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로운 청년] 오스틴 배쇼어 원어민 강사노조 충청분회장
지난 6월 22일 오후,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가 노동자로 가득 찼다.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셀 수 없이 다양한 깃발이 나부꼈다. 그 가운데 낯선 깃발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한글로 ‘원어민강사지회’라고 적혀 있다. 깃발 아래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였다. 민주노총 산하 일반노조에 속한 원어민 강사 노조원들이었다.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인종차별 없애라!”
누군가 한국어로 구호를 외쳤다. 미국에서 온 오스틴 배쇼어(27) 씨였다. 이날 오스틴은 깃발을 들고 원어민 강사들의 앞자리를 지켰다. 평소 그는 학원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의 법과 문화를 소개하는 틱톡 계정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오스틴은 노란 리본을 단 빨간색 조끼를 여미고 한국의 노조원으로 살아간다. 그는 원어민 강사노조의 충청분회장이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학생
오스틴은 1997년에 태어났다. 미국 오하이오주 남동부에서 대대로 농장을 운영해 온 가정에서 자랐다. 안온한 시골에서 보수적 가풍 아래 평온하게 살던 그의 인생은 고등학교 시절에 이르러 급전환했다.
고등학생이던 2012년, 밤마다 게임을 했다. 게임의 세계에서 한국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오스틴에게 한국 문화를 알려줬다. 당시 유행하는 노래라며 크레용팝의 ‘빠빠빠’도 들려줬다.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됐다. 경쾌한 리듬과 함께 한국이라는 나라가 왈칵 찾아왔다.
오스틴이 사회 운동에 끌린 것도 그 시절이었다. 고등학교에서 정치 수업을 들은 게 결정적이었다. “그때부터 내가 이상해졌다”고 기자에게 말하며 오스틴은 웃었다. 여러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다가, 성인이 된 2015년 녹색당에 가입했다. 녹색당 오하이오주 중앙위원회에서도 일했다. 2018년 지역 의회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교육자의 길을 만난 것도 고등학생 때였다. 2014년, 고교 선생님의 소개로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을 알게 됐다. 비영어권 나라의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그에게 전 세계 학생을 만나는 직업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2015년, 영어 교육과 중국어 전공으로 켄트주립대학에 입학했다.
입학 무렵만 해도, 사회운동가와 영어 교사의 꿈을 한국에서 동시에 이루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인연은 우연히, 그리고 운명처럼 찾아왔다. 대학 기숙사의 룸메이트가 한국인이었다. 한국에 대한 오스틴의 관심이 되살아났다. 켄트주립대에 ‘한국 문화 동아리’를 스스로 만들었다. 한국 유학생과 미국인 학생이 어울리는 동아리에서 오스틴은 3년 동안 회장을 맡았다. 오하이오 농장에서 자란 백인이 대학 내 한국인 커뮤니티의 대표 역할까지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 대중문화에만 빠져 지낸 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진지했다. 사회문제와 관련한 관심의 과녁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바뀌었다. 2017년 교환학생 자격으로 순천향대학에 왔다. 1년 동안 그는 한국의 노동법과 동물보호법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잠시 미국에 돌아간 그는 2019년 6월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준비가 된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가 되다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으니, 중국에서 영어를 가르칠 수도 있었다. 높은 소득을 보장하겠다는 중국 학교의 제안도 있었다. 오스틴은 거절했다. “한국이 친근해서, 한국이 더 좋아서” 그렇게 했다고 오스틴은 말했다.
더 좋아했던 한국에서 시작한 영어 강사 생활은 순조롭지 않았다. 고액 연봉을 이미 마다한 그에게 큰돈을 벌겠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 아니다. 그래도 월급이 너무 적었다. 한국에서 처음 받은 월급이 200만 원 정도였다. 수천만 원이 넘는 대학 학자금 빚을 갚으려면 매달 100만 원을 미국으로 송금해야 했다. 남은 돈으로 한국에서 생활하기 힘들었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자신의 월급이 최저임금에 해당한다는 걸 알게 됐다. 한 달 209시간을 일하면 월급 210만 원을 받았다. 시급 1만 원에 해당하는 돈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원어민 강사의 최저 월급이 지난 22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고 오스틴은 기자에게 말했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일해도 같은 돈을 받았다. 정규 강의 외에도 잔업과 야근 등으로 월 240시간에서 250시간까지 일했지만, 월급은 똑같았다. 코로나19가 유행한 2020년부터 학원 수강료가 올랐지만, 원어민 강사의 임금은 그대로였다. “특히 사설 학원의 사업주 가운데 근로기준법도 따르지 않는 이가 많다”고 오스틴은 말했다. 기관지염에 걸려 병가를 쓰려했지만, 학원장이 허락하지 않아 콜록거리며 수업한 적도 있었다. “건강 문제로 출근을 못하면, 돈을 내놓으라거나 대체 강사를 직접 구해오라고 요구하는 학원장도 있다”고 오스틴은 말했다.
그런 일을 겪으면 한국이 싫어지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오스틴은 달랐다. 그는 여전히 한국을 좋아한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다만,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과 달리, 다른 나라에서 한국으로 옮겨왔을 뿐이다.
그래서 노조에 가입했다. 2022년 11월, 오스틴은 한국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하 ‘이주 노조’)의 조합원이 됐다. 자신의 권리만 챙기려는 일이 아니었다. 근로계약과 관련한 어려움을 겪는 어느 원어민 강사가 이주 노조를 찾아왔다. 한국의 노동법을 이미 공부한 오스틴은 그를 상담하며 도왔다.
원어민 강사를 위한 노동조합의 탄생
오스틴에겐 운명 같은 우연이 종종 일어났다. 이주노동자 노조에서 원어민 강사를 도우며, 원어민 강사를 위한 노조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무렵, 원어민 강사노조가 만들어졌다. 2023년 4월, 부산에 사는 원어민 강사들이 주축을 이뤄 노조를 설립했다.
충남 천안에 사는 오스틴은 원어민 강사노조의 충청분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따로 분회장을 두지 않고 일했다. 원어민 강사노조 설립 1년여 만인 지난 5월 25일, 처음으로 충청분회의 회장을 선출했다. 오스틴은 투표자의 만장일치로 초대 분회장이 됐다.
부산에 본부를 둔 원어민 강사노조는 현재 서울분회와 충청분회를 두고 있다. 두 분회의 간부는 오스틴을 포함해 모두 4명이다. 부산 본부의 간부들이 주로 영남의 원어민 강사를 돕는 동안, 서울과 충청의 분회는 수도권은 물론 호남, 강원, 제주의 원어민 강사 문제를 담당한다. 오스틴 충청분회장은 그래서 바쁘다. 어려움을 겪는 원어민 강사를 상담하고, 학원의 노동법 위반 증거를 함께 찾거나, 그에 대한 신고를 돕는다. 법적 분쟁이 커지면, 전문적인 법률상담가도 소개한다.
국내에서 취업비자를 얻어 원어민 강사 자격을 지닌 외국인은 2024년 8월 기준 1만 3387명이다. 서울과 인천을 포함한 수도권에 7328명의 원어민 강사가 거주하고 있다. 2851명이 거주하는 영남 지역이 두 번째다. 1450명이 사는 충청 지역은 전국에서 세 번째로 원어민 강사가 많은 곳이다. 이 가운데 원어민 강사노조에 가입한 이는 100명 정도다.
한국은 나의 집
설립 초기라서 노조 조직률이 높지는 않지만, 노조가 할 일은 많다. 몇 년 동안 일해도 퇴직금을 받지 못하는 원어민 강사가 적지 않다. 원어민 강사를 포함한 이주노동자들은 국내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다. 퇴직금은 법적 권리이지만, 한국법을 잘 모르는 원어민 강사는 그런 제도가 있는지 잘 모른다. 고용주들은 이를 악용한다. 학원의 근무 관행도 문제다. 공휴일에도 수업하는 학원이 있다. 그 경우엔 원어민 강사에게 법정 휴일근무수당을 지급해야 하지만, 이를 지키지 않는 학원이 많다.
원어민 강사가 겪는 문제는 다양하지만, 그 원인은 비슷하다고 오스틴은 생각한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주민을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보지 않는 시선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법, 제도, 관습을 차별적으로 적용하는 일이 빈번한 것이다.
“한국에서 살고 싶기 때문에” 그런 부당함을 바로잡으려 한다고 오스틴은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파티를 하기 위해 선생님이 된 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했다. 잠시 놀다가 떠나는 게 아니라, 한국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 함께 사는 게 그의 꿈이다.
한국에 오래 머물 결심을 부추긴 것은 물론 한국인들이다. 특히 충청도를 그는 좋아한다. “충청도 사람들은 상냥하고, 친절하고, 또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다. 나에겐 충청도 전체가 집이다”라고 오스틴은 말했다. 특히 미국 녹색당에서 활동했던 이력을 바탕으로 한국에서도 녹색당원들과 친분을 쌓았다. 주로 50대나 60대의 농부들과 어울렸다.
아이들을 위해 교실 밖으로 나온 선생님
물론 한국 학생을 가르치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아이들은 오스틴에게 종종 쪽지를 보낸다. 작은 쪽지에는 ‘선생님, 사랑해요.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와 같은 글이 적혀 있다. 그 쪽지를 건네며 오스틴을 살짝 껴안기도 한다. “정말 귀엽고 순수한 아이들”이라며 오스틴은 웃었다. 한국에서 힘든 일을 마주할 때마다 그 아이들이,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직업이 오스틴을 지탱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본래 직업이 교육자라고 생각한다. 다만, 교육자라면 사회 문제와 인간의 권리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아이들을 아낀다면, 아이들의 권리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오스틴은 말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한국에서 가장 먼저 해결할 문제가 다양성 부족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국적과 인종으로 강사를 차별하는 일, 성적 취향을 빌미로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일, 그리고 시험 점수를 근거로 학생을 차별하는 일이 하나의 뿌리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것이다. 오스틴이 바라는 한국은 다양성이 보장된 나라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그 출발이 될 수 있다. 그래야 학생들도 차별하지 않고, 차별받지 않고 자랄 수 있다.
서로 달라서 최고인 나라를 꿈꾸며
최근 오스틴의 한국 비자가 바뀌었다. 원래 ‘E-2’ 비자였는데, ‘F-2’ 비자를 새로 받았다. 취업비자 시절엔 고용주가 제공한 숙소에서만 지냈다. 노동조건과 환경이 열악해도 일을 그만두기 어려웠다. 새로 받은 것은 거주 비자다. 한국에서 자유롭게 직장과 거주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 국적을 얻진 못했지만, 벌써 한국의 친구들은 오스틴을 ‘천안시민’ 또는 ‘충청도민’이라고 주변에 소개한다.
원어민 강사를 비롯한 이주노동자들이 평화롭게 한국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면서, 언젠가 그는 한국 국적을 얻을 계획이다. 그날이 오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한국 국적을 따면, 과일가게를 열고 싶다”고 오스틴은 말했다. 과일가게 이름도 정해 뒀다고 그는 한국말로 말했다. “이름 짓는 건 서툴지만, ‘새콤달콤’이라고 지을 거예요.”
다른 것이 어울려 빚어진 최고의 맛을 형용하는 그 낱말을 오스틴은 참 좋아한다. 그의 꿈도 같은 낱말로 형용할 수 있다. 한국인과 이주민이 한데 어울린 새콤달콤한 세상을 그는 꿈꾼다.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2021년 실시한 '청년세대 인식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81.3%가 '요즘은 청년이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고난 앞에 좌절하지 않는 청년도 있다. 그들은 제 삶을 긍정하고 주변에 선한 영향을 주면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단비뉴스>는 그들을 '단비로운 청년'이라 부르기로 했다. 꼭 필요한 때 알맞게 내리는 단비처럼, 고난이 만연한 세상에 희망과 용기를 주는 청년을 만나 연속으로 소개한다. (편집자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