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김세훈 기자

암호화폐는 자본주의의 이데아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와 시장은 분리됐다. 시장이 하는 일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미덕으로 여겼다. 암호화폐는 오래된 이상을 다시 불러냈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정부와 중앙은행의 규제에서 벗어난 시장에서 개인은 화폐를 자유롭게 거래한다. 암호화폐 시장에는 필요할 때마다 돈을 찍어내는 정부와 은행이 없다. 암호화폐 열풍의 배경에는 ‘무정부성’이 있다. 투자자들은 정치권력과 분리된 시장으로 몰려든다. 정치가 없을 때 시장은 더 잘 돌아간다는 인식이다. 암호화폐 시장의 이면에는 정치를 향한 불신이 작동한다. 

탈정치화한 암호화폐 시장은 신기루다. 시장은 정치의 빈 자리를 대체하지 못한다. 2030세대는 평생 일해도 사지 못할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암호화폐 시장에 뛰어들었다. 정부가 내놓은 부동산 정책에도 집값은 올랐다. 일을 해서 버는 돈의 가치는 거듭 하락하는데, 강남에 집을 가진 사람들의 소득은 나날이 치솟았다. 정치가 실패할 때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시장이다. 처음에는 주식, 나중에는 암호화폐로 옮겨갔다. 달라진 것은 없다. 상위 계층이 부동산을 독점하고, 부가 대물림되는 가운데, 암호화폐 시장이 이루어낸 것은 소수투자자의 ‘성공신화’뿐이다.

▲ 시장 논리로 정치의 영역을 지우는 시도는 거듭 반복됐다. 암호화폐 시장을 둘러싼 논의는 그 연장선이다. ⓒ Pixabay

암호화폐 열풍은 시장 논리로 정치의 영역을 녹인다. 암호화폐 시장을 둘러싼 논의는 투자자를 보호하는 방안이나 투기 과열을 막겠다는 규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암호화폐의 속성이 투자냐 투기냐 가름하는 일은 곁가지다. 시장이 과열되는 원인은 건드리지 않고 암호화폐 산업의 전망을 따지는 것은 정치가 할 일을 방기하고 불공정한 사회 구조를 가려버린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여야는 내년 대선을 의식해 청년들의 표심을 잡겠다고 암호화폐 시장을 새로운 산업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정치와 유리된 시장은 환상이다. 중앙권력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암호화폐 시장도 마찬가지다. 개인을 투자자로 원자화해 불평등과 공정 등 정치의제를 가상화폐와 투기 등 경제 이슈로 탈바꿈하는 구실을 한다. 불공정한 체제는 그 과정 속에서 재생산된다. 암호화폐 시장은 능력주의 신화가 유효한 유토피아처럼 꾸며진다. 출신 배경과 상관없이 투자에 성공하면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는 공간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맥락은 어느새 사라진다.


편집 : 이정민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