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석태 칼럼] 여야가 바뀌어도 승복할 방법을 찾아야
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법제화하는 것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 방송 관련 법을 고치는 문제는 매우 정치적인 사안이다. 지금 공영방송 지배권을 놓고 벌어지는 온갖 황당한 행태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느 쪽이든 공영방송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방송제도가 정치 쟁점이 된다는 것은 관련 논의가 어떤 가치나 철학이 아니라 오로지 각 진영의 유불리를 기준으로 진행된다는 말이다. 방송 관련 법률 제정이나 방송규제기관 등을 둘러싸고 계속되는 비현실적인 촌극들을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가 바로 이런 현실적 계산이다. 그런 계산의 결과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지금 KBS와 MBC 보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장을 바꿔 공영방송의 보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정치권이 공영방송을 겨냥하거나 사수할 충분한 동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한국 언론의 정파성이 그만큼 방송사 구성원들에까지 내재화됐음을 드러낸다. 언론과 정치권의 문제만도 아니다. 정치권이 이렇게 대놓고 방송을 줄 세우려는 행태를 국민이 따끔하게 혼낸다면, 지금처럼 여야가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내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지자들까지 공영방송 쟁탈전을 열렬히 응원하는 상황이니, 어느 쪽이든 거리낄 것이 없다.
20대에 이어 21대, 22대 국회에서 잇달아 공영방송 개혁을 내건 법안들이 추진되고 있다. 문제는 20대 때와는 달리 최근의 법안들은 여야 합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법안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형성된 것도 아니다. 정부 여당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진보적인 학자들 중에도 지금 법안을 일방 처리하는 것에 부정적인 사람이 적지 않다. 비록 큰 의미도 없어 보이는 필리버스터 끝에 법안들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대통령의 재의요구권을 넘어설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공영방송을 둘러싼 갈등을 지금처럼 이어가는 것은 여야 모두에게 현실적으로 득이 되지 않는다. 방송 규제기관들을 편법 운영한다는 논란에 시달리는 여권이나, 공영방송 독립성을 강조하는 민주당이 한발씩만 물러선다면, 지금이야말로 공영방송을 제대로 독립시킬 수 있는 좋은 상황이다. 다만 지금 법안처럼 여야가 합의할 가능성이 없는 방안은 내려놓는 것이 현실적이다. 여야가 합의 가능한 것에서부터 길을 찾아야 한다.
일방 독주 방지할 지배구조와 ‘정치적 방화벽’ 만들어야
여야가 합의할 수 있는 방송 독립성 확보 방안의 출발점은 간단하다. 공영방송을 직접 장악하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누구도 공영방송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만드는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다. 실제로 여야가 이런 합의점에 이른 적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전에 여야가 합의했던 이른바 ‘공영방송 장악 금지법’이다. 2017년 여름, 문재인 대통령이 반대해 무산시켰던 바로 그 법안들이다.
여야 의원 162명은 2016년 7월, 방송법과 방송문화진흥회법, 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을 공동 발의했다. 공영방송들의 감독기구를 여야가 7대 6으로 추천해 대통령이 임명하는 13명의 이사로 구성하고, 사장 임면은 재적 3분의 2 이상 찬성이라는 특별다수결에 따르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정치권이 공영방송 감독기구 이사를 직접 추천하는 방식에 대한 지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7대 6의 비율로 구성한 이사회에서, 3분의 2의 특별다수결을 통해 특정 진영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사장으로 앉히는 것을 막는 것은 엄청난 변화다. 전문성 떨어지는 정파적 인사가 이런 과정을 쉽게 통과하긴 어렵다.
사장추천위원회도 재적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사장 후보를 정하게 했다. 이 특별다수결 요건은 상대방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낙하산이나 정파적 인물을 걸러내는 장치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공영방송을 둘러싼 온갖 파행을 지켜본 당시 여야가 내린 결론이, 어느 한쪽의 독주를 막자는 것이었다.
공영방송에 최소한 상대 진영도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을 사장으로 임명하도록 하는 것에 덧붙여, 방송제도 전반의 정파성을 걷어내는 것도 필요하다. 방송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들에 정치적 입김이 미치지 못하도록 방화벽을 쌓는 것이다. 방송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공직이 대상이다.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대표적이다.
대선 승패에 따라 크기만 달라질 뿐 여야 모두 방송규제기관 구성에 일정한 지분을 보장받고 있다. 캠프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선거가 끝나면 각종 언론 관련 자리를 차지한다. 방통위와 방통심의위 외에도 많은 자리가 있다. KBS 이사회,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는 물론 한국언론진흥재단, 시청자미디어재단도 있다. 심지어 언론중재위원을 뽑을 때 캠프 활동 경력을 따지는 일도 생긴다.
방화벽은 어떻게 쌓아야 할까? 2015년 민주당이 낸 방통위설치법 개정안에 기본 틀이 들어 있다. 당시 민주당은 당원 신분을 상실한 지 3년, 대선 후보의 당선을 위해 방송, 통신, 법률, 경영 등에 관해 자문해주거나, 선출직 공무원과 대통령직 인수위원으로 활동한 지 3년이 지나지 않은 경우를 방통위원 결격사유로 제안했다. 실제 법률에는 선출직 공무원이나 대통령직 인수위원을 그만둔 지 3년 이내라는 요건만 추가됐다. 당시에 제안됐던 모든 사항이 결격사유로 포함됐다면 그 이후 상당수 문제 인사들이 방통위에 발을 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방송, 언론 관련 공직에 이런 결격사유를 적용한다면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실효성을 위해 결격사유는 조금 확대하는 게 좋다. 캠프에서 활동하거나 지지선언 등에 이름을 올리는 등 공개적인 정치활동을 한 사람, 인수위 등에서 공개 활동을 한 사람을 3년 동안 이런 직위에서 배제한다면 정치와 방송 사이에 제법 단단한 방화벽이 된다. 위에서 언급한 특별다수결 제도에 덧붙여 KBS 이사회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에 이런 정치적 인물을 배제하면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은 큰 전기를 맞을 것이다.
‘소신 있는 자기편’ 앉히려는 싸움을 멈춰야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8월, 이른바 공영방송 장악 금지법을 비판하며 “최선은 물론 차선의 사람도 사장이 안 될 수 있다”, “온건한 인사가 선임되겠지만 소신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발언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최민희 의원은 민주당이 중립적 방송환경을 만들지 않아서 정권을 잃었다고 했는데, 진단의 옳고 그름을 떠나 문제는 지금 민주당이 추진하고 있는 방송 관련 법안들이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권이 바뀌자마자 이전 정권에서 임명된 사장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 쫓아내는 일이 당연한 듯 반복되고 있다. 공영방송을 대선에서 이긴 세력의 전리품으로 생각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런 관행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은 물론 나도 가진 것을 내어놓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특정 공영방송 사장을 교체하기 위한 편법도 문제지만, 반대로 특정 공영방송 사장을 지키겠다며 법안을 단독 처리하고 방통위원장 탄핵안을 내는 것도 정상은 아니다. 어느 쪽이든 공영방송을 전리품 취급한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말 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입법을 하려면 당장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여든 야든, 정권을 잡아도 공영방송 사장을 소신 있게 편들어줄 사람을 앉히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정치적 동지나 확실한 우군이 아니라, 상대 진영도 인정할 만한 전문성과 중립성을 가진, ‘정치적으로 온건한 사람’을 각종 방송 규제기관들과 공영방송 사장에 앉히는 것을 받아들여야 이 문제가 풀린다.
*이 글은 월간 <헌정> 8월호(통권 506호)에 실린 칼럼을 <헌정> 측의 허락을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지난달 말 방송 관련 법안들이 국회를 통과한 부분만 수정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