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학생'

▲ 김세훈 기자

밤 9시가 넘어 야간자율학습이 끝났다. 시내버스를 타고 30분쯤 달려야 집에 도착했다. 거울로 둘러싸인 엘리베이터에 타면 헐렁한 교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른 중학생이 있었다. 일 년 전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하교길에 햇볕이 화사했는데, 해 대신 달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나를 사립 중학교에 보내며 부모님이 내세운 논리는 정연했다. 친척들은 모두 좋은 학교를 나와 자리를 잡았으니, 너도 좋은 곳에서 열심히 공부해야, 그나마 ‘좋은 인생’ 근처에 가닿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학교에 처음 간 날, 내가 받아든 것은 안내문 한 장.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0교시에서 12교시로 이어지는 일정이 빼곡했다. 아래에는 체크 박스가 있었다. 귀댁의 만 13살짜리 자녀를 늦은 밤까지 학교에 잡아두는 것에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담임선생은 이름을 쓰는 칸에 모두 서명하라고 했고, 부모님 서명을 받아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이름을 적어 넣고 ‘동의’에 표시했다. 이곳은 엄격한 커리큘럼으로 돌아간다며 선생은 자랑하듯 말했다.

자율학습 시간에는 자습실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퀴퀴한 곰팡내가 났다. 100명쯤 되는 아이들이 책상에 고개를 박고 문제집을 풀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자주 시계를 들여다봤다. 머리를 들면 노랗게 칠한 칸막이에 얼룩덜룩한 무늬가 보였다. 그것에 몰입하고 있으면 어느새 가방을 챙기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멀리서 감독선생이 무어라 말하면 근처에 앉은 아이가 이를 전하는 식이었다. 동굴 같은 자습실에서 빠져나오면 캄캄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 올가미에 걸린 삶은 개인의 역사를 돌아보지 못한다. 구조와 권력이 작동하는 힘을 통찰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 Pixabay

여러 해가 지나고, 언제인가 유튜브를 둘러보다가 내가 다닌 학교에서 만든 채널을 찾았다. 10년 사이 무엇이 달라졌을까? 3분 남짓 영상에서 학생들은 웃는 얼굴로 학교를 소개했다. 축제 모습을 담은 영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걷는 길은 내가 걷던 길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 영상은 자신들이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보여주고 싶어 했다.

미국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스는 <사회학적 상상력>에서 현대인은 자기 일상이 올가미에 걸려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고 썼다. 개인이 자신의 흥망과 성쇠에 몰입하면서 그 뒤에 숨은 구조와 힘을 통찰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비개인적인 것들이 개인을 쥐고 흔들면 사생활이란 것은 올가미가 구획한 공간에서 맴돌 뿐이다. 그 너머를 보려고 하지 않으며, 볼 능력도 없다. 

‘좋은 인생론’은 거듭 재생산된다. 무엇이 됐든 온몸을 갈아넣어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주어’와 ‘주체’를 교묘하게 섞어 쓴다. 주어(subject)는 술어가 결정하는 요소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알튀세르가 말한 것처럼 구조와 권력에 종속된다. 자신이 주체라는 믿음을 갖는 순간 올가미에 걸린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정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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