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석태 칼럼] “언론 스스로 문제 해결 실마리 찾는 노력 필요”
한국 언론에는 문제가 많고, 강력한 규제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론에 문제가 많다는 데 동조하는 목소리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치열한 정파적 갈등은 언론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연료 역할을 한다. 쌍방울 그룹의 이재명 대표 방북 대가 송금 의혹을 보도를 놓고 애완견이라는 말도 아깝다는 공격이 쏟아졌다. 현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MBC 보도를 향해서는 보수 진영이 아예 방송사 문을 닫는 게 낫다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22대 국회에 다시 등장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팬덤’이라고 부르는, 특정 정치인을 강하게 지지하는 사람들로서는 그 정치인에 부정적인 보도를 인정할 수 없다. 팬덤의 강도와 비판적 보도에 대한 공격적 성향은 비례한다.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가 문을 열자마자 언론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자는 법안을 민주당 의원들이 제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연스럽다.
언론은 한국 사회에서 치열한 정파적 대결이 벌어지는 영역이다. 언론을 놓고 이렇게 살벌한 대립이 계속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한쪽에서는 공영방송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 진영들 사이의 싸움이 편법과 불법을 넘나들며 진행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언론을 통째로 겨냥한 규제 강화가 추진된다. 지지하는 정치 진영을 중심으로 사회가 쫙 갈라져서 언론을 놓고 대결한다. 언론이 정파적 대결의 최전선이 되면서 정작 언론 전반에 대한 제도 개선 논의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22대 국회 문 열자 바로 법안 제출…핵심 내용은?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제는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에 들어 있다. 22대 국회 임기 이틀째인 2024년 5월 31일에 제출됐다. 비록 대표발의자가 민주당 최고위원이기는 하지만 당 차원에서 제출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법안이 21대 국회에서 제출된 여러 언론중재법 개정안들을 놓고 진행됐던 논의를 별로 반영하지 않은 것도 특징적이다.
법안의 내용은 세 가지다. 먼저 언론의 ‘악의적인 보도’로 인격권이 침해되면 실제 손해의 3배까지 배상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다음은 ‘악의적이고 진실하지 못한 언론보도’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정정보도 등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을 네 배로 늘리자는 것이다. 마지막은 정정이나 반론, 추후보도를 원래 보도와 같은 지면과 분량으로 게재하게 하자는 것이다.
법안의 징벌적 손배제 조항은 “법원은 언론사가 악의적으로 제30조 제1항에 따른 인격권을 침해한 행위가 명백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같은 조 제2항에 따른 손해액의 3배를 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손해배상을 명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악의적’이라는 말은 ‘허위사실을 인지하고 피해자에게 극심한 피해를 입힐 목적으로 왜곡보도를 하는 것’이라는 정의 규정까지 두었지만 법률 규정에 들어가기엔 너무나 추상적이다. 이 정의에 나오는 ‘극심한 피해’는 어떤 것인지 여전히 알기 어렵다. ‘왜곡보도’는 정확히 어떤 보도를 말하는지도 모호한데, 법안의 제안이유 등에는 아무런 추가 설명이 없다. 불편한 비판적 보도들이 징벌 대상이 되는 등 언론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정정보도나 반론, 추후보도를 할 때는 원래 보도의 지면과 분량으로 방송하거나 게재해야 한다는 부분도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물론 이런 조항을 제시한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지금도 원래 보도는 대문짝만하게 해놓고 틀린 부분을 정정할 때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지면 한쪽 구석에 배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정이나 반론이 현실적인 의미를 갖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종종 나오는 이유다. 비슷한 내용의 별도 법안이 제출돼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나 법안이 간과하는 대목이 있다. 먼저 지금 우리가 보는 정정이나 반론 등의 방법은 조정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합의했거나 법원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다. 또 정정이나 반론은 어떤 보도의 전부가 아니라 특정 부분에 대한 것일 가능성이 더 크고, 특정한 하나의 보도에 대해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정정이나 반론의 크기가 원래 보도와 같아야 한다는 단순한 표현은 복합적인 현실을 담아내지 못한다. 지금도 당사자들이 제법 큰 크기의 정정보도문 게재에 합의하거나, 법원이 실제 보도 위치와 상관없이 정정이나 반론을 뉴스 첫머리에서 길게 방송할 것을 명령하는 사례도 있다. 지금 같은 법안은 오히려 당사자 간의 합의를 방해할 수도 있다. 정정이나 반론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연구도 없이 취지만 앞세워 비현실적인 조항을 만들어서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각종 청구 기간을 늘리는 것도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지금은 해당 보도가 있음을 안 때로부터 3개월, 해당 보도가 있은 때로부터 6개월 안에 정정 등을 청구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언론피해 구제 기간을 ‘이렇게 짧게’ 정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마치 이것이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도 이 ‘3개월-6개월’ 시한을 넘겨도 정정이나 반론을 청구할 수 있다. 언론중재법이 아니라 민법을 적용하면 보도가 있음을 안 때로부터 3년, 보도가 있은 때로부터 10년까지 손해배상과 정정 등을 청구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언론중재법을 제정할 때 왜 청구 기간을 ‘3개월-6개월’로 정했을까? 언론중재법 이전의 ‘정기간행물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로는 보도가 있음을 안 때로부터 1개월, 보도가 있은 때로부터 6개월 안에 반론을 청구할 수 있었다. 언론중재법을 만들며 청구 기간을 사실상 세 배로 늘린 것이다. 1개월이든 3개월이든, 기간을 짧게 제한한 배경에는 이런 청구권이 언론사의 고의나 과실이 없어도 인정해주는 권리라는 점이 있다. 민법에 따라 명예훼손 등의 책임을 물으려면 해당 보도가 언론사의 고의나 과실에 따른 것임을 입증해야 한다. 언론중재법에 따라 정정이나 반론을 청구할 때는 이런 것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 대신 청구 기간을 짧게 제한해 균형을 잡은 셈이다.
2005년 당시 초선의원으로 언론중재법 제정안 공동 발의자로 이름을 올린 정청래 의원이 이런 사정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적어도 잘못된 보도를 정정하는 것에는 언론 스스로 시한을 따지지 않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다만 기존의 언론피해 구제에 큰 법적 공백이 있는 것처럼 몰아갈 일은 아니다. 언론 규제는 뭐든 좋다는 논리가 아니라면 말이다.
언론의 ‘자율규제 강화’ 논의는 어디로 갔을까?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제가 추진되던 2021년 하반기,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이 법안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인권위원회가 문제를 지적했고, 국제적으로는 휴먼라이츠워치 등 인권단체들에 이어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까지 나섰다. 그런 국내외의 법안에 대한 비판이 가능했던 배경 가운데 하나는 당시 여러 언론단체가 추진하던 ‘자율규제 강화’ 논의였다.
언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적 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 언론자유 원칙과 충돌하는 문제가 생긴다. 언론자유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공권력의 통제는 최소한에 그쳐야 하며, 특히 언론자유의 본질적 측면을 침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이미 다양한 언론자유에 대한 규제가 존재한다.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도 명예훼손이 성립할 수 있고, 많은 나라가 폐기한 명예훼손에 대한 형사처벌도 존재한다. 사실을 말해도 명예훼손으로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정부 산하기관인 언론중재위원회가 언론 분쟁을 처리하고, 역시 사실상 행정기관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방송 보도의 내용을 심의해 행정규제를 가할 수 있다.
이렇게 중첩적인 언론에 대한 행정적, 사법적 규제가 존재하는 나라에서 다시 징벌적 손배제 등을 도입하려는 것은 그 자체로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언론보도로 인한 피해를 언론사들이 자율적으로 구제하겠다는 발표는 이런 상황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좋은 접근법이었다. 특히 신문, 방송은 물론 인터넷 언론까지 포괄하는 ‘통합형’ 자율규제기구 논의도 눈길을 끌었다. 전통 언론들도 인터넷 서비스를 운영하는 상황에서 신문, 방송, 인터넷 언론을 구분하는 규제 시스템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물론 당시에도 자율규제가 이상적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울 거라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기존의 신문윤리위원회, 인터넷신문윤리위원회가 실효성 없는 솜방망이 규제로 일관하고 있는데 통합형 자율규제기구를 만든다고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주장이었다. 그래도 언론단체들이 구성한 통합형언론자율규제기구 연구반은 연구보고서를 냈고, 이를 바탕으로 언론단체들이 실무적 논의를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21대 국회에서 징벌적 배상제 법안 추진이 좌초하면서 통합형 자율규제기구 논의도 사라졌다. 법안 통과를 막기 위한 ‘면피용’ 아니냐는 일부의 의심을 사실로 만들어줬다. 이제는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법안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더라도 통합형 자율규제기구 논의를 되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언론 친화적 정권’이 따로 있나…자기 실력으로 문제 풀어야
지금 사실상 국회를 장악한 민주당이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제를 포함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처리하는 데는 장애물이 없다. 이재명 대표에 대한 재판이 하나씩 정점을 향하면서 언론과의 신경전은 더 치열해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징벌적 손배제는 물론 여러 가지 언론 규제책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은 더 빨라질 수 있다. 이 대표 재판이 아니라도 언론개혁을 명분으로 언론 규제를 강화하는 건 지금 야권 지지자들에게는 일종의 신념 비슷한 것이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윤석열 정부는 당연히 거부권을 행사할까? 이미 보수 언론들도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식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지 오래됐고, 더구나 김건희 여사에 대한 비판 보도의 수위는 상당히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주도한 법안이라고 윤석열 정부가 당연히 막아줄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발상일 수 있다. 이른바 ‘김영란법’ 제정 과정에서 여야가 언론을 적용 대상에 넣은 것도 순식간이었다. <MBC>에 대한 현 정부의 공세적인 대응이나 김만배 씨 인터뷰 보도를 둘러싼 강경 대응 기조를 보면 어느 순간 오히려 현 정부가 언론에 대한 강경한 규제를 주도해도 이상하지 않다. 정치적 여야 대립 구조에 올라타서 문제를 풀려는 안이한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앞으로 언론에 대한 징벌적 배상제 논의가 다시 불붙는다면 이제는 2021년 같은 통합형 자율규제기구 도입 논의 정도로 불길을 끄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사업자단체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그런 논의의 실질적인 진전이 어렵다는 점도 확인됐다. 한번 실종 사태를 겪은 자율규제 논의를 살리려면 사업자단체들이 문제를 좀 제대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지난번처럼 어정쩡하게 하다 말 것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는 게 나을 수 있다.
이 글은 <관훈저널> 2024년 가을호(통권 172호)의 특집 ‘언론과 권력’ 코너에 실린 칼럼을 관훈클럽 측의 허락을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