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입구에서이명옥(67·가명) 씨는 경주 희망마을 어귀 첫 번째 집에 산다. 시멘트블록으로 쌓은 벽에 조립식 패널을 두른 집이다. 지붕으로는 석면 슬레이트를 얹었는데, 녹이 슬어 푸른빛을 띠었다. 미닫이문 앞에 발을 치고 플라스틱 핀으로 고정해 현관으로 삼았다. 집에 들어설 때면 비닐하우스에 들어가는 모양새가 됐다. 집으로 들어가면 정면으로 부엌이 보였다. 부엌이라기보다 창고에 가까웠다. 가스레인지와 대야, 냄비가 어지럽게 놓였고 오래 방치된 듯 누런 창문이 나 있었다. 벽에는 곰팡이가
암호화폐는 자본주의의 이데아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와 시장은 분리됐다. 시장이 하는 일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미덕으로 여겼다. 암호화폐는 오래된 이상을 다시 불러냈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정부와 중앙은행의 규제에서 벗어난 시장에서 개인은 화폐를 자유롭게 거래한다. 암호화폐 시장에는 필요할 때마다 돈을 찍어내는 정부와 은행이 없다. 암호화폐 열풍의 배경에는 ‘무정부성’이 있다. 투자자들은 정치권력과 분리된 시장으로 몰려든다. 정치가 없을 때 시장은 더 잘 돌아간다는 인식이다. 암호화폐 시장의 이면에는 정치를
위건 부두로 가는 길/조지 오웰 지음/이한중 옮김/한겨레출판/1만2000원태양이 지구를 돌던 때가 있었다. 고대 철학이 세계를 정리한 이래 지구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사람들은 땅에 눈을 두고 별의 운행을 헤아렸다. 믿음을 깨뜨리는 자들이 나타났다. 땅에 박은 고개를 들고 별을 좇았다. 그들은 지구를 중심에서 밀어냈다. 실로 움직이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대지라고 외쳤다. 코페르니쿠스는 세상이 지구를 향해 회전하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을 퍼뜨렸다. 티코 브라헤는 맨눈으로 행성과 혜성의 궤도를 관측해 기록으로 남겼다. 케플러는 브라
밤 9시가 넘어 야간자율학습이 끝났다. 시내버스를 타고 30분쯤 달려야 집에 도착했다. 거울로 둘러싸인 엘리베이터에 타면 헐렁한 교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른 중학생이 있었다. 일 년 전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하교길에 햇볕이 화사했는데, 해 대신 달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나를 사립 중학교에 보내며 부모님이 내세운 논리는 정연했다. 친척들은 모두 좋은 학교를 나와 자리를 잡았으니, 너도 좋은 곳에서 열심히 공부해야, 그나마 ‘좋은 인생’ 근처에 가닿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학교에 처음 간 날, 내가 받아든 것은 안내문 한 장.
헨리는 새로운 삶을 찾아 엘살바도르에서 미국으로 왔다. 갱과 마약에 휘둘리며 인생을 내버리기 싫었다. 뉴욕 롱아일랜드에 정착해 학교를 다니며 미래를 꿈꿨다. 헛되었다. 열아홉 살 되던 해, 헨리는 미국에서 추방됐다. 지역 갱 조직에 연루됐다는 혐의였다.카를로타는 아들을 아꼈다. 에콰도르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어렵게 아들을 낳았다. 초등학교에 보내서도 해코지를 당할까 걱정돼 아들 손을 잡고 다녔다. 헛되었다. 열다섯 살, 아들은 숲속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부검 결과 마체테(벌목용 칼)로 베인 흔적이 있었다.알렉스는 늦은 나이에 고등학
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한국기자협회 엮음/포데로사/1만1700원소설가 김훈은 기자였다. 30년 가까이 현장을 글로 옮기는 일에 몸담았다. 그는 현실을 기사에 담아내는 데 거듭 실패했다.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전두환 신군부까지 어두운 세월을 지나며, 감방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문장에 쓰지 못하고 동물원을 돌면서 기사를 냈다. 슬프고 더러워 회사를 나왔다. 그는 언론을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되풀이했다. 육하(六何) 너머에 인간의 진실이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고 김훈은 현장을 떠나 소설을 쓴 이유를 밝혔다. <한겨레>로 돌아와 사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