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헬레니즘

   
▲ 이창우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연구와 복원에 불을 지폈다. 지금까지 미진했던 가야사 연구가 역사복원은 물론 영·호남 화합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다. 반기는 측도 있지만, 우려의 시각 또한 만만찮다. 그동안 되풀이되었던 역사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새 정권에서도 반복될지 모른다는 걱정에서다. 수 없는 논쟁과 검증을 거친 학계의 다양한 성과가 손쉽게 부정되는 경우를 보아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친일우익들은 지나치게 좌편향 되었다고 비판하고, 재야 역사학자들은 ‘식민사학’이라고 깎아내리기 일쑤다. 8년간 수많은 학자들이 공을 들인 동북아역사지도가 결국 폐기된 것도 정치의 개입 때문이란 지적이 많다. 박근혜 정부가 올 초까지 추진하던 ‘국정교과서’는 솥뚜껑 보고 놀라는 역사학자들을 만들어낸 대표적인 예다.

▲ 고고학적 고증을 바탕으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연구 중인 무세이온의 학자들을 재현한 모습. ⓒ Wikimedia Commons

알렉산더가 일군 헬레니즘 시대 이집트를 차지한 알렉산더의 부하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은 알렉산드리아에 인류 최초의 종합대학 겸 연구소라 할 만한 ‘무세이온(Mseion)’을 설립했다. 무세이온은 헬레니즘 시대 문화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학문의 성지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각국에 서한을 보내 책을 긁어모으고 항구에 정박하는 모든 선박에서 책을 압수해 필사한 뒤 원본은 남기고 필사본을 돌려줬다. 그렇게 인류 최초의 도서관이라 불리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50만 권의 장서가 수집됐다. 도서관은 학문 연구와 교육에 필요한 다양한 부대시설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완벽한 연구 환경을 만들어줬다.

한국의 연구자들이 낙인처럼 달고 사는 고민거리 두 가지가 무세이온의 학자들에겐 필요 없었다. 먼저 돈 걱정. 무세이온의 과학자와 인문학자 각각 60명씩 120명은 실용적 성과물이 없어도 평생 급료와 연구 환경을 제공받았다. 두 번째, 학문의 자유다. 쾌락주의자이자 무신론자였던 키레네 학파의 테오도로스는 그 사상 때문에 아테네에서 쫓겨났지만 곧 무세이온에 초빙되었다. 다신교 국가인 그리스 문명권에서 무신론을 연구했으니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를 연구한 셈이다. 진정한 쾌락은 죽음이라 믿어 자살만이 인류 문제의 근원적 해결책이라 설파했던 헤게시아스는 교육활동만 금지되었을 뿐 연구 활동에 지장을 받지는 않았다.

2300년 전 알렉산드리아보다 힘겨운 대한민국 학자들의 현실. 국가의 구미가 당길만한 주제로 연구 과제를 신청해 지원을 받지 못하면 연구를 시작하기조차 힘들다. 몇 년 전 ‘융합’이라는 키워드가 유행했을 당시 한국 연구자들은 너도나도 관심 분야와 ‘융합’을 끼워 맞춰 연구비를 신청했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해야 본인의 연구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연구는커녕 ‘일상’을 영위하는 일도 버겁다. 한국에서 교수가 아닌 연구자들의 고용 안정성은 최악에 가깝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저자 김민섭은 생계를 위해 시작했던 ‘맥도널드’ 아르바이트를 통해 비로소 건강보험을 지원받은 경험을 고백하지 않던가.

역사 연구자들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가야사 연구가 미진한 이유는 연구자들의 불안한 삶과 연구방법론의 편협성 때문이다. 가야에 대한 기록이 풍부한 『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활용해도 식민사학이라는 거센 비난에 부딪치는 교조적 학문연구 풍토다. 어디 이런 문제가 가야사 연구뿐이겠는가.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토대 마련, 그 어떤 정치 논리나 사상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연구풍토 조성.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발언이 2천300년 전 헬레니즘 시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학문 진작 방법론에 접근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남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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