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 풍속문화사] ③ 무덤 속 미라 마스크의 비밀
[문화일보 공동연재]

나일강의 범람을 기준으로 정한 두 번째 계절 페레트(파종철). 페레트의 3번째 달 22일이었다. 이집트 17왕조 파라오 소베켐사프와 왕비 무덤에 침입자가 나타났다. 무덤을 보수하기 위해 석공들이 주위에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굴범들은 파라오의 부장품 가운데 값나가는 모든 것을 자루에 담았다.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던 걸까. 소베켐사프의 미라에 불까지 질렀다. 금(gold)을 분리하기 위해서다. 금을 털어가기 위한 만행은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았다. 파피루스 기록에 따르면 파라오와 왕비 두 구의 미라에서 도굴범들은 금 14.5㎏을 녹여 가져갔다. 도대체 미라의 어느 부위에서 이렇게 많은 금이 나왔을까.

도굴 극심하던 BC 11세기, 파라오 무덤의 황금 털이범들

우리의 사계절과 달리 태양의 나라 고대 이집트는 계절이 3개였다. 한 계절에 4개월씩 있었던 셈. 그 3번째 달에 있었던 이 사건은 20왕조 8대 파라오인 람세스 9세(재위 BC 1126∼BC 1108년, P.A 클레이튼 저 ‘파라오 연대기’) 때 이야기다. 20왕조는 신비의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후대에 속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람세스는 19왕조 3대 파라오 람세스 2세다. 18년간 파라오로 군림했던 람세스 9세 재임 기간 중 유난히 도굴 사건이 많았다. 당시 사회문화상을 전하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고대 이집트 역사의 주 활동무대인 룩소르에 있는 ‘왕들의 계곡’ 파라오 무덤들이 도굴되자 람세스 9세는 무덤 실태 조사를 벌였다. 이때 도굴범들을 붙잡아 재판한 기록이 ‘무덤 도굴 파피루스’에 남아 있다. 오늘날 여러 박물관에 흩어져 보관된 이 파피루스 문서에 아문 푸느페르라는 석공의 증언이 담겼다. 여기에 도굴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앞서 소개한 에피소드도 바로 이 석공의 증언이다. 다행히 도굴범은 잡혔지만 시신도 불타고 금도 녹아 버렸는데, 금이 녹기 전 파라오의 모습을 보려면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국립 고고학 박물관으로 가야 한다.

도굴되지 않은 파라오 무덤, 투탕카멘 황금 마스크 

고대 인류 문명이 낳은 화려한 흔적들은 무덤을 통해 장례문화로 남는다. 고분에서 발굴한 유물들은 그 시대의 풍속과 문화를 말해 주는 훌륭한 자료다. 카이로 국립 박물관은 1만 년 이집트 역사가 응축된 문화재의 보고(寶庫)다. 그중 신왕국 18왕조 파라오 투탕카멘(재위 BC1334∼BC 1325년) 무덤에서 발굴한 황금 유물은 백미(白眉)다. 지금까지 알려진 파라오 무덤 가운데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된 경우여서 그렇다.

카이로 국립 박물관 투탕카멘 전시실을 더욱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어 주는 황금 마스크는 길이 54㎝에 무게가 무려 10.23㎏이다. 아기 돌 반지 한 돈이 금 3.75g이니 투탕카멘 황금 마스크에는 돌 반지 2728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의 금이 들어간 셈이다. 금만이 아니다. 황금을 주재료로 값비싼 보석을 넣어 화려하게 꾸몄다. 순금에 라피스 라줄리, 터키석, 홍옥수(카닐리언)로 장식했다. 라피스 라줄리는 ‘푸른 금’, 즉 청금석(靑金石)이라 불릴 만큼 고대 사회에서도 최상의 보석으로 꼽혔다. 원산지는 아프가니스탄이다. 붉은색 옥으로 불리는 홍옥수(紅玉髓) 역시 귀한 보석으로 인더스강 유역에서 난다. 하늘색 터키석은 시나이 반도가 주산지다. 투탕카멘 황금 마스크는 당시 국제교역을 통해 구한 최고의 보석을 집대성한 명품 중의 명품인 셈이다.

▲ 이집트 역사에서 유일하게 도굴 없이 발굴된 신왕국 18왕조 파라오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이집트 카이로 국립박물관 소장·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페니키아의 흙 마스크(튀니지 카르타고 박물관), 흙으로 만든 평민용 관 덮개(뉴욕 브루클린 박물관), 페니키아의 황금 마스크(레바논 베이루트 국립박물관), 태양왕 람세스 2세 아들 카무아세트의 황금 마스크(루브르 박물관). ⓒ 김문환

파라오의 품격, 이집트 예술의 절정 

순금에 값비싼 보석도 보석이지만, 조형미와 표현 기법이 이집트 초상화 예술, 금세공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마스크는 네메스 관(파라오 머리에 써 어깨 밑으로 늘어지는 관 장식), 얼굴, 가짜 수염, 우세크(양어깨에서 목 아래 가슴을 덮는 장식)로 이뤄졌다. 머리를 뒤로 감싼 뒤 양어깨로 내려오는 형상의 네메스 관은 노란 순금에 푸른 청금석이 교차하는 디자인이다. 고결한 파라오의 품격이 묻어난다. 이마 부분에 장식된 2명의 여신, 와제트(코브라)와 네크베트(독수리)는 권력을 상징한다. 여기에 홍옥수와 터키석을 넣었다.

균형 잡힌 이목구비에서 특히 눈이 살아 숨 쉬듯 반짝이는데, 눈동자는 흑요석, 흰자위는 석영을 쓴 결과다. 눈썹과 아이라인은 청금석으로 제작했다. 우세크는 청금석, 터키석, 홍옥수를 번갈아 배치했다. 유리를 녹여 만든 접착제로 단단하게 붙여 투탕카멘 미라 얼굴에 씌웠는데, 미라에 사용한 방부제가 마스크에 녹아 엉겼다. 1922년 투탕카멘 무덤을 발굴한 하워드 카터가 마스크를 벗겨내는 과정에서 투탕카멘 미라 얼굴이 크게 손상됐다. 많이 아팠을 터이다.

영생 기원 장례용으로 등장한 마스크

이집트 역사에서 언제부터 미라에 마스크를 씌우기 시작했을까.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중왕국(BC 2040∼BC 1782년) 시대다. 물론 당시는 금이 아니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BC 1950년쯤 나무로 만들어 채색한 마스크를 만날 수 있다. 처음에는 소박한 형태로 출발해 점점 화려하고 값비싼 재료로 발전해 갔음이 분명해 보인다. 영생을 믿었던 이집트인들은 가급적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시신을 처리해 장례를 치렀다. 생전 모습을 본뜬 조각을 빚어 무덤에 넣었고, 차츰 얼굴 모습을 그대로 본뜬 마스크를 씌워 생전 분위기를 살려냈다. 황금 마스크의 비밀은 영생인 셈이다. 금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니 영생과 잘 어울린다.

신왕국(BC 1570∼BC 1070년) 시대에는 황금에 각종 보석을 곁들인 마스크가 등장한다. 투탕카멘의 예에서 확인한 대로다. 18세에 요절한 파라오의 황금 마스크가 이리도 화려했다면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19왕조의 람세스 2세(재위 BC 1279∼BC 1212년)나 다른 파라오들의 황금 마스크는 어땠을까. 상상은 가능하지만, 모두 도굴된 탓에 알 길이 막막하다. 람세스 2세의 아들 마스크는 전해진다. 람세스 2세가 남긴 혈육, 100명에 이르는 자식 가운데 아들 카무아세트의 도금 마스크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왕실 가족이나 귀족들은 순금은 아니어도 도금 마스크를 쓰고 저승으로 갔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카무아세트 외에 신왕국 시대 황금 마스크 한 점이 더 전시돼 탐방객을 맞는다.

흙 마스크 쓰고 저승길 떠나던 평민들 

부장품은 파라오와 왕실,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다. 평민들이나 가난한 사람들도 장례의식을 잘 치러야 망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믿는 건 마찬가지였다. 효심이 지극했던 우리네처럼 고대 이집트인들도 집안 기둥뿌리가 흔들릴 만큼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다. 그중 부장품을 마련하는 데 가장 많은 돈을 들였다. 평민들이 금으로 미라 얼굴에 마스크를 씌울 수는 없었을 터이다. ‘그래도 조상의 영생을 위해 마스크를 씌우기는 씌워야 할 텐데’하고 고민하다가 고안해 낸 것이 흙 마스크다. 흙을 구워 마스크를 만든 뒤 망자 미라에 씌웠다. 뉴욕 브루클린 박물관에 소장된 흙으로 만든 관 덮개는 재산이 넉넉지 않은 서민용 장례용품이다. 살아서 경제적으로 쪼들렸을 텐데 저승길도 일그러진 흙 마스크를 쓰고 가야 했던 고대 이집트인들. 그때도 금수저, 흙수저 타령이 저승길에 울려 퍼졌다는 게 흥미롭다.

이집트에서 페니키아로 전파된 황금 마스크·흙 마스크

장례문화는 이집트에만 머문 게 아니다.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는데, 이집트와 교역을 하던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맨 처음 이집트 장례문화를 받아들였다. 페니키아는 오늘날 레바논 지역에 자리 잡고 지중해 전역을 다니며 상업에 종사하던 민족이다. 발걸음을 레바논으로 돌려보자. 수도 베이루트의 국립 박물관을 찾으면 페니키아 문명 유물들이 반갑게 인사한다. 이곳 2층 장례문화 전시실에 가면 BC 10∼BC 5세기 사이 황금 마스크들이 반짝인다. 당대 최고의 부자 나라 이집트 파라오만큼은 아니지만 황금 마스크를 사용한 것을 보아 페니키아도 부유한 나라였고, 문화가 교류 전파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 페니키아에는 흙 마스크는 없었을까.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 한가운데 북아프리카 연안에 만든 식민도시 카르타고로 무대를 옮긴다. 카르타고는 오늘날 튀니지다. 수도 튀니스 해안가에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카르타고 유적과 유물이 로마제국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일부 남아 명장 한니발의 전설을 토해낸다. 카르타고 유적지 박물관에 가면 페니키아 문화상이 배어 있는 흙 마스크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카르타고인의 영생을 향한 깨진 꿈을 대신하며 손짓한다.


문화일보에 3주 단위로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교수는 '동서문명사'와 'TV저널리즘'을 강의합니다. (편집자주)

편집 : 김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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