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서남권 RE100산단과 기업 유치’ 토론회

“반도체 팹(제조공장)은 모아놓는 게 아닙니다. 지진·태풍·홍수 등 자연재해, 미사일 폭격, 테러, 정전 등 한 군데서 문제가 생기면 다 망하는 거죠. 티에스엠씨(TSMC)에 문제가 생기면 대만이 망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흩어 놓은 거예요. ··· 반도체 팹을 한군데 모아 놓겠다, 클러스터다,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뇌 구조 분석을 해야 할 정도예요. 반도체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지난달 2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에프케이아이(FKI)타워 루비홀에서 열린 ‘탄소중립·균형성장을 위한 서남권 알이백(RE100)산단과 기업유치’ 토론회에서 싱가포르 반도체 회사 매니저인 이봉렬 씨가 말했다. 전라남도, <KBS목포방송>과 기후생태연대가 공동 주최한 토론회에서 이 매니저는 “반도체 팹 클러스터는 자폭”이라며 “반도체 공장은 용인 클러스터가 아닌 호남에 분산해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봉렬 매니저는 삼성반도체, 동부(DB)하이텍 등 국내 회사와 싱가포르 회사 등 반도체 업계에서 30년째 일하고 있으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반도체 특별과외’를 50회 연재했다.

재생에너지 확보와 위험 분산이 중요한 반도체 제조공장

국내외 반도체기업에서 30년째 일하고 있는 이봉렬 매니저가 세계 각지에 흩어져 건설된 반도체 제조공장들을 가리키며 분산 생산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민기 기자
국내외 반도체기업에서 30년째 일하고 있는 이봉렬 매니저가 세계 각지에 흩어져 건설된 반도체 제조공장들을 가리키며 분산 생산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민기 기자

이 매니저는 ‘균형성장과 반도체 팹’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독일의 엑스팹(X-FAB), 미국 마이크론과 인텔, 대만 TSMC 등 글로벌 반도체기업들이 생산 거점을 세계 곳곳에 분산시킨 사례를 지도로 보여주며 설명했다. 예컨대 엑스팹은 드레스덴 등 독일 곳곳에 공장이 있을 뿐 아니라 정글로 둘러싸인 말레이시아 쿠칭에 기존 팹을 두 배로 확장했다. TSMC는 대만 여러 지역에 공장을 분산시킨 것 외에 일본 홋카이도, 미국 애리조나 등 한적한 지대에 공장을 신설했다. 미국 마이크론도 비슷하다. 이 매니저는 “세계가 위험 분산을 위해 팹을 흩어두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수도권에 반도체 팹을 집중시켜 재해와 환경오염, 공급망 차질에 가장 취약한 구조를 스스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반도체 팹이 생산공정에서 화학약품을 많이 쓰고 가스 누출과 화재, 폭발의 위험도 안고 있으므로 30킬로미터(km) 이내에 밀집 거주 지역이 없어야 안전하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도 중국 시안과 미국 텍사스 오스틴 등의 해외 공장은 허허벌판에 지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반면 국내 반도체 팹이 있는 평택, 화성, 기흥 등은 주변에 아파트 등 주거 단지가 밀집해 있다. 반도체 클러스터가 조성되고 있는 용인도 마찬가지다.

이 매니저는 국내 반도체 회사가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도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가 많이 생산되는 서남권의 RE100산단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RE100산단은 입주기업이 전력 사용량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할 수 있게 지원하는 국가산업단지를 말한다. 그는 “애플이 2030년까지 공급망 및 제품의 100% 탄소중립 달성을 약속했기 때문에, 모든 협력업체가 2030년까지 탄소중립을 실천해야 한다”며 “재생에너지로 반도체를 생산하지 않으면 애플에 못 판다”고 말했다. 그는 또 네덜란드의 에이에스엠엘(ASML) 등 독점적인 반도체 장비업체들도 2030년 이후에는 RE100을 달성하지 못한 회사에 공급을 안 하겠다고 하므로, 국내 반도체 회사들이 장비를 사지 못하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인구 500만 호남에서 인재 못 구한다는 주장은 억지”

‘탄소중립·균형성장을 위한 서남권 RE100산단과 기업유치’ 토론회에 나온 발표자와 토론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토론회에는 노동계, 정관계, 학계 등에서 70여 명이 참석했다. 이민기 기자
‘탄소중립·균형성장을 위한 서남권 RE100산단과 기업유치’ 토론회에 나온 발표자와 토론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토론회에는 노동계, 정관계, 학계 등에서 70여 명이 참석했다. 이민기 기자

이 매니저는 호남에 반도체 공장을 지으면 인재 유치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과장됐다고 지적했다. 반도체산업은 석박사 등 고학력 연구 인력보다 대졸, 전문대졸, 고졸 등 다양한 학력의 노동자 비중이 더 높으며, 호남의 500만 인구라면 충분히 팹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구 560만 명의 아일랜드, 540만 명의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서도 대규모 팹이 운영되고 있다. 최근 반도체 공장을 두 배로 확장한 말레이시아 쿠칭은 인구가 260만 명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 매니저는 ‘반도체 클러스터를 호남에 만들어야 할 다섯 가지 이유’로 재생에너지 활용을 통해 RE100 달성이 가능하다는 점, 수도권 과밀이 해소된다는 점, 지방균형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점, 환경오염과 재해 발생 위험을 관리할 수 있다는 점, 물류를 위한 인프라 구축이 쉽다는 점을 들었다.

이순형 동신대 전기공학과 교수는 ‘서남권 RE100산단과 계통 전환’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생에너지 전기가 출력제한으로 낭비되지 않도록, RE100 산단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남 지역의 재생에너지 설비가 10~11기가와트(GW)에 달하지만, 지역 자체 수요는 6~7GW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반면 수도권 송전 능력은 4.6GW에 그쳐, 태양광 발전량 등이 많은 날은 발전을 강제로 줄이는 출력제한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재생에너지 생산 기반 지역에 에너지저장장치(ESS)를 설치하고, 현지 RE100 산단을 조성해 전력을 흡수·소비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이순형 동신대 교수가 ‘서남권 RE100산단과 계통 전환’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기후생태연대 제공
이순형 동신대 교수가 ‘서남권 RE100산단과 계통 전환’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기후생태연대 제공

이익 공유 구조로 주민 참여 활성화 필요

이어진 패널토론에서 황규철 녹색에너지연구원장은 재생에너지 발전에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주민 참여형 소규모 지분 투자 사업 모델을 활성화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덴마크, 독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 각국의 주민 참여형 투자 모델을 예로 들며 “재생에너지원 자체를 킬로와트(kW) 단위로 분할해 주식처럼 거래할 수 있다면 재생에너지 시장이 폭발적으로 확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RE100산업단지 기업 유치가 단순한 지역 현안을 넘어 국가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방의) 산업 공동화가 방치되면 수도권 집중이 가속화돼 지방 소멸과 수도권 부동산 불안이 동시에 심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대기업이 들어오지 않는 RE100산단은 의미가 없다”며 “재생에너지 생산이 가능한 동남권·서남권에 RE100 산단을 조성하고 ESS와 전력구매계약(PPA)을 적극 활용해 대기업을 유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용인 클러스터와 관련해 “수도권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짓게 되면 기업 자산 가치가 올라가는 만큼 수도권 부동산 투기 목적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가 서남권의 RE100산단에 대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민기 기자
박상인 서울대 교수가 서남권의 RE100산단에 대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민기 기자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스웨덴의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에서 배울 것을 제안했다. 스웨덴은 인구와 산업이 남부에 집중됐지만, 풍력과 수력 등 주요 발전원은 북부에 몰려 전력 수급의 불균형이 심했다. 그래서 2011년 전력 자급률이 낮은 남부에 더 비싼 요금을 물리는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를 도입했다. 남북 간 전기요금이 28%가량 차이가 나자, 재생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북부로 기업이 몰려, 북부의 일자리가 늘고 인구도 순유입으로 전환됐다. 석 위원은 수도권의 발전 설비와 송전선이 이미 과포화 상태라며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를 통해 산업체가 자연스럽게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지방으로 이동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전기요금 지역별 차등제 도입이 원칙적으로 결정됐으나, 구체적인 시기와 방식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이 스웨덴의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를 참고해 산업전력 수요를 분산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기후생태연대 제공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이 스웨덴의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를 참고해 산업전력 수요를 분산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기후생태연대 제공

“전력 공급 대책 없는 반도체 클러스터 추진, 이해 어려워”

패널토론의 좌장을 맡은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국가 전체 전력 수요의 약 10%에 달하는 전력을 공급해야 하는 거대 산업단지가 전력 공급 대책 없이 성급히 추진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용인 클러스터는 호남 등 다른 지역에서 전기를 받지 않으면 가동이 어려우나, 송전선 건설 등 전력 확보 방안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홍 교수에 따르면 RE100 산단 등의 구상이 논의되기 전에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재생에너지가 상대적으로 풍족한 지역에 공장을 지어야 한다는 논의가 계속 있었다. 홍 교수는 “새 정부가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만큼 실천력이 반드시 담보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생태연대 김춘이 대표도 지난 1일 <단비뉴스> 전화 인터뷰에서 “이번 정부가 대전환을 약속한 만큼 (호남으로) 반도체 공장을 이전할 결심을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가 패널토론을 진행하며 전력 수급 대책 없이 추진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계획을 비판하고 있다. 기후생태연대 제공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가 패널토론을 진행하며 전력 수급 대책 없이 추진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계획을 비판하고 있다. 기후생태연대 제공

이재석 산업통상부 입지총괄과장은 이와 관련해 “정부도 RE100 산단에 큰 선도(앵커) 기업을 유치하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용인 클러스터에 대해서는 “이미 부지 매수와 지정이 끝난 상황”이라며 호남 이전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지에스(GS)풍력발전의 위진 자문위원은 “자동차 운영비, 교통비, 통신비, 주거비를 다 지원해도 지방에 발령받으면 수년 내로 그만두는 것이 현실”이라며 인재 유지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그는 청년 인력이 생애 주기에 맞춰 결혼하고 맞벌이도 하며 자녀를 키울 수 있도록 교육 환경 등 정주 여건을 갖추는 데 정부와 지자체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2018년부터 추진되기 시작해 2023년 일반산업단지 지정이, 지난해 국가산업단지 지정이 이뤄졌다. 현재 일반산업단지에서 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2028년 완공을 목표로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으며, 국가산업단지에서는 삼성전자가 2030년 초반 완공을 목표로 이르면 내년 초 공장 건설을 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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