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월드] 청년 허브 컨퍼런스

대만은 신입사원 초봉이 20년 동안 거의 오르지 않았지만,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대만의 청년실업률은 지난 20년간 3배 이상 늘었다. 청년층의 월평균 임금이 2만2000대만 달러(약 80만8720원) 수준에 머문다. 높은 실업률에 고물가, 그리고 낮은 임금. 대만 청년의 고통은 한국 청년이 겪는 어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아시아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국가 주도 고도성장을 단기간에 이뤘지만, 사회 여건도 급작스럽게 바뀌었다. 산업 성장기에 어렵지 않게 취직했던 중장년 세대와 달리 고도로 자동화된 산업구조에서 청년 세대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다. 세대 간 온도 차가 큰 이유다.

취업난, 열악한 경제 상황에 청년들 거리의 ‘해바라기 운동’

이런 상황에서 2013년 대만 집권 국민당은 중국과 무역서비스협정 체결에 나섰다. 대만인의 일반적인 감정과 달라 반대여론이 높았다. 하지만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협정안 체결 찬반투표가 의회에서 시행되기 전날 청년들이 움직였다. 협정 체결 반대 시위대는 담벼락을 넘어서 국회의사당에 들어갔다. 12일 동안 30만 명의 청년들이 시위를 벌였다. 결국, 의회인 입법원이 심사를 미루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청년 정치 운동의 성과였다. 이를 태 양화(太陽花) 운동, 즉 ‘해바라기 운동’이라고 부른다.

정당 가입하지 않고도 청년 정치활동 활성화한 ‘풀뿌리’ 성과

운동에 주도적으로 동참했던 페이 위(24‧민주진보당 민주주의연구소 국장)는 대학을 졸업한 지 1년이 채 안 된 때였다. 해바라기 운동의 주역인 청년들은 정치에 참여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다가올 연말 대선에서 국민당의 패배를 이끌어 내자는 데 뜻을 모았다. 페이 위는 이때 국민당과 대결하던 민진당의 옷을 입었다. 전국 단위의 지방자치 단체장과 의원선거가 막 치러질 참이었다.

▲ 대만 민주진보당 민주주의연구소 국장 페이 위가 가운데 앉은 채로 발표하는 모습. 왼쪽은 스와하라 다케시, 오른쪽은 정치발전소 김형근. ⓒ 청년허브

페이 위는 민진당 일원으로써 젊은 의원들을 위한 플랫폼을 만들었다. ”대만에서 초선의원이 되는 것은 정말 어렵다. 경쟁도 치열하다. 이는 청년이 국정에 참여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페이 위의 말이다. 그래서 그가 기획한 것은 ‘풀뿌리’였다. 커뮤니티 위원회를 만든 것인데, 선거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이 민진당에 가입하지 않고도 정치활동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청년이 정당 활동은 아니어도 사회의 변화와 개혁은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해바라기 운동’을 통해 확인한 덕분이다.

집권 국민당 누르고 민진당 약진 성과

결과는 놀라웠다. 국민당 의석은 15개에서 6개로 줄었다. 반면 민진당은 6개에서 13개로 늘어났다. 국민당 역사상 최악의 패배였다. 페이 위는 “사회를 변화시키자는 젊은 층의 열기가선거에 영향을 미쳤다”고 들려준다. 78%에 달한 20~30대 투표율이 정치혁명을 일궜다.

페이 위는 “원래 젊은 층 투표율은 지방의 경우 50% 정도인데, 올해 2016대선에서 20대 투표율은 74%나 됐다”고 소개한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20대는 자신을 대만사람이라고 여겨 친 중국 성향의 국민당 정책에 반감이 크다”고 짚어준다. 대만인의 정체성이 정치세력화로 연결됐다는 분석이다.

해바라기 운동 전에 자생력 있고 강한 '산딸기’ 운동

‘해바라기 운동’은 사실 '산딸기 운동’에 뿌리를 둔다. 2008년 중국의 관료들이 대만을 방문했을 때 대만 정부는 시위 지역 제한, 대만 국기 감추기 등의 조처를 내렸다. 이에 청년들이 반기를 들었다. 폭력사태가 벌어졌고, 경찰이 시위대를 처음으로 강제해산하자 무려 50만 명의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리고 스스로 ‘산딸기족’이라고 불렀다.

스트레스에 약하고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딸기 세대라는 별명에 맞서 자생력 있고 강하다는 뜻에서 ‘산딸기'라 이름 붙였다. 전국에서 대학연합 시위가 일었고, 그때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수백 명 단위의 작은 규모까지 널리 홍보할 수 있었다. 그동안 대만 언론은 학생 목소리를 보도하지 않아 청년 스스로 자신들의 주장과 힘을 공유할 수 없었다. 인터넷이 이를 해결해 줬고, 그 ’산딸기‘ 운동의 성과가 '해바라기‘ 운동으로 이어졌다.

과거 개인 문제를 이젠 사회전체 공동 문제로 인식

페이 위는 “과거에 청년들은 본인이 겪는 문제를 개인 차원으로 돌렸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사회문제로 인식해 공동으로 풀어야 할 정치 개혁의 과제로 본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만 정치에서 청년 정치의 한계가 아직은 분명하다. 페이 위는 “정치에 관심 갖는 대만 젊은이들의 영향력은 앞으로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홍콩의 네이션 로처럼 선거에 직접 나가지는 못한다”고 아쉬움을 드러낸다. 정당에서 서포터 역할만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페이 위의 말에 대만 청년 정치, 나아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소망이 묻어난다. “대만에서 젊은 후보를 만나기를 고대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던 지난 9일 오후 3시 30분. 직선거리 7km 떨어진 시청광장에서는 폭죽이 터졌다. 14km 거리의 서울혁신파크 다목적 홀에서는 중국어, 일본어, 영어, 한국어가 통역기로 오가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일본과 대만, 홍콩에서 날아온 청년 정치인들이 주인공이다. 서울시가 주최한 <청년허브 컨퍼런스>. 주제는 [정당정치의 새 지형: 변화의 정치]다. 아시아 각국의 청년 운동가들은 왜 기성세대 정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는지. 열정적으로 쏟아내는 그들의 현장 경험은 우리가 촛불민심으로 일궈낸 대통령 탄핵안 가결의 시민 혁명과 같은 선상에 놓였다. 탈정치시대를 참여 정치시대로 바꾸는 아시아 청년들의 도전기를 일본, 대만, 홍콩 순으로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편집 : 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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