하지는 않았나? 밤길을 다니면서 성폭행이나 살인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두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나? 이 질문들은 ‘여성’이라서 겪는 삶의 일상적 풍경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여성의 삶을 바꿔보자는 게 페미니즘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바뀌어요.” 미국 대학 내 성폭력 문제를 다룬 다큐 <헌팅 그라운드>에서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다. 미투의 피해자들은 혹독한 자기검열을 이겨내야 했다. 지금도 수많은 여성은 ‘숙박비’를 따져도 되나, 자신이 나쁜 손님은 아닐까 하며 자기검열을 하고 있다. 결국 ‘미련한 영국인’이 사회의 변화를 이끈다.

1908년 빵과 장미를 들고 생존과 권리를 외쳤던 여성들의 시간과 2018년을 사는 여성들의 풍경은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헌팅 그라운드>조차 미국 미투 운동 가해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배급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도려내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펜스룰은 미투의 안티테제인가

   
▲ 이창우 기자

‘아내를 제외한 여성과 단둘이 불필요한 접촉을 하지 않는다.’ 이른바 ‘펜스룰’이 사회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펜스룰은 1940년대 미국의 목사 빌리 그레이엄의 ‘머데스토 선언’이 그 유래다. 개인의 청교도적 태도를 견지할 규칙이었던 셈이다. 이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하원의원 시절 사생활 관리수칙으로 언급하면서 펜스룰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한국으로 넘어와서는 더욱 포괄적인 의미로 쓰인다. ‘여성에게 성적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상황 자체를 원천봉쇄‘하려는 의도까지 포괄하고 있다.

펜스룰이 한국에서 광범위하게 퍼진 이유는 명확하다.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 운동의 안티테제적 현상이다. 아직 미미하지만, 더 크게 번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 인류가 침묵해 왔던 거대한 악습에 균열이 가는 순간인데 말이다. 여성계에서는 남성들이 거대한 젠더권력을 놓치기 싫어 저항하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미투 운동의 창시자 타라나 버크는 ‘여성에게서 떨어지는 게 성희롱의 유일한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창피함을 느껴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 펜스룰이 미투운동 이후를 준비하는 성숙한 태도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원인진단 없는 비판은 또 다른 성 대결 구도를 낳을 뿐이다. ⓒ pixabay

물론 펜스룰을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바람직한 해법이라고 여길 순 없다. 그러나 펜스룰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일부의 시각은 초점이 빗나갔다.

펜스룰이 번지는 이유에는 이중의 오해가 있다. 첫 번째는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들의 오해다. 페미니즘은 인종차별과 남녀차별이 팽배했던 19C 계몽주의 시대에 발흥해 여러 분파로 갈라졌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법적으로 동등해진 여성이 스스로 주체성을 가져 성 평등을 이루자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그 자체를 여성억압의 구조로 보는 맑시즘적 페미니즘, 공고한 남성의 젠더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초점을 맞춘 급진적 페미니즘도 그중 일부다. 젠더차별이 횡행하는 한국에서 페미니즘의 본류를 차지한 듯 보이는 쪽은 급진적 페미니즘이다. ‘미러링’ 등 사회에 파문을 던지는 데 성공했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남성들의 적대감도 높아져 급진페미니즘이 '페미니즘' 그 자체라고 오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인식은 남성들이 젠더격차 해소에 연대하기보다 자기방어와 반격에 열중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는 여성들이 ‘무고’의 공포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진짜 피해자인데도 ‘무고’했다는 오해를 받는 상황에 익숙하다. 무고 피해자를 방지하기 위한 경계심은 진짜 성폭행 피해자에겐 치명적 2차 피해로 되돌아온다. 반면 남성들의 입장은 다르다. 여성들이 성추행, 성폭력 피해를 우려해 밤길을 걸을 때나 택배를 받을 때 조심하듯이 남성들도 무고 피해를 경계할 수밖에 없다. 우선 성추행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는 상태다. 사법처리와는 별개로 사회적 자산을 모두 잃어버리기도 한다. 남성들이 피해자에게 가는 2차 피해보다 자신의 무고 피해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구조다. 그들에게 펜스룰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항변이다. ‘잠재적 가해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해 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지?’라는 논리다.

역사의 진전을 위해 그 간극을 줄일 순 없을까. 남성들은 성범죄가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벌어졌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여자를 잠재적 무고자로 경계하는 펜스룰의 시각은 성별 갈등만 부추긴다. 페미니즘에 다양한 지향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거두는 노력도 중요하다. 한편으로 무고를 방지하려는 노력이 ’2차 가해‘라는 용어로 둔갑하는 경우는 없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억울하게 처벌받는 무고 피해자가 늘어날수록 진짜 피해자가 용기 낼 여건이 좁아지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유럽에 다시 극우적 색채를 띠는 정당들이 발흥하는 것처럼, 섬세하지 못한 ’올바름‘에도 반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

 모두 ‘human being’이자 ‘人’이다 

   
▲ 손준수 기자

미국인들이 꼽은 최고의 퍼스트레이디 엘리너 루스벨트는 ‘인권의 대모’로 불린다. 엘리너는 ‘세계인권선언문’을 기초하는 데 참여했다. 그는 선언문에 사람을 ‘men’이 아니라 ‘human being’으로 쓰자고 주장했다. 성별, 인종, 지역 등에 차별받지 않고, 누구나 평등해야 한다는 그의 평소 생각 때문이었다. 세계인권선언문 탄생 70년이 지났지만 남성과 여성은 아직 평등하지 못하다. 여성들은 ‘#Me Too(미투)운동’을 통해 젠더 권력의 내면화된 불평등을 폭로하고 있다. 남성들은 여성의 참여를 배제하는 ‘펜스룰’로 이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볼 때 펜스룰은 인간의 평등권을 훼손시킨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가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인정하고 가정과 사회, 언어 등에 구조화된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기본권 쟁취’ 투쟁이다. 펜스룰은 직장과 친목모임 등 사회에서 여성 참여를 배제한다. 여성들은 ‘유리천장’처럼 보이지 않는 불합리한 관습에 고통을 겪어왔다. 미투는 인간의 보편적 평등을 추구하는 몸부림의 시작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펜스룰은 남성권력을 보호하기 위한 반미투 운동으로 비친다.

남성들은 자신을 성범죄의 잠재적 가해자로 바라보는 시선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선거권, 사회참여, 표현의 자유 등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이미 누리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남성만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어서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남성도 있다.

   
▲ 남성과 여성은 차이점보다 동질적인 면이 많으며, 동반자로서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 ⓒ pixabay

인간은 성별, 인종, 학력, 지역 등에 따라 누구나 소수자가 될 수 있다. 인간에게 완벽한 성골은 없다. 상대방과의 신체적, 환경적 차이를 인정하고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 흑인과 백인 등 인종마다 신체와 문화의 다양성이 존재한다. 남성과 여성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평등권을 배경으로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자세가 자리 잡는 것이 급선무다. 성별보다 각자 조건에 맞게 사회 발전에 기여하면 된다.

펜스 룰은 민주주의 질서에 반하는 행위다. 민주주의는 성별에 매몰되지 않고, 개인의 다양성에 기반해서 자아실현 등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자는 제도다. 펜스 룰은 여성이 가진 사회참여 자유뿐만 아니라, 의사표현의 자유까지 방해한다. 펜스 룰을 추종하는 일부 남성들은 여성의 성폭력 피해를 알리는 미투운동을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는 식의 감정문제로 폄하한다. 미투운동이 외치는 사회적 변혁도 외면한다.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남성이 누렸던 권력을 버리고, 성 평등을 위한 인식개선에 한 걸음 다가갈 필요가 있다.

엘리너가 ‘human being’을 인권선언문에 넣기 전까지 서양에서 사람은 ‘man’으로 불렸다.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police man(경찰관)’처럼 남성성이 반영된 단어에 ‘police officer’와 같이 성 중립적인 말로 바뀌었다. 반면 동양은 사람을 성차별 없이 ‘人(사람 인)’으로 썼다. 이런 말이 함의하는 인간관에서는 펜스 룰이라는 개념 자체가 동양에서는 없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 따지고 보면 남성과 여성은 차이점보다 동질적인 면이 훨씬 많다. 미투 운동에 대해 펜스 룰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폭넓은 인간관과 세계관을 통해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


편집 : 박경난 PD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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