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로운 청년] 신수호 한글문화연대 연구원

1편 철학 공부하는 야쿠르트 언니

그는 오전 10시에 출근한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전자우편함을 열어 메일을 확인한다. 며칠 전 경북 경산시 보건소에 보낸 메일에 대한 답변이 왔다. “귀 기관에서 제시한 의견에 동의하는바, 내부 의논을 거쳐 ‘맘 편한 임신 원스톱 서비스’에서 ‘맘 편한 임신 통합 서비스’로 사업명을 변경했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뒤이어 다른 공공기관의 답변도 확인한다. 메일을 모두 확인하고 나면 47개 중앙행정기관과 17개 지방 자치단체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보도자료를 살펴본다. 거기에서 잘못 쓰인 우리말을 찾는다. 다시 메일을 보낸다.

신수호(29) 연구원은 한글문화연대에서 일한다. 한글문화연대는 2000년에 설립된 비영리 시민단체다. 학술, 언론, 행정 분야에서 우리말이 올바르게 쓰이는지 감시하는 활동을 펼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시민 강좌를 여는 한편, 한글과 관련한 학생 동아리 활동을 돕는다. 한글문화연대가 지원하는 학생 동아리는 3개다. ‘우리말 가꿈이 푸름’은 중고등학생 동아리다. 대학생은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과 ‘우리말 가꿈이’에서 활동할 수 있다.

신 연구원은 한글문화연대 연구원 겸 우리말 가꿈이 지도위원이다. 연구원으로서 그는 공공기관의 공문과 보도자료를 보고 잘못 쓰인 우리말을 찾아낸다. 외국어로 오염된 단어를 발견하면 해당 공공기관에 공문을 보내 수정을 요청한다. 10차례 공문을 보내면 3차례 정도 답변이 돌아온다. 바꾸겠다는 답변을 보낸 기관은 2~4주 안에 이를 수정한다. 수정된 사항을 검토하는 것도 그의 일이다. 바뀌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그는 다시 공문을 보낸다. 이 과정이 끝나면 일반 시민들이 보낸 우편도 확인한다. 일상생활에서 목격한 오염된 표기를 한글문화연대에 제보하는 시민들이 있다. 신 연구원은 이들이 보낸 메일을 검토하고 해당 기관에 민원을 넣는다.

그는 올해 초부터 대학생 동아리인 우리말 가꿈이의 지도위원도 맡게 됐다. 우리말 가꿈이 활동을 하는 60여 명의 대학생도 오염된 공공언어를 찾아서 바꾸는 작업을 한다. 올바른 한국어의 쓰임을 알리기 위한 행사도 기획한다.

신수호 한글문화연대 연구원이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한글문화연대 사무실에서 잘못된 우리말을 바꿔 달라는 공문을 공공기관에 보내고 있다, 신수호 제공
신수호 한글문화연대 연구원이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한글문화연대 사무실에서 잘못된 우리말을 바꿔 달라는 공문을 공공기관에 보내고 있다, 신수호 제공

우리말 지킴이의 탄생

그는 대학에서 한국언어문화학을 전공했다. 그 공부가 좋았다. 한글의 역사를 공부하는 게 재밌었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교육 수업도 유익했다. 학과 수업을 통해 한글의 바른 표기법과 유래를 익히며 한글에 깊은 흥미를 갖게 됐다.

애정을 갖고 공부한 덕분에 좋은 성적을 받았다. 마침 그가 다니던 학교는 학생들을 해외로 보내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실습 기회를 제공했다. 2017년 겨울, 교수의 추천을 받아 필리핀 세종학당에서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쳤다. 한국어는 필리핀에서 인기 있는 언어였다. 세종학당을 찾은 학생들은 대부분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같은 케이팝 가수들을 좋아했다. 한국인 남편을 둔 필리핀 여성들도 한국 문화를 배우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그 경험 이후 신 연구원은 한글과 한국어를 더 널리 알리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한글을 지키려고 발품을 팔다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 것은 대학 4학년이 된 2019년 3월이다. 한글문화연대의 대학생 동아리 우리말 가꿈이에 가입했다. 외국어에 오염된 공공언어를 찾아 개선하는 그 동아리에서 그가 처음 발견한 것은 ‘키스 앤드 라이드’(Kiss and Ride)라는 단어였다.

‘Kiss and Ride’ 또는 그 약자인 ‘K&R’은 헤어질 때 입맞춤하는 영미권의 문화에서 비롯된 단어다. 이 단어를 한국의 기차역 앞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운전자가 승객을 배웅하거나 마중 나올 때 잠시 차를 세워둘 수 있는 구역에 영어로 ‘Kiss and Ride’라고 적어두었다. 대다수 이용자는 그 단어의 뜻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신 연구원은 이 표시를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바꾸고 싶었다. 그는 인터넷 블로그 위성 지도를 통해 전국의 기차역을 살펴보며 ‘키스 앤드 라이드’ 구역의 목록을 작성했다. 해당 지역은 나중에 직접 찾아갔다. 이 구역에 관한 일반 시민의 생각도 설문조사를 통해 알아봤다.

발품을 팔아 모은 자료를 토대로 국민신문고를 통해 각 기차역마다 민원을 넣었다. 한글문화연대를 통해서도 따로 공문을 보냈다. 그 결과, ‘Kiss and Ride’ 또는 ‘K&R’이라는 영문 표기가 ‘환승 정차 구역’이라는 한국어로 바뀌었다.

우리말 가꿈이 동아리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은 4개월이다. 그는 첫 활동 기간이 끝난 뒤, 다시 우리말 가꿈이에 지원했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2년여 동안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이 기간 내내, 신 연구원은 전국 모든 기차역의 ‘키스 앤드 라이드’ 구역을 찾고 민원을 넣었다. 전국 42개 키스 앤드 라이드 구역 가운데 39개 구역에서 영문 표기가 사라지고 한글 표기가 등장했다.

2020년 5월,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세종대왕릉역 앞에 ‘Kiss and Ride’를 줄여 ‘K & R’이라 적힌 정차구역이 있다. (위 사진) 당시 대학생이던 신 연구원이 문제를 제기한 뒤인 2022년 7월, 그 표기는 ‘환승정차’로 바뀌었다. (아래 사진)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의 이름을 붙인 기차역 앞에 영문 표기가 적혀 있다는 점이 더욱 충격적이었다고 신 연구원은 단비뉴스 기자에게 말했다. 신수호 제공
2020년 5월,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세종대왕릉역 앞에 ‘Kiss and Ride’를 줄여 ‘K & R’이라 적힌 정차구역이 있다. (위 사진) 당시 대학생이던 신 연구원이 문제를 제기한 뒤인 2022년 7월, 그 표기는 ‘환승정차’로 바뀌었다. (아래 사진)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의 이름을 붙인 기차역 앞에 영문 표기가 적혀 있다는 점이 더욱 충격적이었다고 신 연구원은 단비뉴스 기자에게 말했다. 신수호 제공

동아리 활동이 끝나갈 무렵, 신 연구원은 대학원 졸업 논문을 쓰고 있었다. 논문 제목은 ‘국어 순환을 위한 공공언어 외국어 남용 개선 사례 연구’였다. 2020년 12월 25일,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공공언어에 대한 논문을 쓴다는 것을 전해 들은 이 대표는 그에게 몇몇 대목을 조언했다. 뒤이어 제안도 했다. 한글문화연대의 연구원 자리가 비었는데 그곳을 채워줄 수 있겠냐는 제안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연구원으로 살기 시작하니 오염된 한국어가 더 잘 보였다. 전국 소방서의 대표 구호를 바꾼 것도 그가 펼친 활동의 결실이다. 2021년 7월, 거주 중인 경기도 의왕시의 어느 길을 걷다가, 소방서 입구에 적힌 구호를 발견했다. ‘세이프 코리아’(Safe Korea)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의 공공기관인데도 영어 구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신 연구원은 위성 지도를 통해 서울, 경기, 강원, 충청 지역 47개 소방서의 구호를 일일이 찾아봤다. 이들 기관에 일일이 공문을 보냈다. 그 가운데 26개 소방서가 구호를 한국어로 변경했다. 10개 소방서는 영문 표기를 삭제했다.

2021년 7월 4일, 신수호 연구원이 직접 찍은 경기도 의왕소방서 구호 사진이다. 영어로 ‘Safe Korea’라고 적혀 있다. (위 사진) 신 연구원이 공문을 보내 수정을 요청한 뒤인 2021년 7월 22일 이 소방서의 구호가 한국어로 바뀌었다. (아래 사진) 신수호 제공
2021년 7월 4일, 신수호 연구원이 직접 찍은 경기도 의왕소방서 구호 사진이다. 영어로 ‘Safe Korea’라고 적혀 있다. (위 사진) 신 연구원이 공문을 보내 수정을 요청한 뒤인 2021년 7월 22일 이 소방서의 구호가 한국어로 바뀌었다. (아래 사진) 신수호 제공

오염된 공공언어가 모두 개선될 때까지

그는 평소에 말할 때도 외국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키오스크’는 ‘무인단말기’로, ‘엘리베이터’는 ‘승강기’로 바꿔 이야기한다. 한국어로 대체할 수 있는 외국어는 의식적으로 한국어를 사용한다고 그는 말했다. “나부터 우리말을 써야 (외국어로 오염된) 언어 생활에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신 연구원은 앞으로도 공공언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그의 새로운 목표는 버스의 ‘하차종’ 표기를 우리말로 바꾸는 것이다. 전국 대부분의 시내버스에 있는 하차종을 보면, 영어로 ‘STOP’이라고 적혀 있다. “외국인들을 배려해 영어로 썼다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자국의 언어로 표시하고 있어요. 빨간색으로 표시가 돼 있고, 다른 승객이 내릴 때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한국어로 표기해도 외국인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토마리마스’(とまります)라고 쓰인 히라가나로, 대만은 ‘샤처링’(下车鈴)이라고 적힌 한자로 하차종을 표기한다. 신 씨는 우리나라의 하차종을 ‘멈춤’이라는 한글로 표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봉이나 고용 안정 등 세간의 직업 기준에 관해 그는 별 생각이 없다. 오직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는 일에 관심이 많다. 한글문화연대에서 일하는 것에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으니, 당분간 이 일에 집중할 생각이다. “앞으로 어디서 무슨 일을 하건, 한국어와 관련된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신수호 연구원은 말했다.

공공과 일상에 번져있는 오염된 말과 글을 바꾸려는 그의 열정을 돕거나 후원하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된다.

https://www.urimal.org/13

신수호 한글문화연대 연구원이 인생 목표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말 가꿈이’ 명찰을 보여주고 있다, 안소현 기자
신수호 한글문화연대 연구원이 인생 목표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말 가꿈이’ 명찰을 보여주고 있다, 안소현 기자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2021년 실시한 ‘청년세대 인식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81.3%가 ‘요즘은 청년이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고난 앞에 좌절하지 않는 청년도 있다. 그들은 제 삶을 긍정하고 주변에 선한 영향을 주면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단비뉴스>는 그들을 ‘단비로운 청년’이라 부르기로 했다. 꼭 필요한 때 알맞게 내리는 단비처럼, 고난이 만연한 세상에 희망과 용기를 주는 청년을 만나 연속으로 소개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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