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 컨퍼런스] ② 스토리텔링

저널리즘과 문학의 경계가 희미한 때가 있었다. 문학은 언론의 이상이었다. 영미 문학을 일군 작가들은 본래 기자였다. 기자로 일하며 경력을 쌓은 뒤 언론을 떠나 소설을 썼다. 헤밍웨이와 스타인벡이 그랬다. 현장을 취재해 기사로 옮기는 일에 사명을 품기보다, 소설을 내기 전에 세상 물정을 살피려고 기자가 됐다. 1960년대까지 문학은 저널리즘의 미래였다.

문학과 저널리즘의 역학이 뒤집혔다. 70년대 이른바 ‘뉴저널리즘’ 흐름이 몰아쳤다. 처음부터 문학의 언어로 기사를 쓰자는 구호였다. 게이 탤리즈, 존 허시, 톰 울프 등의 기자들이 ‘소설 같은 기사’를 쏟아냈다. 톰 울프는 저서 <뉴저널리즘> 서문에서 “오늘날 미국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은 ‘뉴저널리즘’이 만들어낸 논픽션”이라고 썼다. 문학의 미래를 저널리즘에서 찾아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뉴저널리즘의 기둥은 <에스콰이어>, <애틀랜틱>, <뉴요커> 등 매거진이었다. 매거진의 콘텐츠는 기성 언론과 달랐다. 정치가 빚어낸 세상과 우연이 격발한 사건을 좇아 하루살이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속보 경쟁에서 신문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매거진은 ‘피처’(Feature)에 매달렸다. 뉴스가 되지 못한 이야기와 사람들을 찾아 긴 시간을 들여 취재해 심층을 드러냈다.

피처에서 찾은 저널리즘의 미래

뉴저널리즘은 신문에 맞선 매거진의 성과였다. 신문이 잘하는 일을 매거진이 따라갈 이유가 없다고 봤다. 두 매체가 몰두하는 장르는 달랐다. 신문이 직선으로 달려가는 문장으로 현장을 전했다면, 매거진은 문학의 힘을 빌려 현장의 깊숙한 부분을 건드렸다. 앞의 장르가 스트레이트 뉴스라면, 뒤의 장르는 피처다.

사단법인 코드(C.O.D.E)의 박상현 미디어디렉터가 뉴저널리즘의 성취를 다시 불러냈다. 지난 3일 <미디어오늘> 주관 ‘2021 저널리즘의 미래 컨퍼런스’에서 그는 언론의 미래 전략으로 ‘피처 기사’를 꼽았다. 유튜브와 틱톡 등 신속한 정보 전달에 강한 소셜미디어가 등장한 시대에 언론의 경쟁력을 긴 호흡의 피처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박 디렉터는 시급한 사안을 짧은 길이에 담아내는 스트레이트 장르에서 언론이 소셜미디어를 쫓아가기 힘들 것이라 전망했다. 트위터는 사건과 사고 소식을 실시간으로 실어 나른다. 대중을 자극하는 과격한 의견도 빠른 속도로 공유된다. 소셜미디어에서 돌려보던 내용을 언론이 베껴 쓰는 일도 낯설지 않다.

박 디렉터는 소셜미디어에 대한 언론의 우위는 긴 호흡으로 사건의 맥락을 전달하는 장르인 피처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뉴요커>를 비롯한 영미 언론의 매거진을 둘러보면, 피처는 책 한 권에 실릴 분량을 염두에 두고 쓰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정보를 전달하는 속도보다 정보의 양과 질에 집중하는 장르인 까닭이다. 독자가 지치지 않고 긴 기사를 읽게 하려면 ‘스토리텔링 전략’이 필수다. 언론사가 피처 기사에 주력하려면 긴 이야기를 풀어내는 스토리텔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 언론의 미래 전략을 피처 기사에서 찾아야 한다고 설명하는 박상현 코드 미디어디렉터. ⓒ 미디어오늘

<디퍼>(Deepr)라는 온라인 매체가 있었다. 박 디렉터가 당시 미디어전문 액셀러레이터(육성기관) ‘메디아티’에서 일하던 2017년 사내 벤처로 문을 열었다. 매일 접하는 뉴스를 넘어 이면에 담긴 맥락까지 깊게(deep) 다루겠다는 뜻에서 사명을 지었다. 피처의 본령과 통했다. <디퍼>에서 일한 기자들은 모두 ‘라이터’(Writer)라는 직함을 썼다. 박 디렉터는 “궁극적으로 기자들과 작가들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라며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기자나 작가는) 모두 라이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난 8월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점령하자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려는 인파가 공항으로 밀려들었다. 미군 수송기에 매달려 하늘을 가로지르다가 몇몇은 떨어져 죽었다. 박 디렉터는 이 사건을 다룬 소셜미디어와 언론을 비교하며 기성 언론이 할 수 있는 ‘긴 이야기’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미 수송기에서 누군가 추락해 사망했다는 ‘사건’은 트위터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현장을 담은 동영상이 빠르게 퍼졌다. 17살 청소년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추락사했다는 ‘사실’이 나중 알려졌다. 하늘에서 떨어진 자들은 누구였고 어떤 사연이 있는지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엿새쯤 지나서 나온 기사였다. 트위터에서 공유된 내용이 스트레이트 뉴스라면 기성 언론인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보도한 기사는 피처에 해당한다. 스마트폰 등 기기로 현장을 촬영하여 사건을 빠르게 전하는 것은 평범한 시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긴 시간을 들여서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일은 저널리스트밖에 할 수 없다.

잘 쓴 피처 기사는 후속 아이템으로 이어져 독자를 끌어 모은다. 긴 기사를 엮어서 단행본으로 내거나, 기사를 쓴 기자들이 팟캐스트에 출연해 취재기를 들려주는 등 한 기사에서 다양한 콘텐츠가 파생된다. 언론은 피처 스토리를 밑천 삼아 독자들에게 가닿는다.

박 디렉터는 독자를 몰입하게 하는 스토리텔링 전략으로 ‘팩트의 힘’을 꼽았다. 미국 논픽션 내러티브의 대가 존 맥피는 “없는 걸 지어내는 게 아니라 가진 걸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논픽션의 핵심이라고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추락한 아이의 소셜미디어 계정과 주변인의 증언을 취재해 팩트를 엮어 스토리텔링을 이뤄냈다. 치밀한 취재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독자는 몰입하지 않는다.

공감하는 스토리텔링

▲ 독자가 몰입하는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주제로 강연하는 유원선 스튜디오 벨크로 디자이너. ⓒ 미디어오늘

독자가 긴 기사를 읽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2012년 <뉴욕타임스>가 디지털 인터랙티브 기사 <스노우폴> (Snow Fall)을 선보이며 웹페이지와 텍스트를 밀착시킨 새로운 읽기 방식을 발명한 이래, 긴 호흡의 콘텐츠를 전달하려는 시도가 거듭 이루어졌다. 긴 기사를 놓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고민이 깊어졌다. 스튜디오 벨크로의 유원선 디자이너는 ‘콘텐츠의 길이’는 중요한 변수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유 디자이너는 <시사IN>과 협업해 ‘빈 집’과 ‘대림’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유 디자이너는 긴 길이의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둘러싼 고민 뒤에는 이른바 ‘숏폼’이라 불리는 짧은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막연한 불안이 있다고 지적했다. 유 디자이너는 ‘숏폼 트렌드’가 거둔 성취에서 물러나 독자가 콘텐츠를 소비하는 이유를 제대로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숏폼 열풍’ 한편에는 여전히 긴 호흡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넷플릭스를 통해 여러 시즌에 걸쳐 드라마를 보거나, 플랫폼을 통해 500회가 넘는 웹툰을 보는 것이 그 예다. 소비자는 단순히 콘텐츠의 길고 짧음에 이끌려 콘텐츠를 소비하지 않는다고 유 디자이너는 말했다.

독자의 공감을 바탕으로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가 있다. 씨비에스(CBS)의 뉴미디어 채널 <씨리얼>이 만든 ‘용돈 없는 청소년’ 시리즈다. 티저 영상 등을 제외하고 총 5회에 걸쳐 연재됐다. 9월 중 6회가 나올 예정이다. 황민아 PD는 용돈 프로젝트의 뒷이야기를 나누며 독자가 공감하는 스토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과정을 공유했다. 유 디자이너는 독자를 몰입시키는 요소로 ‘공감’을 꼽았다. 그는 공감이 가능하려면 콘텐츠에서 ‘이해’와 ‘감각’을 모두 구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해란 논리를 따라 무슨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 인과 관계를 납득하는 것을 뜻한다. 역사 교과서를 펼쳐 들고 따라 읽는 일과 비슷하다. 감각이란 정서적 느낌을 나누어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는 일을 뜻한다. 주변인의 슬픔에 같이 슬퍼해주는 것이다.

용돈 프로젝트는 설문조사에서 출발했다. 독자들의 고민을 모으고 들었다. ‘일하는 청소년’을 비롯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입시제도 밖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헤아리려 했다. 독자 사연을 살피면서 빈곤에 놓인 청소년들을 만나게 됐다. 기획을 확대했다. 100여 개의 사연을 범주로 묶어 정리했다. 그들 빈곤이 시작된 최초의 격차를 들여다본다는 기획 아래 키워드 ‘용돈’에 집중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 ‘용돈 없는 청소년’ 시리즈의 기획 과정을 <씨리얼>이 지향하는 가치와 엮어 설명하는 황민아 PD. ⓒ 미디어오늘

용돈 시리즈는 개인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사회 구조의 문제로 나아가는 스토리텔링으로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생활비를 벌고 집안을 먹여 살리려고 학교 밖에서 일찍 일을 시작한 사람들, 부모에게 빚을 물려받아 학생조차 될 수 없었던 이들, 돈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30개씩 하며 꿈을 꾸던 청년들의 사연을 담았다. 

황 PD는 <씨리얼>이 지향하는 콘텐츠를 설명하며 “복잡한 사회 이슈에 한 발짝 더 들어가서 (독자들에게)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것”이라 말했다. 용돈 기획은 공정과 빈곤, 양극화 담론 속에서 탄생했다. 속보 경쟁에 매몰된 기성 언론에서 깊이 들여다보지 못한 주제였다. 뉴스를 넘어 인물과 사건을 심층 취재했다는 점에서 박상현 디렉터가 강조한 ‘피처’ 콘텐츠에 해당한다. 

용돈 시리즈의 미덕은 독자의 사연에서 출발해 독자와 함께 사회의 변화를 고민한다는 점에 있다. 독자의 공감을 밑천 삼아 스토리텔링의 동력으로 옮겼다. 시리즈의 분량은 모두 합쳐 40분을 넘긴다. 유원선 디자이너의 말대로 독자의 공감이 콘텐츠의 길이를 상쇄한다.

구체 독자에게 가닿는 스토리텔링

▲ 구독 모델로 나아가는 출판 시장을 설명하는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 미디어오늘

광범위한 대중에게 다가가 공감을 끌어내는 스토리텔링이 있는 한편, 소수 독자에게 맞춤형 스토리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정보를 유통하는 방식이 변한 탓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달라진 미디어 환경을 언급하며 새로운 저널리즘 모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과거 언론은 취재원을 독점해 정보의 유통을 도맡았다. 정보는 언론을 통해 퍼졌다. 장 대표는 이를 ‘정보 저널리즘’이라 불렀다. 시장이 변했다. 대형 포털을 비롯한 플랫폼이 등장했다. 언론은 플랫폼으로 정보를 넘겼다. 속보와 단독 경쟁은 조회수 경쟁으로 변했다. 정보의 질은 거듭 낮아졌다.

장 대표의 대안은 특정 독자층을 상정해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구독형 경제를 만들어낸 출판사의 사례를 들어 새로운 저널리즘 모델을 제시했다. <북저널리즘>은 뉴스의 속도와 책의 깊이를 함께 챙겨 시의성 있는 주제를 깊게 들여다본다는 기획으로 2018년 출범했다. 디지털 콘텐츠와 함께 종이책을 발행하고 있다.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독자가 원하는 독서 모임이나 클래스를 들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언론도 소수 독자들에게 가닿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매일경제>에서 발행하는 ‘미라클레터’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현장 소식을 비롯해 글로벌 테크 트렌드 관련 정보를 매주 3회 뉴스레터 형식으로 전하고 있다. 

신현규 <매일경제> 기자는 미라클레터의 구독자를 단골 식당의 손님에 비유했다. 독자의 수요에 맞춘 콘텐츠를 제공함으로써 추상적 대중이 아니라 구체 독자를 만나게 됐다는 것이다. 맞춤형 콘텐츠를 주자 맞춤형 피드백이 돌아왔다. 기사를 포털에 노출했을 때는 악의 섞인 공허한 댓글이 달렸으나, 뉴스레터를 보내자 독자 개인들이 긍정적 반응과 생산적 비판을 보내왔다.

스토리의 미래, 저널리즘

뉴저널리즘은 문학의 기법을 빌려와 문학의 미래를 저널리즘으로 돌려놓았다. 혁신의 방향은 명확하다. 스토리텔링의 미래를 저널리즘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박상현 디렉터는 스토리텔링의 핵심을 독자와 감응하는 기자라고 봤다. 그는 “현장에서 독자의 눈을 보면서 자기 스토리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스토리텔러”라고 말했다. 저널리즘의 미래는 뉴저널리즘의 오래된 혁신이다.


지난 2~3일 <미디어오늘>은 '2021 저널리즘의 미래 컨퍼런스'를 열었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미래 컨퍼런스’는 미디어 업계의 도전과 실험을 공유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자리로 평가받아왔다. 7년째를 맞는 컨퍼런스의 올해 주제는 '내러티브의 발견, 스토리의 혁신'이었다. 34명의 연사가 10개 세션, 3개의 특강에서 발표했다. 메인 세션은 '내러티브의 발견'이었다. 그밖에도 '스토리텔링의 혁신'과 '미디어 실험과 도전' 등을 주제로 각 분야 전문가가 발표했다. <단비뉴스>는 컨퍼런스 내용을 3차례로 나눠 싣는다. 1회는 내러티브 저널리즘, 2회는 스토리텔링, 3회는 미디어 실험과 도전을 다룬다. (편집자주)

편집 : 유제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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