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대] 125. 경기도 기후도민총회가 보여준 가능성

“저는 ‘기후격차’라는 말을 들었을 때 지역 격차를 가장 먼저 떠올렸어요. 같은 경기도라고 해도 지역 특성에 따라 겪는 문제가 다르다는 점이 정책 수립에 고려되면 좋겠습니다.” 

지난달 30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경기도의회 대회의실에서 경기도 기후도민총회 1차 회의가 열렸다. 동두천시에서 온 중년 남성 윤명철 씨는 경기 북부의 상황이 남부와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중년 여성 이선자 씨는 “기후격차라는 말을 여기 와서 처음 알게 됐다”며 “정보를 얻기 힘든 취약계층이나 노년층에게 기후위기 문제를 알릴 방법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거주지, 나이, 직업, 관심사가 모두 다른 경기도민 102명은 이날 ‘기후위기 해결’이라는 주제 아래 모였다. 기후도민총회는 ‘경기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조례’에 근거해 지난 6월 출범했다. 기후 대응을 위한 공론기구로서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경기도는 이에 앞서 지난해 ‘경기 기후도민회의’를 운영했는데, 올해 출범한 도민총회는 입법을 제안하는 기구로서 좀 더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다고 밝혔다. 

주민 목소리 모아 경기도에 정책 권고 예정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에서 기후도민총회 제1차 회의를 열고 있는 102명의 도민 대표들. 이들은 6개 워킹그룹, 11개 소그룹으로 나뉘어 활동한다. 사진 가장 앞쪽은 청소년으로 구성된 미래세대 워킹그룹이다. 장태린 기자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에서 기후도민총회 제1차 회의를 열고 있는 102명의 도민 대표들. 이들은 6개 워킹그룹, 11개 소그룹으로 나뉘어 활동한다. 사진 가장 앞쪽은 청소년으로 구성된 미래세대 워킹그룹이다. 장태린 기자

도민총회는 원래 지역, 성별, 세대 다양성을 반영해 120명으로 구성됐으나 일부는 개인 사정 등으로 이날 회의에 불참했다. 참석자들은 에너지전환, 기후격차, 소비와 자원순환, 기후경제, 도시생태계, 미래세대 등 6개 워킹그룹으로 나뉘어 논의에 참여했다. 이날 회의는 주제별 전문가 발제와 질의응답, 워킹그룹별 토론 등으로 3시간가량 이어졌다. 회원들은 국내외 기후변화와 에너지전환 현황, 경기도가 추진 중인 알이백(RE100: 재생에너지 전기 100%) 정책을 설명하는 교육 영상을 미리 시청한 후 회의에 참석했다.  

워킹그룹별 토론을 마친 회원들은 정책 제안서 초안을 카드에 작성해 제출했다. 소비와 자원순환 워킹그룹에서는 일회용품에 경고 사진과 문구를 붙이는 정책을 제안했다. 담뱃갑에 흡연 폐해 사진을 넣어 경각심을 높이는 것처럼, 일회용품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현실을 알리자는 취지다. 도시생태계 워킹그룹은 개발 사업 때 녹지를 보존하도록 설계하는 기업에  인센티브(장려책)를 제공해 도심 녹지를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제안된 의견들은 2차 총회 전까지 분야별 전문가들이 검토하며, 회원들은 이를 반영해 2차 총회에서 수정안을 제출한다. 이 수정안은 현업 부서의 검토와 3차 총회를 거쳐 최종 정책 권고안에 담기게 된다.  

에너지전환 워킹그룹에 속한 서은덕 씨가 자신이 작성한 카드를 보여주며 정책 제안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장태린 기자
에너지전환 워킹그룹에 속한 서은덕 씨가 자신이 작성한 카드를 보여주며 정책 제안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장태린 기자

이날 참가자들은 도민총회에 관해 대체로 기대감을 보였다. 광명시에서 생태환경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박종력(60) 씨는 “지역에서 환경운동을 하며 지방자치단체에 정책을 제안하는 과정이 쉽지 않음을 여러 번 경험해,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며 “오늘 참여해 보니 도민들이 제안한 정책을 실질적으로 반영하겠다는 경기도 측의 의지도 느껴지고, 향후 다듬어질 정책들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안양시에 사는 심기오(64) 씨는 “직장 퇴직 이후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이라 생각해 참여를 신청하게 됐다”며 “실질적으로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과 기대감이 함께 있다”고 말했다. 

양주시에서 온 한재현(17) 학생은 환경문제를 다루는 청소년 포럼에서 활동하다, 더 다양한 사람들과 기후문제를 토론하고 싶어 지원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회의에서 청소년 참여자들이 모두 미래세대 워킹그룹에 자동 배치돼 또래끼리만 논의한 것이 아쉽다며 2차 회의에서는 다양한 연령대의 참여자들과 이야기 나누기를 희망했다.  

아직은 갈 길 먼 한국의 기후 거버넌스 

워킹그룹별 토의에 앞서 각 분야 전문가들이 주요 의제에 관해 발제와 질의응답에 나섰다. 사단법인 넥스트의 이주헌 수석정책전문위원이 도민 대표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장태린 기자
워킹그룹별 토의에 앞서 각 분야 전문가들이 주요 의제에 관해 발제와 질의응답에 나섰다. 사단법인 넥스트의 이주헌 수석정책전문위원이 도민 대표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장태린 기자

경기도가 의미 있는 출발을 보여주긴 했지만, 한국의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단위 기후 거버넌스, 즉 기후 정책 수립을 위한 의사결정 체계는 갈 길이 멀다. 국내에서 시민이 모여 기후 정책을 논의하는 기구는 2021년 8월 문재인 정부 당시 탄소중립시민회의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범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2개월 만에 종료됐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위원회 슬림화’ 정책에 따라 아예 폐지됐다. 

이재명 정부는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통해 가칭 ‘기후시민회의’를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산하 기구로 운영될 것이라는 방침 외엔 구체적 방안이 공개되지 않았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은 전국 226개 시군구가 지방 단위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계획을 5년마다 수립·시행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규정했다. 일부 지자체는 계획 수립을 위해 주민 공론장을 열거나(서울 노원구), 탄소중립시민추진단을 운영하고(경기도 고양시), 공청회를 여는 등(경남 진주시, 양산시) 의견 수렴 절차를 밟았으나 모두 일회성 행사였다. 기후 거버넌스 기구 설치와 운영에 관한 사항을 조례에 명시한 지자체는 경기도가 유일하다. 

반면 프랑스와 영국 등은 기후시민회의를 모범적으로 운영했다. 프랑스 기후시민의회(CCC)는 2018년 정부의 유류세 인상에 반발했던 ‘노란 조끼 시위’를 계기로 기후위기 대응과 불평등 해소를 위해 창설됐다. 프랑스 정부는 2019년 10월 ‘관료 중심의 기후위기 문제 해결 방식을 극복하라’는 요구를 수용해 약 540만 유로(약 72억 원)의 예산을 편성해 기후시민의회를 구성했다. 150명의 기후시민의회 구성원은 성별, 나이, 거주지, 학력, 직업 등의 다양성을 고려해 선정됐다. 구성원들은 2019년 10월부터 2020년 6월까지 일곱 차례 대면 회의를 통해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최소 40% 줄이는 방안’에 관해 토론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대중교통인 기차 승차권의 부가가치세율 인하, 건물의 에너지 절감 의무화 등 총 149개 권고안이 제시됐다.  

여성·청년·농민 등 다양한 목소리 반영해야 

영국에서는 하원 주도로 2020년 1월 영국 기후시민의회(CAUK)가 출범했다. 프랑스가 새로운 정책 설계에 초점을 맞췄다면, 영국은 기존 정책을 평가하는 데 중점을 뒀다. 영국 정부는 무작위로 선정된 3만 명의 시민에게 참여 의사를 묻는 우편을 보냈고, 이에 응답한 2000여 명 중 나이, 성별, 교육 수준, 민족 다양성, 기후변화 관심 정도 등을 고려해 108명을 선정했다. 

기후시민의회 구성원들은 ‘2050년까지 영국의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영(0)으로 만들기’를 목표로 식량, 농업, 토지, 이동 및 소비 등 4개 대주제에 관해 4개월 동안 토론했다. 토론은 세 번의 대면 회의와 두 번의 온라인 회의로 진행됐다. 최종적으로 50개 이상의 정책 권고를 담은 556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발간해 정부에 전달했다. 영국 정부는 “보고서의 권고안들을 정책 수립에 참고하겠다”고 밝혔다. 

2020년 1월 열린 영국 기후시민의회 1차 회의 모습. 4개월의 토론을 거쳐 기후시민의회가 발표한 최종 보고서는 식량, 소비, 에너지 등에 관한 50개 이상의 정책 권고를 담았다. Climate Assembly UK 누리집 갈무리
2020년 1월 열린 영국 기후시민의회 1차 회의 모습. 4개월의 토론을 거쳐 기후시민의회가 발표한 최종 보고서는 식량, 소비, 에너지 등에 관한 50개 이상의 정책 권고를 담았다. Climate Assembly UK 누리집 갈무리

경기도 기후도민총회를 시작으로 한국 정부와 지자체들은 바람직한 기후 거버넌스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민간단체인 녹색전환연구소 기후시민팀 김주온 연구원은 지난 4일 <단비뉴스> 전화 인터뷰에서 “여성, 청년, 농민 등 다양한 구성원들의 참여를 통해 실질적인 숙의·공론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기후 거버넌스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학습한 내용을 소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토론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함께 이 과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예산이 배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원은 이재명 정부가 복원하겠다고 밝힌 기후시민회의에 관해 “일시적이고 형식적인 기구가 아니라, 직접적 영향력을 가진 상시적 기구로 운영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황은정 나다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5일 단비뉴스 이메일 인터뷰에서 "(기후시민회의 등이) 정부 자문에 그치지 않고 권고안이 정책 과정에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문적 기능을 넘어 일정한 심의·권고권을 법적·제도적으로 보장하거나, 정부 위원회(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등)와의 관계를 제도적으로 명시해 권고안이 정책 과정에 반영될 경로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황 연구원은 또 "회의 과정과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시민사회가 평가할 수 있어야 ‘형식적인 동원’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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