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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공약집도 없이 대선을 치른다니
[단비월드] 선진국 충실한 준비, 한국은 선거 보름전도 ‘아직’
2017년 04월 22일 (토) 19:18:16 나혜인 기자 nahyein8@gmail.com

매번 선거마다 ‘정책 토론 실종’이라는 비판이 빠지지 않지만 이번 19대 대통령선거 역시 ‘깜깜이 선거’로 가고 있다. ‘검증’이라는 이름 아래 후보자 자질 논란만 뜨겁고, 각 정당이 어떤 정책 공약을 내걸고 싸우는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우리 선거가 정책경쟁이 되지 못하는 데는 전달자인 언론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책을 눈에 띄는 상품으로 포장해내지 못하는 각 정당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 민주주의 역사가 오래 된 선진국은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주요국 정당의 사례를 비교해 보자.

서구 정당, 선거마다 ‘정강정책 신상품’

서구 선진국의 정당들은 선거 때마다 정강·정책을 ‘리모델링’한다. 미국의 거대 양당인 공화당과 민주당의 경우 지난해 대선 후보 선출에 맞춰 각각 ‘플랫폼(platform)’이라 불리는 정강정책을 개정했다. 미국 정당은 대선후보를 공식 지명하는 전당대회에서 정강정책 개정안을 추인함으로서 당과 후보자가 함께 본격 선거 레이스에 돌입함을 알린다.

공화당의 경우 지난해 7월 클리블랜드 전국위원회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대선후보로 선출하면서 총 66페이지에 달하는 정강정책집 개정판을 냈다. 이번 개정판은 강령 첫머리를 “우리는 미국 예외주의를 신봉한다(We believe in American exceptionalism)”고 못 박아 눈길을 끌었다. 경선과정에서 강조된 트럼프 후보의 신념을 반영한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회복, 헌법질서 부활, 농업·에너지·환경, 복지·교육·보건·치안, 외교 등 5개장으로 구성된 정책집은 유권자들에게 트럼프와 공화당이 지향하는 정부의 모습을 상세히 알렸다.

영국, 캐나다 등 의회중심제 국가는 총선을 계기로 정당들이 ‘성명서(manifesto)’라는 이름의 정책공약집을 낸다. 선거 당시의 이슈를 읽고, 유권자들의 요구를 충실히 담아 집권을 노린다. 보통 집권당의 당수가 총리직을 차지하기 때문에, 대통령제보다 더욱 정당 중심의 선거가 이뤄진다.

우리나라 주요 정당들도 강령이 있고 선거 때마다 정책공약집을 낸다. 그런데 정당강령의 경우 선거 때문이 아니라 당 이름을 바꿔서 개정되는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당의 평균 수명은 2년 6개월이다. 이념과 정책이 아니라 인물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우리 정당정치의 단면을 보여준다. 각 당의 정강정책은 그럴싸한 추상적 문구로 가득하지만, 서로간의 차별성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의 정강정책은 나란히 ‘공정경제·혁신성장’으로 시작한다. 올해 초 창당한 바른정당 역시 제1정책을 ‘경제 정의’로 내걸었다. 시대적 화두로도 볼 수 있으나, 당 이름을 가리고 정강정책을 들여다볼 경우 유권자들이 차별성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 2016년 대선을 앞두고 미국 공화당이 개정해 내놓은 정강정책집(왼쪽)과 2015년 데이비드 캐머런(오른쪽에서 세번째) 시절 영국 보수당의 정책공약집. 캐머런의 왼쪽으로 현재 총리인 테리사 메이가 보인다. ⓒ 미국 공화당, 영국 보수당 홈페이지 갈무리

경쟁 정당 신랄한 비난 뒤엔 충실한 대안이

서구 정당들을 대체로 직설적이고 생활친화적인 표현을 써서 유권자에게 정책을 전달한다. 이념적 정체성을 드러내야 할 때는 상대 당을 신랄하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공화당의 2016년 정강정책집에는 당시 집권당인 민주당(Democratic party), 민주당원(Democrats)이라는 표현이 53번 등장한다. 오바마를 직접 거론한 것도 20번이다. “오바마와 민주당이 미국 보건 시스템을 해체했다”거나 “민주당 총사령관(Commander-in-Chief)이 미군에 족쇄를 채운 지난 8년간 적들은 대담해지고 국가안보는 큰 위험에 처했다”는 식으로 강도 높게 비판한다. 민주당이라고 다를 건 없다. 지난해 7월 올랜도 전국위원회에서 추인된 민주당 정강정책집에는 “여성이 집을 떠나는 걸 위험하게 생각하고, 유급 가족휴가가 국가경제를 병들게 한다고 생각하는 트럼프와 민주당은 다르다”고 조롱했다. 이 정강정책집에는 트럼프의 이름이 총 32번, 공화당이 22차례 등장해 뭇매를 맞았다.

이렇게 상대 당을 공격한 뒤에는 자당이 지향하는 정책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공화당은 오바마케어를 비판한 뒤 “시스템을 단순화함으로서 보건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수요자의 선택 폭을 넓히겠다”고 청사진을 제시했다. 안보정책과 관련해서는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를 천명하며 “자유세계 리더로서 미국의 지위를 되찾겠다”고 공언했다. 민주당 역시 ‘모든 노동자들에 대한 12주 유급 가족휴가’ 공약 등을 명시함으로써 트럼프와 대척점에 섰다. 중산층을 위한 임금 인상, 월가 규제, 국방예산의 효율적 사용 등도 공화당과 뚜렷하게 차별화하는 정책이다.

영국과 캐나다 정당의 정강정책집도 경쟁 정당에 대한 노골적 공격을 담는다. 저스틴 트뤼도 총리의 캐나다 자유당은 이전 총리였던 보수당 당수 스테판 하퍼를 정책공약집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반면 우리 정당들의 정강정책집은 매우 점잖다. 지난 정권과 상대 당에 대한 비판은 물론 일반적인 언급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 영국 보수당은 아이를 돌보는 엄마 사진을 정책공약집 목차 바로 다음 페이지에 실었다. ⓒ 영국 보수당 정책공약집 갈무리

이념 색채 옅어지는 서구의 보수당

‘보수의 변신’은 이제 만국공통어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미국 공화당이나 영국 보수당의 경우 전통적인 이념 노선에서 벗어난 정책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미국 공화당은 ‘국익 최우선’을 앞세워 전통적인 보수 가치와 배치되는 정책도 불사한다. 공공 인프라 사업에 대한 정부의 대규모 투자를 천명한 부분이 대표적이다. 정부 주도의 투자는 본디 시장친화적이고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공화당 노선과 어울리지 않지만, 미국인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트럼프의 강력한 의지에 따른 것이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로 사퇴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시절의 영국 보수당은 정책집 1번에 아동복지정책을 실었다. 비록 집권 말기 지지층의 요구에 굴복해 복지 규모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지만, 보수당 정책집 첫 페이지에 아이를 돌보는 여성의 사진을 실은 것은 상징적이다. 여성과 장애인의 고용평등을  주창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영국 보수당은 전통적으로 조세부담을 늘리는 복지 확대에 부정적이었다. 이에 비해 한국의 보수정당인 자유한국당은 강령 첫머리를 법치주의와 국가안보로 시작하고, 장애인·여성에 대한 언급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 유권자의 생애주기별 맞춤 정책을 제시한 영국 보수당(왼쪽)과 한국 정의당. ⓒ 영국 보수당, 한국 정의당 정책집 갈무리

영국 보수당의 정책집은 그 다음 장에도 눈길이 간다. 캐머런 당시 당수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전문(foreword) 앞에 ‘전 생애 주기별 맞춤 정책(plan for every stage of your life)’이 나열돼 있다. 출생부터 학교교육, 구직, 보육, 장년, 은퇴기까지 시민의 전 생애에 걸쳐 알맞은 정책을 선보인다. 유아기 아동을 대상으로 한 국민의료보험(NHS) 예산을 인상하겠다거나, 장년층을 위해서는 부가가치세나 소득세를 인상하지 않겠다는 식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진보정당인 정의당이 유일하게 ‘내가 행복한 생애강령’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아동·청소년에 대한 무상 공교육, 중장년층을 위한 재취업 보장, 노년을 위한 공적 연금 등이 제시됐다.

성소수자 차별 철폐 공언한 진보정당

진보적 성향의 서구 정당들은 소수자 권리보호를 강조한다. 미국 민주당, 영국 노동당, 캐나다의 신민주당 등이 모두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철폐를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영국은 보수당도 ‘모든 성소수자(LGBT)’의 평등을 위해 계속 싸워나갈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LGBT의 권리 보호를 정강정책에서 천명하고 있는 정당은 정의당이 유일하다. 정의당은 “성적 정체성을 이유로 가해지는 어떠한 폭력이나 괴롭힘, 차별과 배제, 낙인과 편견 등을 없애고, 소수자 혐오 범죄를 강력히 규제하며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겠다”고 명시했다.

녹색성장 및 기후변화정책과 관련해서도 서구 주요 정당들은 상세한 재원마련계획을 바탕으로 신뢰성 있는 계획을 내놓고 있다. 영국 보수당의 경우 2020년까지 탄소배출차량을 줄이기 위해 5억 파운드(약 7,200억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캐나다 집권 자유당 역시 녹색성장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향후 4년간 60억 달러(약 5조원), 10년간 200억 달러(약 17조원)를 집행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반면 우리나라 정당의 경우 녹색성장력 제고(더불어민주당), 환경정의(국민의당) 등 추상적 언어의 나열에 그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 캐나다 자유당의 2015년 총선 당시 정책공약집(왼쪽)과 아동복지수당, 사회인프라 투자 재원조달계획을 나타낸 그래프(오른쪽 위부터). ⓒ 캐나다 자유당 홈페이지 갈무리

재원조달계획과 관련해서는 트뤼도 총리의 캐나다 자유당이 눈에 띈다. 총 88페이지의 공약집 중 거의 모든 정책에 상세한 재원 규모와 조달 계획이 설명돼 있다. 표나 그래프로 제시된 수치는 트뤼도 내각의 ‘강한 중산층(strong middle class)’ 구호에 신뢰성을 더한다.

   
▲ 대선을 17일 앞둔 22일 현재 대통령후보 정책공약집을 내놓은 정당은 홍준표 후보의 자유한국당과 심상정 후보의 정의당뿐이다. ⓒ 자유한국당 홈페이지, 정의당 홈페이지 갈무리

자유한국당과 정의당만 대선공약집 발간

대선(5월9일)을 불과 17일 남겨 둔 22일 현재 정책공약집을 내놓은 후보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와 정의당 심상정 후보뿐이다. 나머지 후보들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해야 하는 20페이지 분량의 10대 공약을 발표한 게 전부다. 아직 전체 공약집을 완성하지 못한 채 홈페이지 등을 통해 정책 발표를 계속하고 있다. 대통령탄핵사태로 촉박하게 결정된 대선 일정이긴 하지만, 공식적인 후보등록 시점까지도 공약집이 준비되지 못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지난 16일 380쪽 분량의 공약집을 낸 심 후보의 경우 ‘내 삶을 바꾸는 10대 약속’을 비롯해 생애주기별 공약, 정치·사법·재벌·조세·언론 등 5대 개혁과제 해법을 담았다. 정책집 마지막 부분에 공약 가계부를 실어 110조원에 달하는 소요 재원 조달 방안을 정리했다.

홍 후보는 지난 17일 320페이지에 달하는 정책공약집을 냈다. 특징은 중앙공약과 시·도별 공약을 나누어 제시했다는 점이다. 중앙공약으로는 국가안보, 일자리·성장, 공정사회·격차해소, 복지·교육·문화, 지방분권·지역발전, 국민안전, 국정혁신 등 7대 공약을 내놨다. 시·도별 공약에는 전국 17개 지역별 개발구상 등을 담았다. 그러나 재원 마련 계획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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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 : 김소영 기자

[나혜인 기자]
단비뉴스 영상부, 환경부, 국제부, tv뉴스부 나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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