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 풍속문화사] ① 폼페이, 선거벽보의 기원
[문화일보 공동연재]

문화일보에 3주 단위로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교수는 '동서문명사'와 'TV저널리즘'을 강의합니다. (편집자주)

‘폼페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낱말이 있다면 아마도 ‘최후’가 아닐까. AD 79년 베수비오(Vesuvio) 화산 폭발로 화산재에 묻히며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테네가 그리스 문명의 상징으로 각인되듯, 폼페이는 로마 문명의 표상처럼 이름 자체로 가슴 설렌다. 이를 극적으로 잘 그려낸 이가 영국의 정치인이자 소설가 에드워드 불워 리턴이다. 리턴은 폼페이에 가 본 적도 없으면서 ‘폼페이 최후의 날(The Days of Pompeii)’이라는 명저를 남겼다. 밀라노에 외교 사절로 갔다가 거기서 러시아 화가 카를 브률로프가 그린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작품을 보고 1834년 쓴 소설이다. 34세라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전설의 폼페이가 책이 아닌 유적과 유물로 다시 영광의 햇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80여 년 앞선 1748년. 베수비오 분화가 있고, 1700여 년 뒤다. 첫 삽을 뜨고 18∼19세기 발굴을 지속했다. 검은 흙 속에서 폼페이의 비밀이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고대 로마문화상이 한 땀씩 되살아났다. 독일의 요아힘 빙켈만을 비롯해 많은 고고학자가 삶을 바치며 매달린 성과다. 이 결과물에 대한 리턴의 지독스러운 학습이 소설로 이어졌다.

▲ 폼페이에서 가장 번화했던 아본단자 거리. 왼쪽 건물 벽의 붉은 글씨가 로마 시대 쓴 선거 구호다. ⓒ 김문환

고대 로마의 손때 묻은 일기장인 폼페이를 직접 찾은 문인들도 많다. 1787년 독일의 문호 괴테, 1817년 프랑스의 문호 스탕달, 1875년 미국의 문호 마크 트웨인이 폼페이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독일이나 영국의 유럽 상류층 사이에서는 파리를 비롯해 밀라노, 피렌체, 로마를 이어 남부의 폼페이를 돌아오는 프랑스-이탈리아 유적 일주 마차 여행이 필수코스처럼 붐을 이루기도 했다. 기차가 등장하며 사라진 이 여행을 17∼18세기 유럽 문화의 중심이었던 프랑스의 언어로는 ‘그랑 투르(Grand Tour)’라고 부른다. 이 ‘그랑 투르’의 여정을 좇다 보면 흥미로운 기원들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선거 벽보다.

선거 벽보의 기원을 찾아

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한민국이 선거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전국의 골목골목에 곧 선거 현수막이 나부끼고, 벽보들이 유권자의 눈을 사로잡을 것이다. 특정 후보를 소개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선거 벽보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폼페이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방학이면 한국인 단체관광객이 줄을 잇는 곳이다. 폼페이는 2,000여 년을 화산재 아래 묻혀 있다 발굴됐다. 흔히 로마 문명의 실상이 살아있는 ‘풍속화첩’으로 일컬어진다.

애드거 앨런 포의 표현대로, 이 ‘위대한 로마’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특히, 간결한 문구 속에 담아내는 정문일침(頂門一鍼)의 표현력이 타 문명을 압도한다. ‘위대해지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던 인물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는 문구를 남겼다. 독재자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이를 옹호한 공화주의자 키케로는 “역사는 삶의 스승(Historia vitae magistra)”이라는 명언을 들려줬다. 명 카피라이터로 손색없다. 이들이 떠난 지 100여 년 뒤 터진 베수비오 화산의 피해지, 폼페이 아본단자(Abondanza) 거리로 가면 당시 로마인들이 남긴 간결한 문구를 육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아본단자 거리는 서울로 치면 종로다. 종로는 주요 관청이 몰려 있는 세종로와 바로 연결된 상업 거리이자 번화가다. 아본단자 거리 역시 폼페이 정치의 중심지요, 관청이 있던 포럼(Forum)과 연결돼 있다. 이 거리에 목욕탕과 유흥업소, 대형주택들이 즐비하다. 끝까지 가면 로마인들의 최대 오락문화인 검투 경기가 펼쳐지던 원형경기장에 닿을 수 있다. 원형경기장까지 가는 중간 지점에 공중수도를 지나서 선술집 맞은편 인술라(Insula·서민 아파트) 옆 벽면에 붉은색 글씨들이 눈에 띈다. 바로, 선거 벽보다. 여기만이 아니다, 시내 곳곳에서도 이곳보다는 작지만, 주택 외벽에 적힌 붉은 글씨 선거 벽보와 종종 마주친다. 요즘처럼 종이로 만든 화보형 선거 벽보가 아니라, 벽에 직접 쓴 후보자 지지구호이자 문구다. AD 79년 화산재에 묻혔다 되살아났으니, 무려 2000년 가까이 됐다. 흔히 네로나 칼리굴라 같은 폭군 황제들만 기억되는 로마 역사에서 공직자를 투표로 선출했다는 것과 당시 작은 지방 도시에 불과했던 폼페이에 공직자 선출 벽보가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지지자가 자신의 집 담벼락에 직접 써 붙이는 선거 벽보

폼페이 선거구호 벽보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까? 폼페이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대영박물관으로 장소를 옮겨 자세히 들여다보자. 1840년 현재의 건물을 완공해 이주한 대영박물관은 벌써 170년이 넘어 장소가 좁다. 전시되는 유물보다 지하 수장고에 잠자는 유물이 훨씬 더 많다. 대영박물관이 2013년 여름 특별전에서 공개한 유물 가운데 폼페이에서 출토한 선거 벽보가 눈길을 끈다.

폼페이 벽보는 첫째 줄에 아멜리우스(AMELIUS), 둘째 줄에 아에딜레스(AEDILES), 셋째 줄에 루키우스 알부키우스(L.ALBUCIUS)가 적혀 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문자를 변형한 라틴문자를 사용했는데, 오늘날 서양의 영어나 프랑스어, 독일어 등 대부분 언어에서 사용되는 문자다. 그리스 문자와 달리 영어를 통해 우리 눈에 익숙한 라틴문자 3단어 가운데, 첫째 줄과 셋째 줄 아멜리우스와 루키우스 알부키우스는 사람 이름이다. 그렇다면 둘째 줄은? ‘아에딜레스’는 우리말 조영관(造營官)으로 번역되는데, 건축·토목·축제 등을 담당하는 관직명이다. 그렇다면 후보자가 2명인가. 아니다. 아멜리우스와 알부키우스 2명을 조영관으로 뽑아달라는 의미다. 당시 2명을 뽑았기 때문에 벽보를 쓴 이가 2명을 당선시켜 달라고 호소하는 거다.

지금은 후보자가 직접 돈을 내 벽보를 제작하고 이를 선거관리 위원회가 위탁받아 붙여준다. 선거관리 위원회가 주관하기 때문에 다양한 후보 모두의 벽보를 지정된 벽에 붙인다. 로마 시대는 달랐다. 후보자는 점잖게 가만히 있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구호를 벽에 적었다. 2명을 지지하면 2명 다 넣었다. 물론 집주인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로마의 공직 임기는 1년. 따라서 공화정 시대 로마는 매년 한 차례씩 공직자 선출 선거가 펼쳐졌다. BC 80년 로마에 정복된 폼페이의 경우 자치를 인정받아 로마가 황제정으로 전환한 뒤에도 도시를 자체적으로 이끌 공직자를 뽑았다. AD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화산재 아래로 묻히던 시점에도 자치 도시 공직자를 뽑는 선거는 지속됐다.

폼페이의 경우 매년 7월이 선거철이어서 도시 전체가 선거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을 것이다. 요즘처럼 열성 지지자들이 앞서 살펴본 대로 선거 벽보를 붙였는데, 사회적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지지할 경우 오히려 역효과가 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이 점이 명사들을 괴롭혔는데, 일례로 폼페이의 카이우스 율리우스 폴리비오스는 아본단자 거리 선술집에서 일하는 창녀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벽보를 쓰자 역정을 내며 지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옛날에 창녀들도 당당하게 정치적 의사 표현을 했다. 무엇보다 그러한 풍토가 매우 놀랍다.

후보자가 사자후를 토해내던 연단 수제스툼과 투표소 코미티움

로마 역시 아테네처럼 투표권은 시민권을 가진 남자들만 누렸다. 로마 시민권은 남다른 권한이었다. 결혼은 물론 모든 상거래 등의 계약을 할 수 있는 주체이자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시민권을 가진 로마 남자를 ‘옵티모 주레(Optimo Jure)’라고 불렀다. 투표권을 행사한 이들이다. 로마는 시민들이 만나는 공공 광장, 즉 그리스의 아고라를 포럼(라틴어 발음 포룸)이라고 불렀다.

▲ 수제스툼. 후보자들이 정견을 발표하던 연단. ⓒ 김문환

폼페이는 당시 도시가 통째로 화산재에 덮였다가 되살아났기 때문에 포럼도 베수비오 폭발 이전 로마 시대 모습으로 탐방객을 맞는다. 포럼 한가운데 로마 시대 최고신 주피터(Jupiter·라틴어 유피테르)를 모시는 신전이 시민들의 인사를 받는다. 그 앞은 시민들이 모여 장사도 하고 정치 집회도 여는 광장이다. 베수비오 화산과 주피터 신전을 바라보고, 광장에 서면 그 왼쪽 중간지점에 연단이 보인다. 로마 공화정치의 정치 연설단 수제스툼(Sugestum)이다. 주변에 동상 거치대들이 여럿 있어 헷갈리기 쉽다.

▲ 폼페이 시민들이 투표하던 코미티움(투표소). 지금은 터만 남았다. ⓒ 김문환

후보자들뿐 아니라 옵티모 주레들도 당연히 자유롭게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그렇다면 정견발표나 정치연설을 듣고 공직 후보자들을 찍을 투표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당연하다. 코미티움(Comitium)이다. 폼페이 포럼에서 베수비오 화산을 등지고 돌아서면 왼쪽으로 아본단자 길이 시작된다. 그 길의 오른쪽 첫째 건물이 코미티움이다. 지금은 널따란 터만 남았지만, 2000년 전에는 우리네 대선 못지않은 선거 열기를 뿜어내던 장소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끝없는 대화”라고 설파한 역사학자 E. H. 카의 말이 새삼스럽다. 로마인의 연설 단과 투표소, 선거 벽보를 통해 인류의 삶과 역사는 물론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본다.


편집 :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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