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월드] 유신독재 닮아가는 에르도안 대통령

지난 2013년 6월, 터키 최대의 도시 이스탄불의 탁심광장(Taksim Square)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졌다.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를 동원한 강경 진압에 나섰다. 빵 심부름을 가던 소년 베르킨 엘반(15)은 그 시위 현장을 지나다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베르킨은 이듬해 3월 8일,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지 269일 만에 옥메이다느 종합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분노한 터키 국민들은 소년의 이름을 연호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베르킨은 영원하다.” 

“어머니의 분노가 살인자를 죽일 것이다.”

▲ 베르킨 엘반의 얼굴이 그려진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선 터키 시민들. ⓒ Flickr

당시 베르킨의 죽음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아픈 공명을 일으켰다. 김주열, 이한열 열사. 각각 4·19혁명과 6·10항쟁 당시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은 청년들이다. 이들을 포함한 시위 현장의 희생자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마중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2017년 터키에선 베르킨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붕괴’가 진행 중이다. 그 중심에는 레제프 타이프 에르도안(63) 대통령이 있다. 그의 행보는 한국의 독재자였던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

‘술탄 개헌’으로 절대 권력자의 자리에 

지난 4월 16일 터키에서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개헌안이 국민투표로 통과됐다. 이번 개헌으로 터키의 정치체제는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바뀌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대통령은 내각 임명권과 해산권을 행사할 수 있고 정당 참여도 가능해졌다. 또 법률에 준하는 효력을 가진 행정명령을 내릴 수 있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 판·검사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돼 사법부 장악력도 커졌다. 즉 대통령이 행정, 입법, 사법에 걸쳐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 개헌은 절대 권력을 지닌 이슬람 지배자에 빗대 ‘술탄 개헌’으로 불리기도 한다.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이래 80년간 이어져 왔던 의원내각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지난 4월의 개헌안 통과로 에르도안 대통령은 입법부, 사법부에까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게 됐다. ⓒ Wikimedia Commons

한국에서는 1960년 4.19혁명 직후 잠시 도입되었던 의원내각제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종식됐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2년 대통령책임제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켰다. 대통령 임기는 4년 중임제로 바뀌었고, 대통령에게 국무총리 임명권, 긴급명령권, 계엄선포권, 공무원임명권, 사면권, 법률안거부권까지 부여했다. 또 대법원장과 대법원 판사 등에 대한 임명권까지 확보했다. 이런 제왕적 대통령제의 골격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박정희는 1969년 6차 개헌에서 대통령의 3연임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1972년에는 유신헌법까지 통과시켜 사실상 종신 독재자의 길을 추구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긴급조치권 및 국회해산권 등 초헌법적 권한을 부여하면서 국민기본권은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경제 총리’ 에르도안과 ‘한강의 기적’ 박정희 

반체제 인사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에르도안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는 면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에르도안은 2003년부터 2014년까지 4번이나 총리를 연임했을 만큼 인기 있는 정치인이다. 대통령 선거, 국민투표 등 이어진 선거에서 대부분 승리했다. 혁신과 민생 행보를 내세웠던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처음에는 투표마다 승리했다. 두 사람의 공통적인 인기 비결은 경제성장이었다.

에르도안이 집권하기 전 터키의 경제 상황은 매우 나빴다. 세계경제지표에 따르면 2001년 터키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5.7%였고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넘쳐났다. 1960년대부터 10여 차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았고, 인플레이션은 연평균 100%라는 살인적 수준이었다. 에르도안은 총리가 된 후 10여 년간 연평균 4.5%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교통 등 국가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일자리를 만들어 실업률을 낮췄다. 외국인 투자도 끌어들이고 건강보험 체계도 강화했다. 이런 눈에 띄는 성과 덕에 에르도안은 ‘경제 총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8년의 재임 기간 중 연평균 9.2%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경부고속도로 등 국가 인프라를 확장하고 중화학 공업을 육성했으며 수출 증대에 역점을 뒀다. 의료보험제도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처음 도입했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급속한 경제 발전과 기초적 복지제도 도입은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배고픔’을 뼈저리게 느꼈던 대다수 국민들은 유신독재가 노골화하기 전까지는 선거에서 꾸준히 그에게 투표했다.

이슬람주의와 반공주의, 국민 정서를 무기로  

에르도안은 이슬람주의 정서를 자신의 지지기반을 굳히는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터키는 에르도안 집권 이전에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주의’를 내세워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을 축소해왔다. 일부일처제, 여성선거권 등을 통해 남녀평등을 추구하는 한편, 대학교에서 히잡(여성의 얼굴 가리개)을 쓰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에르도안은 2007년 총리 선거에서 공공기관의 히잡 금지령 해제를 공약해 승리했다. 국민의 약 99%가 이슬람교도인 터키에서 이슬람주의 정서를 자극함으로써 지지기반을 굳힌 것이다.

교사인 아르슬란(28·여) 씨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종교의 자유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확장됐다”고 말했다. 10년 전만 해도 그는 히잡 금지령 때문에 터키의 대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수 없었다. 에르도안은 2008년부터 히잡을 쓴 여성도 캠퍼스에 들어가게 했고 2013년부터는 공무원으로 일할 수 있게 했다. 지난 2월부터는 군대에서도 히잡을 착용할 수 있게 됐다. 아르슬란 씨는 “나는 (히잡이 금지됐던)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에르도안의 개헌에 찬성표를 던진 이유를 밝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반공주의로 국민을 결속시켰다. 한국전쟁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60~70년대, 국민들의 마음속엔 북한의 전쟁 도발에 대한 불안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박정희는 ‘반공정신’을 자극하며 지지기반을 다졌다. 그가 선거마다 승리한 데는 ‘북풍 효과’를 빼놓을 수 없다. 1967년 6대 대선에서 가까스로 윤보선에게 승리한 박정희는 그해 7월 ‘동백림사건’으로 민심의 물꼬를 돌려놓는다. 이 사건은 지난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위원회가 “정보기관의 불법연행과 고문에 의해 확대·과장된 사건”이라고 판명했지만, 당시에는 북한의 위협을 입증하는 대규모 간첩사건으로서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잠재우는 데 기여했다.

반대파는 초법적 조치로 잔인하게 탄압

에르도안이 장기집권하는 동안 반대세력이 침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디언>에 따르면 2013년 당시 총리였던 에르도안이 게지공원(Gezi Park) 재개발 정책을 발표했을 때 저항이 가시화했다. 이스탄불에 얼마 남지 않은 녹지인 게지공원을 헐고 탁심병영(1940년 철거된 오스만제국의 군사시설)을 복원하겠다는 계획에 대해 처음에는 녹지 훼손을 반대하는 생태주의자들이 반대 행동에 나섰다. 그러다 세속주의자들, 성소수자들, 여성운동 세력 등이 대거 시위에 참가했다. 음주 규제, 성소수자 차별 등 반세속적인 정책과 집회, 출판, 인터넷에 대한 검열로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경찰의 과잉진압도 시위가 확산된 원인 중 하나였다.

11년간의 총리직을 거쳐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된 에르도안은 2년 뒤 군부의 쿠데타에 직면했다. 터키 군부는 전통적으로 국부 아말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를 지지하는 집단으로, 이전에도 이슬람 정당이 득세할 때마다 쿠데타를 일으킨 전력이 있다. 하지만 2016년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고, 에르도안은 이를 빌미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국가비상사태는 터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에르도안 대통령의 칙령에 법률과 동등한 효력을 부여했다. 에르도안은 과거의 정치적 동지이자 온건 이슬람주의자인 페트라 귤렌(77)을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해 수배하는 동시에 귤렌 지지자들을 대거 축출했다. 2017년 현재까지 공직에서 축출당한 군인, 경찰, 공무원, 교수는 5만 명이 넘는다. TV·라디오 방송국 24곳도 반란 혐의를 받아 방송허가를 취소당했다. 해고된 언론인은 3,000명에 육박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유신헌법을 선포한 뒤에는 시도 때도 없이 긴급조치를 발령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했다. 법원은 단지 긴급조치의 해제를 건의할 수 있을 뿐이었고 대통령은 이를 묵살할 수 있었다. 긴급조치권은 사법심사의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사실상 대통령에게 헌법개정의 권한을 부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긴급조치는 1호부터 9호까지 발령되었는데, 9호에 이르러서는 긴급조치에 대한 비판적 언급만 나와도 체포되었기에 술자리·교단·언론 할 것 없이 수많은 일반인이 감방살이를 했다. 김대중, 문익환, 함세웅, 장준하 등 민주화운동 인사들은 긴급조치의 단골 피해자들이었다.    

한국 민주화가 터키의 희망이 될까 

▲ 2013년 6월 11일 탁심광장.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하는 가운데 최루탄 연기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 Flickr

개헌에 반대하는 터키 시민들은 국민투표 다음 날인 4월 17일부터 다시 거리로 나섰다. 부정선거 의혹이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터키 선거관리위원회는 개표 직전 선관위 관인이 없는 용지도 유효 처리한다고 기습 발표했다. 관선 단체장이 있는 곳의 선거구는 찬성 몰표가 쏟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에르도안 정부는 4년 전 탁심광장 시위 때와 마찬가지로 최루탄과 물대포를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하고 있다. 유럽평의회 의회협의체(PACE)는 지난 4월 25일 표결을 거쳐 터키를 ‘인권·민주주의 감시 대상 국가’로 강등했다.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해 온 터키는 각종 제도개혁으로 2004년 감시등급에서 벗어났으나 13년 만에 재강등되는 수모를 당했다. 2009년 99위였던 세계 언론자유지수 순위는 어느새 155위로 떨어졌다.

한국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평화적 집회를 통해 대통령을 탄핵하고 2017년에는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 시절 부활이 도모됐던 ‘박정희 신화’는 이제 완전히 깨지는 분위기다. 반면 터키에서는 40여 년 전 한국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재현되고 있다. 씁쓸한 사실은 터키 민주주의의 후퇴에 한국이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5년 경찰청이 새정치민주연합 정청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터키는 한국이 가장 많은 최루탄을 수출하는 나라다. 터키의 시민단체연합 ‘최루탄금지운동(Ban Tear Gas Initiative)’이 한국 방위사업청에 최루탄 수출 중단을 요청한 일도 있다. 베르킨 엘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최루탄도 한국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터키는 6·25전쟁 당시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내준 우방이다. 그 뒤로 양국 국민은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른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한-터키 수교 60주년이다. 이한열과 김주열의 희생 위에 민주주의를 누리는 우리가 터키 국민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IS, 히잡, 국제유가, 그렉시트, 브렉시트, 스위스 국민소득, 인종갈등, 미국대선, 일대일로, 지카 바이러스, 사드, 북핵... 외신을 타고 매일 쏟아지는 뉴스 소재다. 이를 제대로 모르면 현대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어렵다. 나아가 무역, 안보에서 생존을 보장받기 힘들다. 인류역사가 제국주의 시대로 변모한 이후, 자본과 권력은 국경을 넘어 세계로 뻗는다. 냉혹한 국제 정치, 경제 무대에서 자본(Capital)과 힘(Hegemony)의 논리를 제대로 꿰뚫어야 하는 이유다. 단비뉴스는 <단비월드>를 통해 국제사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표면적인 움직임과 그 이면의 실상을 파헤친다. 난마처럼 얽힌 우리 앞의 과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세계평화와 인류 행복을 증진하는 열쇠를 얻기 위해서다. (편집자)

편집 : 박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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